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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증언≫ 노무현 대통령 장인 (권오석)이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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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증언≫ 노무현 대통령 장인 (권오석)이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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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격증언





▶피해자 가족들은 증언하는 자리에 나오기까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노무현(盧武鉉)씨에게 불리한 얘기를 했다가

혹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래서 國營(국영) 연구기관의 임원인 卞면장의 외아들(52)은 물론, 자녀들이

공직에 있는 가족들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변(卞)면장의 사위 朴承用 교장은 『나는 停年(정년)이 1년 반쯤 남아 있어 괜찮다』

며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완장을 차고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가서

虐殺(학살)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였지만 「세상이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

고 겁을 내며 지난 50년 동안 살아 왔어요.

노무현(盧武鉉)씨가 양민을 학살한 장인의 묘를 참배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걸 보고는

도저히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변백섭(卞百燮 )면장의 한 딸≫



가족들은 『盧武鉉씨 쪽에서 「장님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고 하지만,

권오석(權五晳)씨는 누구를 죽일지 살릴지 결정한 사실상의 재판장이었다』며,

卞在源(변재원·72), 卞在雄(변재웅·63)씨부터 증언을 하도록 했다.

卞百燮 면장의 조카인 卞在源씨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에 있었던

창원군 치안대 본부에 卞면장과 함께 감금돼 있었고, 卞在雄씨는 대방마을에 피란해 있었다.



ㅡ피해자 가족들의 증언을 그대로 소개한다.ㅡ





◈학살된 卞면장의 조카 卞在源씨 증언



『권오석(權五晳)이 재판장이었다』



『죽을 x은 죽고 사는 x은 사는 거지』



6·25가 났을 때 나는 晉州(진주) 농림학교 5학년으로 열아홉 살이었다.

경남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에 살고 있던 나는 작은 아버지(卞百燮 면장)와 함께

8월2일 피란길에 나섰다. 음력으로 6월19일이다. 晉州까지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여서

馬山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대가족이었던 우리 一家(일가)의 대부분은 馬山으로 이미

피란한 상태였다.



작은 아버지와 내가 8월1일 피란을 하려고 창원군 진전면 支署(지서) 앞을 지나는데

경찰관들이 『面의 유지분이 피란을 가시면 面民(면민)들이 동요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와 우리 일행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8월2일 새벽 인민군 선발대가 진전면 지서를 점령했다.

우리는 그 무렵 피란길에 나서 경남 함안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나는 우리 외가가 있는 함안군에 머물렀고, 숙부님과 중부님과 함께 2∼3일 머물다가

고성군으로 갔다. 고성군에 간 지 며칠 후 진전면 치안대장과 변영석이라는 사람이

총을 메고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고성군 구만면에 있는 창고에 감금됐다.



감금된 사람이 처음에는 4~5명이었는데 점점 불어났다.

내가 갇힌 다음날 삼촌(卞百燮)이 잡혀 왔다. 삼촌은 조카가 17명이나 되는데,

내가 함께 끌려갔던 유일한 조카다.



다음날 우리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로 옮겨졌다.

대방마을의 許景九씨 「고방」(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에 갇혔다.

고방에는 다락방이 하나 있었는데, 다락방에는 나 같은 젊은이들이 생활했고,

아래에서는 나이 든 분들이 있었다. 고방에 갇힌 이는 열댓 명쯤 됐다.



이때가 8월9일 또는 10일쯤으로 짐작된다.

대방마을은 내 고향인 진전면 양촌리 바로 맞은 편으로,

양촌리에서 1km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창원군 인민위원회 본부, 치안대 본부가 있었다.

갇혀 있는 동안 金克五(김극오-창원군 임시 인민위원장)를 봤다.



이 사람의 집이 진전초등학교 입구에 있어서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큰아들이 敵治下(적치하)에서 창원군 치안대장을 했다. 치안대 완장을 차고,

권총을 차고 다녔다. 둘째아들도 대방마을에서 돌아다녔다.

집안 할아버지되는 분(변상팔)이 金克五를 붙잡고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金克五는 『죽을 x은 죽고, 사는 x은 사는 거지』라며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6·25 직후 아들이 보도연맹(좌익 전향자 단체) 사건으로 죽은..

「옥동댁」(朴玉伊·당시 63세)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군복을 입은 빨치산이 총을 거꾸로 메고 와서

『반동분자 x의 xx야』하며 다락방에 있는 나를 불렀다.

나는 고방 뒤편에 있는 방공호로 끌려갔다.



그는『너 이x, 학도호국대 감찰부에 있으면서 악질로 굴었지』하고 추궁했다.

그때는 모든 학생이 학도호국대원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학도호국대 대원증」(오늘날의 학생증)을 꺼내 보여 주면서,

『내가 감찰부원이라면 표시가 돼 있을 것 아니냐. 봐라』고 했다.



그는 나를 다시 고방으로 돌려 보냈다. 총을 멘 그가 나를 『반동분자』라고 하면서

방아쇠를 한 번 당기면 끝장나는 그런 때였다. 공포감이 왈칵 몰려왔다.



『그가 내 재판장이었다』



고방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먼저 조사를 받은

작은 아버지(卞百燮)는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너라도 살아 나가야 할 텐데』라는 얘기만 했다.

갇힌 지 1주일쯤 더 지나서 나를 불러냈다. 신문실은 고방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나를 신문한 사람은 한복을 입은 맹인이었다. 눈을 감은 맹인이 아니라,

눈은 그대로 뜨고 있는 「당달봉사」(경상도 사투리로, 눈을 뜬 장님이라는 뜻)였다.

그가 맹인이 아니었더라면 50년이 지난 지금,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그가 진전면 오서리에 사는 權五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權五晳씨는 나보다 아홉 살이 위다. 내가 고향에 쭉 살았으면 알았을 텐데,

晉州에 나가 공부를 하는 바람에 당시에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방 안에는 그와 나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재판이라는 것도 없이,

둘이 마주 앉아서 얘기한 것이 재판이고, 그가 내 재판장이었다.



맨 처음 『反託(반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은 기억이 있다.

나는 右翼(우익)인 학생연맹 소속으로 반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좌익 학생단체는 학생동맹이었다. 晉州는 좌익학생들의 활동이 성했다.

나는 특별한 이념이 있어서라기보다, 할아버지가 만석꾼인 집안 환경 때문에

右翼 학생단체에 별 생각없이 가담했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는 「학생연맹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져 치안대가 나를 끌고 왔구나」하고

불안해졌다. 나는 『反託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맹인인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에 협력을 하지 않고, 反動(반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상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문학소년이다』고 대답했다.



『문학소년이라면 책을 많이 봤을 것이 아니냐, 어떤 문학을 했느냐』고 하길래,

삼촌과 형님들이 일본에서 가져와서 읽은 30권짜리 세계문학 전집의 제목을 줄줄이 얘기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빅토르 위고, 투르게네프…. 있는 대로 들먹이자

그도 아는 척을 했다. 여러 가지 질문이 20분 이상 계속됐다.



마지막으로 決議書(결의서)를 불러 주는 대로 쓰라며, 16절지 한 장과 연필 하나를 줬다.

요지는 「金日成에게 충성을 다하겠다. 미온적인 것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인민공화국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또 쓸 게 있다며

「反動分子(반동분자)인 작은 아버지 卞萬燮(변만섭)과 작은형 卞在權(변재권)을

내 이름으로 고발한다」는 고발장을 쓰게 했다.

결의서를 쓰고, 指章(지장)을 찍고 나서 고방으로 돌아왔다.



* 총살된 작은 아버지...



權五晳에게 신문을 받은 다음날 나는 고방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許景九씨 집밖을 벗어날 수 없는 가택연금 상태였다.

나는 담배를 구해서 칼로 잘게 썰어 고방에 갇혀 있는 어른들께 드렸다.



연금된 며칠 뒤부터 나는 산 너머 봉암리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포대에 끌려가

취사 노무자로 일했다. 인민군이 먹을 밥과 국을 만들었다.

소 다리를 목도로 나르기도 하고, 부녀자들이 만든 떡과 주먹밥도 날랐다.



닷새쯤 일하는데 『인민군 포대가 鎭東面(진동면)으로 이동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인민군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과 영영 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있던 친구와 탈출했다.

탈출해서 나는 구만면에 피란해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정자나무 옆 술집에 부엌방이 하나 있었는데,

생솔 연기에 심하게 그을려서 부엌방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밤에는 그곳에서 지내고, 낮에는 건너편 산의 솔밭에서 숨어서 지냈다.



9월 초쯤 작은 아버지와 11명이 대방마을에서 학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좌익들은 총살시킨 사람들을 둘로 나눠 대충 흙으로 덮어 놓았다.

여자들이 경비병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유품으로 시신을 확인해 알아볼 수 있는

자리에 다시 대강 묻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물러나고 추석이 지난 며칠 후 1950년 10월 초

고향으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그후 1950년 12월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시신을 제대로 모셨다.





◈학살된 卞曾燮씨 아들 在雄씨의 증언





『손바닥을 만져보고 굳은 살이 없으면 부르주아라고 판정했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장님의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녔다.

딸인지 아들인지, 두 사람 옆에서 자박자박 잘 걸어다녔다』



6·25 때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진전면 양촌리에 살던 우리 가족은

경남 함안군으로 피란을 갔다.



공중으로 불이 날아다니자, 할아버지가 대방부락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란해,

치안대 본부가 있던 許景九(허경구)씨 집에서 우리는 묵었다.



許景九씨는 우리 卞씨와 촌수가 좀 먼 姻戚(인척)이다. 許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사람이었다.

처남 하나가 좌익을 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許씨의 집은 본채가 사랑채보다 약간 높고, 돌 담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최근에 대방마을에 들러봤는데 다 허물어지고 없었다. 전쟁 당시에는 2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11호만 있다고 한다.



우리는 許씨 집 본채에 머물렀고, 사랑채 고방에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아버지(卞曾燮)도 고방에 갇혀 있다가 학살당했다. 卞百燮 면장과는 8촌 간이다.

대방부락은 꽤 높은 산(적석산) 골짜기에 위치해 미군이 폭격을 하지 못했다.



미군의 l-19 정찰기가 매일 떴다. 아주 낮게 떠서 우리가 조종사의 얼굴을 볼 정도였다.

정찰기가 왔다 가면 「호주기」라고 불리던 쌕쌕이가 마을을 폭격했으나,

대방부락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고, 마을 입구만 불바다를 만들었다.

함포사격도 했는데 마을은 멀쩡했다.



그때 許景九씨 집 주변을 장님 한 사람이 오갔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 분이 장님의 손을 잡고 이곳으로 데려오고 데려 갔다.

두 사람은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딸인지 아들인지,

두 사람 옆에서 자박자박 잘 걸어 다녔다. 네 살쯤 된 아이 같았다.



그 장님 가족이 대방마을 어디에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방부락 안에서는 살았을 것이다.

權五晳씨가 살던 오서리에서 우리가 살던 양촌리까지 10리가 넘는다.

양촌리에서 대방마을까지 산길로 1km 이상이어서,

장님인 그가 그곳으로 출퇴근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장님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盧武鉉씨 가족은 「장님이 뭘 했겠느냐」며 그가 장님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우리는 權五晳씨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그가 학살을 준비하는

현장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장님인 그가 심사를 한다. 심사할 때 「손을 내놓으라」고 해서,

손바닥에 못이 박여 있으면 가벼운 쪽으로 분류하고, 없으면 엄하게 처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한 3일 있으면 인민재판하러 晉州에 간다』고 얘기를 했다.

우리는 아버지(卞曾燮)가 재판을 받고 돌아올 줄 알았다.

晉州에 간다고 속이고 밤에 끌고가 처형해 버린 것이다.



대방마을에는 당시 『며칠만 있으면 부산이 점령된다. 부산이 해방되면 남조선이 해방된다』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대방마을에 있으면서 「적기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웠다. 마을에서 인민군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치안대, 여자 치안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 다녔다.





◈卞면장의 조카 卞在熙(67)씨의 증언



『自生 공산주의자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날뛰었다』



나는 6·25 당시 마산상업중학 3학년이었다. 학살당한 卞百燮 면장의 조카다.

인민군은 추석 이틀 전 진전면에서 후퇴했다. 전선은 진북과 진전면 사이였다.

진영으로 피난 갔다가 11월쯤 고향으로 돌아오니

『장님인 權五晳이가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대방마을에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 『權五晳이 위에 아무도 없었다. 제일 높았다』고 얘기해서,

우리는 權五晳이 郡黨 인민위원장인 줄 알았다.



당시 인민군은 창원군 南西 쪽 끝의 진전면만 차지했다.

나머지 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창원군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본부가 궁벽한 대방마을에 숨어서 활동했다.

權五晳은 창원군에서 유일하게 적의 수중에 넘어간 진전면 출신이어서,

대단한 힘을 썼다고 한다.



창원군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제일 활발한 곳이 진전면이었기 때문이다.

창원군이 완전 敵治下였으면, 인민재판도 거창하게 열고 총살도 하고 했을 텐데,

진전면만 수중에 넣고 있었으므로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을 몰래 산 속으로 끌고가

살해해 버린 것이다. 당시 진전면에는 인민재판을 해도 봐 줄 사람도 얼마 없었다.

중부님이 처형당한 것은 우리 집안이 地主(지주)였기 때문이다.



1949년에 토지개혁을 했지만,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는 2000석 추수를 했다고 한다.

전쟁 전에도 빨치산들이 밤에 습격해 곡식을 털어가곤 했다.

제일 큰 아버지(卞仁燮)는 좌익과 빨치산이 죽창과 곡괭이 들고 쳐들어오는 게 겁이나

전쟁 전에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렇지만 해방 후 民選(민선) 면장을 지낸 중부님은 인자한 분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싸우면 『사람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늘 얘기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피란을 가도 『좌익 정부가 선다고 죄없는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며

끝까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처형대상으로 분류돼 현장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온 사람이 있었다.

9촌쯤 되는 우리 妻族(처족)이다.

그가 『숙부님(卞百燮)이 총소리가 나기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처형당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우리는 『처형장까지 갔다 온 사람이 어떻게 살아 올 수 있느냐』며 그를 不信(불신)했다.

그는 『전쟁에도 私(사)가 있다. 그래서 살아왔다』고 설명했지만,

우리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權五晳씨의 일족이다.



진전면에서는 전쟁 전에도 자생하는 좌익들이 北에서 파견돼 내려온 빨치산들과 손을 잡고

활동을 벌였다. 인민위원회나 치안대는 다 이곳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전쟁 나고 재빠르게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했다.



국군에 밀려서 도망가면서 학살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대로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북한 공산당과 인민군이 내려와서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군의 힘을 믿고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날뛴 것이다.





◈학살된 卞百燮 면장의 딸들의 증언



『우리 가족은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질까, 겁을 내며 살았다』



아버지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낸 어머니는 일곱 명의 딸과 생후 3개월인

핏덩어리 아들을 돌봐야 했다. 어머니는 당시 40세였다.



부자였던 어머니 친정에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우리 집안은 그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일곱 번째 딸인 여동생은 전쟁통에 굶고 병이 들어 죽었다.



막내 남동생도 비슷한 때에 병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직 핏덩이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쌀 몇 톨이라도 생기면

병든 딸을 굶기고 아들만 먹였다.



어머니가 어디서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딸이 죽어야 아들이 산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무심결에 한 그 얘기를 앓고 있던 세 살짜리 여동생이 들었다.

동생은 철없이 『엄마 그러면 내가 죽을게』라고 했다. 얼마 후 동생은 죽었다.

돈이 없어 우리 딸들은 국민학교를 겨우 나왔다.



5·16이 난 뒤에야 여섯째 딸만 원호자녀 혜택을 받아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다행이 외아들인 남동생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국립 연구소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

우리 가족은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져서 피해를 받을까, 겁을 내며 살았다.



면민들이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울 때..「흉악한 무리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글을 넣으려는 것을 우리 가족들이 빼달라고 했다.

그 글이 문제가 돼 나중에 또 피해를 입을까 겁이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