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결혼은 누군가의 서재와 또 누군가의
서재간의 결합이라고.
'서재'라는 표현은 과분하지만,
평소 잡문난독하는 습성을 지닌 여자와
전공책이라면 보물단지처럼 생각하는
한 남자의 책들을 칠 냄새 가시지
않은 책장에 빼곡히 정리하는 일로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내내 난 책 버리는
일을 했다. 몇번의 이사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책들이 매일 끊임없이
우리 집을 떠나갔다.
책을 정리하면서 지난 10여년간
기쁨과 즐거움, 때론 고독과 향수를
안겨준 기억들도 함께 떠나보냈다.
특히, 대학시절 빨간 밑줄에 주석까지
달면서 정독했던 몇몇 이념서들은
묵은 책냄새와 함께 비록 칙칙했지만,
순수했던 그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몇번씩 버릴 건지 말 건지 주저하면
서도 이번엔 확실하게 필요한 책만을
선택하리라는 결심만은 변함없었다.
한때 날 들뜨게 하던 지적 허영의
상징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일은,
아직도 내 어깨를 짓누르는 허위의식을
털어내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이젠 조금씩 책이 아닌, 활자가 아닌
것들에게 정을 주리라 생각했다.
책이란 매개체에 기대지 않고,
살아있는 것, 날 것 그대로 순수한
것들을 향해가리라 다짐했다.
그러고나니, 책장 하나가 덩그라니
비어버렸다. 개운한 새 출발을 의미
하는 빈 공간이 참 편하다.
그 빈 공간만큼 내 머리와 가슴도
함께 비워져가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