● 孫忠武 인터뷰 - 워싱턴에서 만난 사람들
盧 정권, 대령 연합회 탄압. 美州 예비역 장교들 뭉쳐
- 한국 전쟁때 아홉번 죽고 열번째 살아난 老兵(노병)이 앞장 -
2004년8월28일
1950년6월25일, 북한 金日成(김일성) 공산주의 집단이 일으킨 남한 침략 전쟁은 피해자인 한국에서는 左派(좌파)들의 농간으로 「잊혀져 가는 전쟁」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전쟁」으로 퇴색,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잊을 수 없는 전쟁」 「영원히 기억 해야 하는 전쟁」 「세월이 가면서 더욱 되살아 나는 전쟁」으로 남아 각종 기념행사와 함께 추모열기가 해가 갈수록 더한다.
半世紀(반세기) 라는 긴 세월이 흘러 갔는데도 한국전쟁역사가 더욱 뚜렷해지고 추모열기가 더해 가고 있는 것은 북한 김정일 집단이 핵무기를 갖고 미국과 자유 세계를 협박하며 핵위기를 만들어 세계를 불안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은 半世紀 전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한반도 통일 전략이 옳았는데도 이를 반대한 당시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을 비판한다. 그때 북한 공산주의를 타도했으면 김정일 집단은 없었을 것이다.
워싱턴 DC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시민공원 링컨 대통령기념관 옆에 「한국전쟁기념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이제 워싱턴 관광 코스에 빼놓을수 없으며 하루에도 수천명이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해마다 6월과 7월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공원을 찾아서 검은 대리석 벽에 새겨진 아들과 남편의 이름을 찾아 어루만지며 흐느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1950년6월25일 북한 金日成 집단이 남한을 침략하면서 일으킨 한국전쟁에 파병 되었다가 이름 모를 한반도 山河(산하)에서 희생된 5만여 명 미군 戰死者(전사자)의 유가족들이 6-7월에 몰리는 것은 한국전쟁이 발생한 6월과 3년 후 휴전이 성립된 7월[1953년]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념공원」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 이름도 모르고 가본 적도 없는 한국을 공산주의 침략에서 구해 주기 위해 정부의 부름을 받았다가 한국 땅에서 산화한 전사자 5만여 명 장병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해 조국이 그들에게 바치는 눈물 어린 추모의 詩도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 KOREA -1953
우리 조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알지도 못하는 어느 한 국가
만나 보지도 못한 낯선 사람들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데
기꺼이 나선
아들과 딸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한다.
1950-1953 한국전쟁에 참가한 용사들을 위해
▶ 침략군에 맞서 소위 계급 달고 6.25 현장에. 아홉번 죽은 후 열번째 살아난 생생한 증언자
이 기념공원에 10여 개의 빛나는 훈장과 상이용사 기장을 가슴에 달고 틈틈이 찾아와서 대리석 벽에 새겨진 戰死者 이름을 쓰다듬고 군복 입은 미군 병사 동상을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기도를 하는 白髮(백발-하얀 머리칼)이 다된 동양인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보이면 공원을 경비하던 경찰관들도 달려와 깍듯이 경례를 하고 관광객들은 그와 함께 사진을 즐겨 찍는다. 그리고 54년 전 그 처참했던 한국전쟁 이야기를 그 사람으로부터 귀담아 듣는다.
그 분이 바로 워싱턴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투철한 反共鬪士(반공투사), 6.25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증인, 아홉번 죽었다가 열번째 기적적으로 살아난[九死一生(구사일생)] 예비역 육군대령 朴允植(박윤식·79) 목사이다.
朴氏는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되기 전에 金鍾泌(김종필. 前 국무총리. 자민련 총재) 소위와 함께 6.25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 휴전이 될 때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다가 1960년 5.16 후 예편한 6.25 전쟁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1945년 8.15 전 일본에서 大阪工業學校(오사카공업학교)를 다니다가 조국 해방과 함께 귀국, 서울에서 단국대학교 법과를 다니다가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학, 1948년5월23일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됐다.
당시 8기 졸업생은 총 1,349명이었다. 2년 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소위·중위 계급을 달았던 8기생들이 총알받이 소대장으로 전투에 투입되어 600명이 전사하고 400명이 부상당했다.
북한은 6.25 새벽 4시에 남한 침략 공격을 시작했으며 그날 아침 朴 소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서부전선 汶山(문산) 지구에 투입됐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에게 아무런 전쟁 준비가 없던 국군들은 숱한 희생자를 내며 3일만에 서울을 적군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간신히 적진을 빠져 후퇴한 부대를 찾아 육군본부가 있는 서울로 숨어 왔을 때 이미 한강 다리는 폭파되어 퇴로가 막혔으며 서울시내는 인민군이 점령, 무자비한 살인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숨어서 한강을 따라 이동, 김포 쪽에서 헤엄을 쳐 한강을 건널 때 추격하던 적군에게 발각되어 사격을 받았다.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강을 헤엄쳐 건너편 둑에 도착했을 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기절했다.
후퇴하던 국군들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수원으로 후퇴한 본대에 도착했을 때 이미 戰死者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戰場(전장) 터를 누비던 朴氏는 몇 차례 부상을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 중공군 개입으로 피눈물 나는 1.4 후퇴. 강원도 철원 철수 작전 때 크게 부상!!
압록강까지 진격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피눈물 나는 후퇴를 거듭, 1951년1월 두번째 서울을 적군들에게 내어주는 뼈아픈 불행을 경험했다.
1951년4월18일 朴 대위가 지휘하며 지키던 강원도 철원 용포리 전투는 한국전쟁사에 남아있는 처절한 죽음의 전투였다. 후퇴하는 부대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최전방을 사수하던 朴 대위에게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4방을 적군에게 포위당한 부대는 며칠을 항전하며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순간 중공군이 쏜 기관총알이 오른쪽 대퇴부를 관통시켰다. 곧이어 부근에서 대포가 폭발되면서 날아온 파편이 온몸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대구에 있는 제27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몸에 박힌 파편을 빼내고 오랜 기간의 치료 끝에 야전으로 돌아왔을 때 휴전을 맞았다. 그때 기관총알을 뽑아낸 다리가 半世紀가 지난 오늘에도 불편하다.
朴氏는 자신을 『일기예보 캐스터』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려고 하면 어김없이 수술한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 6.25 침략 전쟁의 살아있는 증인 朴氏는 『노무현 그자가 정신병자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모택동이 중공군을 파병하는 바람에 통일을 바라보던 한반도가 1.4 후퇴라는 두번째 핏빛 전쟁터가 되었는데… 그런데도 노무현이 그자가 중국에 가서 모택동이를 존경한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휴전 후 보병 9사단 27연대, 28연대 참모장을 지내다가 1960년 5.16 혁명에 가담, 한강을 건넜다. 그 후 예비역 대령으로 예편, 중앙정보학교 교관을 거쳐 노동청 고위간부로 발령, 수원 노동청 소장을 지낸 후 하나님의 종이 되려고 1977년8월 미국 미주리州 사우스웨스트 침례신학대학에 입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성직자의 길로 나섰다.
육사 8기생 가운데 목사가 된 사람은 朴 목사 한 사람, 교회 장로·권사·집사가 된 사람은 많이 있으나 목사가 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생존해 있는 8기 동창들은 朴 목사에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 자네가 제일 높은 사람이야…』하면서 부러워 한다.
시카고 지역에서 목회를 하다가 80년대 초에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州 페어펙스 지역으로 옮겨와 현재까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九死一生으로 지킨 조국의 현실은 그를 조용한 목회자의 길로만 가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 김대중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거물 간첩 김대중 처단하라』 피켓 들고 시위
2000년 6.15 평양 선언 후,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8억 달러를 갖다 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대한민국의 배신자 김대중이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의 정체를 알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거물 간첩 김대중을 처단 하라』 『김대중은 북한의 거물 스파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백악관 앞에서 2일 동안 시위를 했다.
김대중 左派 정권이 물러나면서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자 朴 목사의 시간은 더 바빠졌다. 『미군은 물러가라』라고 反美 촛불시위를 선동한 노무현이 당선, 두번째 左派 정권이 탄생한 후 朴 목사는 워싱턴 지역 군장교 출신 기독교 신자들을 모아 매주 「미국과 한국을 위한 구국 기도회」 예배를 드린다.
또 노무현 정권이 의식적으로 시민단체를 이용 反美 촛불시위를 부추기고 부시 대통령 사진과 성조기를 불사르는 행동은 박수를 보내고 김정일 사진과 북한 깃발을 불사르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에 분노하고 있다.
그는 또 「美州(미주) 한국 육사 8기생 동창회 동부지역」 회장직과 「한국군 출신 재향군인회 워싱턴 지역회」 「한·미 한국전쟁 참전 전우회」에 적극 참가, 노무현 左派 정권 타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7월6일 워싱턴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일행에게 4개의 달걀 세례를 안겨준 사람들도 워싱턴 지역에 사는 재향군인회 참전동지회 소속의 만만치 않은 反共인사들이다.
▶ 노무현 정권 한국 대령 연합회 탄압에 항의, 미국·캐나다에 한국군 예비역 장교들 단합
朴 목사는 최근에 더욱 바쁜 몸이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 육해공군 해병대 출신 예비역 영관급 장교[소령·중령·대령]들 숫자가 1,0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하고 있다.
朴 목사는 성직자의 직분을 제대로 지키면서 이들 조직을 뭉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가 영관급 예비역 장교들을 한데 뭉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노무현 정권이 한국에서 투쟁하는 「육해공군 해병대 예비역 대령 연합회」를 탄압하기 위해 親北 단체를 부추겨 徐貞甲(서정갑) 회장[예비역 육군대령. 국민협의회 운영위원장 겸임]을 「내란선동죄」 혐의로 고발하도록 부추기고 경찰이 徐 회장을 「내란선동죄」 혐의로 수사를 하는데 격분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親北 세력들이 조작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애국 反共鬪士를 간첩조사하는 비밀장소로 소환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 기본권과 인권을 탄압하는 행위로 가만히 두고 볼 수만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朴 목사는 조직이 끝나면 「자유 대한민국 지키기 해외 동포연합」을 창설하여 노무현 左派 정권의 정체, 徐 회장의 인권탄압, 대령연합회 탄압 사실을 미국 재향군인회, 의회 상·하의원들, 언론기관, 종교기관에 알리는 한편 국무성과 백악관 앞에서 「노무현 反美 정권의 정체」를 폭로할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 [緊急 情報] ★★★★★
또 미국 정부 기관이 입수한 「노무현을 불법 당선시키기 위한 전자개표기 조작사건」을 저지른 관계자들의 양심선언 비디오 테이프와 자료를 입수, 워싱턴과 서울에서 동시에 폭로할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 [緊急 情報] ★★★★★
朴 목사는 『노무현이 자신 주변과 정권에 숨어 있는 親 김정일 세력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親北 정책을 고집하면 노 정권은 비참하게 침몰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노무현 정권은 물론 한국의 左派들도 끝장』이라고 말했다.
[孫忠武. 국제 저널리스트. Inside the World News Service 발행인 겸 편집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