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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나누기...

1. 자유



우리에게 '자유'는 천부적 권리이다. 따라서 그 자유는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인간이건 동물이건 그 행복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결국 약육강식의 논리하에서는 무한히 주어질 때 그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잇지만, 공생의 관계하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또한 무질서로 대별되는 개념이 바로 무한의 자유이다.



여하간 우리는 요즘도 '자유'를 요구하고 또 존중해 주기를 바라지만, 과연 그 자유의 한게는 어디까지인지는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기준선을 제시해 놓지 못했다. 다만 우리 사는 인간들이 그 자유의 적정한계를 찾아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중이다.



경제에 있어서 자유는 곧 재산권 보호 또는 시장존중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그러나 과거의 우리 인간들의 경험으로는 무한한 자유는 곧 지배 피지ㅐ관계를 양산한다는 사실, 그리고 불평등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 반작용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주창되고 한때는 그 이념이 ㅅ상을 지배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오히려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한 나머지 , 다시 말해 정확한 자유와 억압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이제 그 반작용의 이상이 아니 자유와 통제의 중간의 이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어떤이는 통제를 어떤 이는 자유를 게속 주장하고들 있다.



이런 거창한 언급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전주에 설명했던 과도한 자유가 곧 특혜가 되었고, 과연 그 자유가 온전한 자유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교과서에는 자유와 방종은 구별되어야 하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고 씌어져 있고 또 그렇게 교육되어저 우리 모두의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 있다. 그런 상식을 다 알면서도 우리 인간들은 좀 더 많은 자유를 갈망한다. 역시 경제주체들도 마찬가지로 좀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해 정부를 압박하거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에도 그 자유를 과감하게 제공함에는 정부가 매우 인색하게 군다.



자유와 책임은 접시저울의 좌우측 접시와 같다. 한쪽에 좀 더 치우치면 한쪽은 가벼워지고 결국 균등한 그리고 측량된 배려하에서만 서로 균형을 이룰수 잇는 존재다. 권리가 있으면 그만치 의무가 뒤따르고, 의무의 실천 되에는 권리가 뒤따른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행위무능력자의 행위로 간주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좀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 하물며 동물들마져도 그런 자유릃 원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주어질 수 있는 한 최대한 주어져야 한다. 자유와 책임을 그레프의 x축과 y축에 놓았을 때, 결국 비례적 직선그레프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장되는 그리고 주어지는 자유가 결국은 나만의 자유로 향유되고 강자의 자유로 향유되고, 약자를 해치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쓰레기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그 한계선까지는 될수 잇는 한 가지 말야아 하고 그 길목을 차단해 주어야 한다. 이 사실도 우리 모두 아는 상식이다. 다시 말해서 공생 가능한 최대한의 자유만이 자유일 수 있고, 그 한계를 초월한 자유는 곧 쓰레기나 유해곰팡이일 뿐이다.



과거의 중상주의 경제체제하의 자유를 잃은 경제주체들이 요즘 또 다시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그런 자유를 요구한다. 시장원리를 따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경제주체들(또는 학자들)도, 결국 쓰레기가 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자유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뷰케넌과 그 아들(신자유주의자들) 역시도 과거보다 더 많은 경제적 자유를 요구하지만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이유가 바로 자유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그런 자유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져도 인간이기에 정확한 측량이 되지 않고 일정한 자유가 주어지면 어느 일방에게는 불만으로 자리하게 되고 만다. 그레서 우리들은 혼돈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하나 알 수 잇는 것은 역시 공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한에서 어떤 자유를 주어도 국민들은 수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장 보여지는 경제주체에게 주는 자유가 불만인 것은 그 한계를 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다.



건설업체들이 한동안 불경기로 몸살을 알았다 하여, 급작스레 각종 규제를 풀고, 분양가자율화라는 당근을 단져주고, 그러면서 그들을 먹고 살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결국 그 자유는 더 많은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급기야는 '분양원가공개'를 요구하면서 시세담합을 견제하고 국민의 주거권을 보장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이르렀다.



이런 요구의 이유는 매우 타당하며, 당장 2001년부터 급상승하기 시작한 집값이 지금은 작게는 반배에서 크게는 몇배에 이르게 까지 과도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이유가 분양가자율화조치, 투기, 임의적 건설경기부양, 중시에 대한 불신과 반작용, 미래의 불확실의 존재 등의 이유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그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장원리가 매우 중요하고 또 경제발전의 가장 근본적 이상임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적정한 자유가 되지 못할 때 결국 그 자유는 강자의 약자를 주무르는 수단인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각종의 법으로 일정한 재사권의 제한을 가하고, 또한 거래의 제한을 가하고 또한 소비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고 등 하는 것인데, 시장원리를 존중하기 위한 그리고 약자를 해치지 않기 위한 그런 배려하의 충분한 자유의 부여라면 누구나 납득하고 박수칠 일이었겟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 자유가 곧 더 많은 다수국민을 해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쓰레기'에 다름 이닌 것이다. 썪은 곰팡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자들도 용납 못할 그런 결과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유'는 소중한 것이며 어느 분야에나 최대한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재산권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헌법제23조). 그러나 결국 그것이 공생관계를 해치는 선을 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 그 선을 넘는 자유는 쓰레기로 아니 인류 공동의 주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2. 희망나누기

잠깐 언급하자면, 희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무한히 권장되어야 한다.



과거에 상술로 또는 서로 돈을 주고받으며 승부를 조작하거나 또는 강자가 일부러 져주는 일이 늘상 발생해서 우리는 그것을 매우 분노하며 배격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승부조작은 있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금전 같은 재물이 오고가는 속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면 제한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순수하게 '희망을 나누자'는 취지하에서, 또는 국가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인류평화를 꾀하기 위해서 강자들이 일부러 져주는 일은 제한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보며, 그 져주는 강자의 배려를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배려 즉 혜택을 받은 약소국이나 스포츠약소국들이 이를 바탕으로 이후 스포츠 강국이 되고 평화의 사자로 활동하거나 활약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가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눠가지는 희망이야말로 그 가치는 이 세상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만 모르고 넘어가거나 또는 모른척 하는 것도 또한 미덕이요, 여유가 아닐지!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도 그 수혜자가 된적은 없는지 한번 연상해 보자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당신의 희망을 이웃에게 조금씩 나눠주자고 권하고 싶다.



만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