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의 대응과 방책
수신 : 노무현 대통령
참조 : 청와대 비서실장
발신 : 한국정신문화 선양회
제목 : “ 중국 동북공정의 대응과 방책.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인 말이다. 동북공정의 연구 과제는 고대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中朝)관계사 연구,등이다. 동북공정이 발족된 후 중국의 동북방에 위치했던 고구려사의 인식에 따르면 고구려 정권은 '전한(前漢) 시대의 현도군, 고구려현이었으며, 고구려 민족의 원류 역시 西漢(서한)시대의 동북변강지구에서 활동한 중국 변강민족임을 강변하고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한사군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계속 중국 역대왕조와 신속(臣屬)관계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 동북공정이다. 즉 “ 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연구공정 " 이라는 이름과 연구 과제의 제목에서 중국 정부의 음모가 명확히 드러나 있듯이 현재 중국 영토를 근간으로 고대와 중세에 동북방의 주변제국을 從屬國(종속국)으로 전제하여 중국을 宗主國(종주국)으로 개편하여, 고대 동북방에 위치했던 우리나라의 고조선과 특히 고구려와 발해(대진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켜 ” 중국의 국사를 새로 개편 시키는 작업“을 중국 정부가 국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작업이다.
한겨레여...!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한민족의 歷史(역사), 또한 國史(국사)라 함은 오늘날의 한반도에 정착되기까지 한민족이 걸어온 과정의 발자취를 기록한 역사이다. 나라의 국경은 국력에 따라 흥망성쇠를 그듭하며 수시로 변화하므로 일시적 경계선일 뿐이다. 무려 9,000여년의 유구한 한국사의 내력 중에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하고 세계의 인류를 구제한 聖君(성군)의 역사와 국력의 성쇠에 따라 국토가 점점 줄어드는 통한의 역사가 있으므로 국경 역시 하나 둘이 아니고 국력에 따라 무수히 이동해 왔다. 오늘날 한반도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영토일 뿐이며 고대 우리나라의 환국, 배달국, 삼한 등 한국사 전체의 역사가 아니고 한민족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 삼한의 진한 14세 고불(古弗)임금 재위 56년 을해(BC 1666년)에 관원을 사방에 보내어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계산해 보니 삼한 조선의 인구는 모두 1억 8천만 명이었다. 그런데 3600여년이 흐른 후 1945년 8.15 해방 당시의 조선의 인구수는 약 2천만 명이었다. 현 중국 영토의 2/3는 삼한과 삼국시대의 영토이었음을 증서하고 있다. 또한 중국 인구의 80%는 조선 삼한과 삼국의 인구가 중국인으로 동화된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현재 중국 대륙의 동북지역은 본래 고조선 삼한(진한, 변한, 마한)과, 동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의 강역이며, 그 후 신라와 발해의 2국 남북시대의 강역이며, 후삼국을 통일한 대제국 고려국의 영토로서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이었다. 특히 현재 중국 북쪽의 요녕(遼寧),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의 3省(성)은 일제식민지 시대까지 13도에 속하는 우리 대한제국의 영토이었다. 현재 중국 영토의 2/3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 초기 삼한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의 영토이며, 삼한을 계승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가락국의 강역이었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과 가락국은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중국대륙에서 건국되었던 것이다. 7천만 한겨레여...! 아래의 본문을 읽고 각성하라...!
3황 5제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고 한국의 역사이다.
禮記(예기)의 三皇(3황) 五帝(5제)는 복희(여호와)-신농-황제헌원 ”을 삼황이라 하고 “-소호금천-전욱-고신-당요제-우순 ”을 5제라 한다. “복희와 여호와” 대를 상고시대,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의 대를 중고시대로 잡고 있다.
<구약성경>에 여와(여왜)을 “ 여호와 ” 라고 번역되어 있다. 서양 학자 존 브라이트(john bright)씨는 여왜를 <yahweh:야훼>로 기록하였다. “ 여호와 ”의 역사적 행적은 성경뿐 아니라 슈메르의 토판과 중국 신화시대의 왕조 삼황오제를 비릇 환단고기의 삼황본기의 기록은 女媧(여왜:여와) 女希(여희)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음상 모두 꼭 같은 이름이다. 천주교(기독교) 등의 종교계에서 “ 하나님 아버지 ” 로 숭상하고 있는 “ 여호와 ”는 곧 태호복희씨의 부인이며 여동생의 이름이 <여와:야훼:여호와>이다.
태고의 환인과 환웅이 물러나고 드디어 천하는 복희와 여호와 삼신상제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환국의 九夷(9이) 중에서 처음 동쪽 震方(진방)의 陳國(진국)을 개국한 風夷(풍이,남이)족이 곧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종족이며 九夷(9이)의 일종이다. 그의 아들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藍夷(남이:셈족:묘족)족에 속하며 세계에서 제일 최대의 흥성 강국이 되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
고대의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홍인종, 남색의 5색 종족이 아홉 지역에 나누어 살던 종족을 九夷(9이)국 혹은 桓國(환국)이라 한다. 환국의 시조 환인(BC 7197년)시대부터, 배달국의 태조 환웅 거발환과 태우의 환웅(태호복희)-다의발 환웅(여호와 삼신 하느님)-,염제신농(여호와의 장남)-,치우(신농 후손)-,황제헌원(여호와 하느님의 차남)-,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시대와 단군왕검(황제헌원의 외손자)시대까지 4,865년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고 九夷(9이) 종족의 역사이며, 곧 우리나라의 고대 환국과 조선 삼한의 역사인 것이다. 즉 우리대한 민족은 고대이래로 三神(삼신) 할머니를 숭배하고 가정의 행복과 자식을 점지해 주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아버지 태호복희와 인류의 어머니 여호와 삼신할머니는 중국의 조상이 아니고 우리나라 조상이라는 사실 하나만 깨닫게 되면 중국이 우리나라의 조상을 자국의 조상으로 둔갑시킨 역사적 진실을 곧 바로 깨닫게 될 입니다.
한겨레여...!
여호와 삼신 하느님이 우리나라 조상이다.
태호복희씨의 姓(성)은 風(풍)씨이고 이름은 方牙(방아)이며, 혹은 蒼牙(창아)이고 이를 蒼精(창정)이라 하고 호를 春皇(춘황)이라 한다. 또한 복희씨의 號(호)는 皇雄(황웅)이고 어머니는 華胥氏(화서씨)이다. 복희씨의 여동생 女媧(여호와) 역시 風(풍)씨이다. 복희와 여호와의 자손들은 風山(풍산)에서 나누어 살았기 때문에 성을 風(풍)씨로 하였다. 風(풍)은 혹 馮(풍)이라 한다. 역시 후세에 馮夷(풍이:하백) 족성이 나누어져 佩(패), 觀(관), 任(임), 己(기), 庖(포), 理(리), 姒(사), 彭(팽)씨의 여덟 가지 성씨로 나누어 졌다. 옛날에 복희와 여호와씨족이 지금의 산서성 濟水(제수)에 세웠던 나라 任(임), 宿(숙), 須(수), 句(구), 須臾(수유)족 등의 나라들이 있었다.
“복희와 여호와“의 맏아들이 바로 太陽神(태양신) 炎帝神農(염제신농)이다. 염제는 炎居(염거)를 낳고 염거는 節竝(절병)을 낳고 절병은 戲器(희기)를 낳고 희기는 祝融(축융)을 낳고 축융은 共工(공공)을 낳고 공공은 術器(술기)를 낳고 술기는 后土(후토)를 낳고 후토는 열명을 낳고 噎鳴(열명)은 서극에 살면서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관하는 시간의 신이다. 복희와 여호와 삼신상제(하느님)의 맏아들 염제는 列山(열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열산씨, 여산씨, 또는 連山(연산)씨라 하였다. 염제신농이 멸망한 뒤에 州(주), 甫(보), 甘(감), 許(허),戱(희), 露(노), 齊(제), 紀(기), 怡(이), 向(향), 呂(여) 등의 나라는 모두 다 姜(강)씨 성의 후손들이다, 蚩尤(치우) 또한 강씨이므로 염제신농의 후손이 된다.
복희씨와 여호와 삼신상제의 맏아들 염제신농(BC 3218-3078)은 원년 계미(BC 3218년)에 火德王(화덕왕)으로 陳(진)에 도읍 하였다. 지금의 開府(개부:태원)이고 陳州(진주)이다. 염제신농은 복희가 도읍한 陳(진)에서 曲阜(곡부)로 도읍지를 옮기고 140년 동안 재위하고 죽었다. 震國(진국)은 제 1세 복희와 여호와 삼신상제께서 개국하고부터 제 2세 맏아들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제 3세 帝臨魁(제임괴), 제 4세 帝承(제승), 제 5세 帝明(제명), 제 6세 帝宜(제의), 제 7세 帝來(제래), 제 8세 帝衰(제쇠) 炎帝楡罔(염제유망(BC 2968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530년이고 염제유망이 멸망한 후에 황제헌원씨가 일어났던 것이다.
염제유망의 정치가 쇠약해 지자 청구국의 치우천왕은 81명의 형제를 거느리고 葛盧山(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창과 투구와 갑옷 등을 처음으로 쇠로 병기를 만들어 전쟁이 시작되자 1년 동안에 모두 9제후의 땅을 함락시켰다. 다시 병기를 정비하여 空桑(공상)을 점령하여 12나라를 합병하고 제후로 삼아 공상에서 위세를 떨치자 황제헌원의 군사와 전투가 벌어졌다.
司馬貞(사마정)이 쓴 사마천 사기의 3황 본기의 부록에서 태호복희의 성은 風(풍)씨이고 수인씨의 뒤를 이어 천황에 올라 111년을 재임하고 다음 복희의 여동생 여호와 상제가 木德王(목덕왕)으로 제위에 올랐다. “복희와 여호와“가 동방의 震國(진국)을 맏아들 염제신농이 계승하고 마지막 염제유망이 멸망한 임술년 다음해 계해(BC 2962년)에 黃帝有熊氏(황제유웅씨(BC 2692-2592)는 土德王(토덕왕)으로 제위에 올라 涿鹿(탁록)에 도읍지로 정하고 熊國(웅국)을 건국하여 100년을 재임하고 나이 111살에 죽었는데 橋山(교산)에 장례 하였다.
복희와 여호와 삼신상제(하느님)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의 부인 黃娥(황아)는 窮桑(궁상:산동성 곡부)에서 少昊金天(소호금천)씨를 낳았다. 황제헌원의 아들 소호금천씨가 신라의 조상된다.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BC 2598-2514)씨는 계묘년에 배달국 왕위에 올라 83년 간 통치하고 100살에 죽었다. 雲陽(운양)에 장례하였다. 소호의 아들 顓頊(전욱 :BC 2513-2436)은 정묘년에 왕위에 올라 78년 간 재임하고 91살에 죽어 澲陽(업양)에 장례 하였다. 황제의 맏아들 현효의 손자가 帝嚳高辛(제곡고신:BC 2435-2365)이고 고신왕이 바로 제곡이다. 그의 이름을 준(峻) 또는 高辛(고신)이라 하고 사람들은 고신왕이라 불렀다. 고신왕은 을유년에 왕위에 올라 70년을 통치하고 105살에 죽었다. 頓丘(돈구)에 장례 하였다.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소호금천씨의 아들 제곡고신왕은 4사람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은 有邰氏(유태씨)의 딸로서 이름은 姜源(강원)이다. 강원은 后稷(후직)을 낳고 후직이 곧 周(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둘째 부인 簡狄(간적)은 商(상)나라의 시조 契(설)을 낳았다. 卨(薛:설)은 殷(은)나라 시조가 되었다. 셋째 부인은 陳鋒(진봉)씨의 딸이며 이름은 慶都(경도)이다. 이 경도 부인이 낳은 아들이 防勳(勛:방훈)이며 혹은 伊祁氏(이기씨)라고 한다. 陶唐氏(도당씨)는 한 부락의 추장이다. 이로 인해 唐堯(당요)라고 불렀으며 고신왕의 막내아들이며 九夷族(구이족)의 자손이다. 넷째 부인은 娵訾(추자)씨의 딸로서 아들 常儀(상의) 摯(지)가 왕위에 올라 9년을 재임하고 백성들로부터 쫓겨나고 경도 부인이 낳은 唐堯帝(당요제:BC2357-2258)임금이 갑진(2358년)에 왕위에 올라 BC 2258년까지 100년 동안 재임하고 갑진년 그의 나이 118세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虞舜(우순:BC 2255-2208)임금이 병신년(BC 2285)부터 28년 동안 요임금의 나라를 섭정하고 병술년(BC 2255)부터 계유년(BC 2208)까지 50년 동안 재위하고 110살에 죽었다. 舜(순) 임금은 高叟(고수)의 아들이며 고수는 高矢禮(고시례)의 친형이다. 고시례는 환국의 제 1세 거발한 환웅천왕의 신하로서 主穀(주곡)을 담당하는 農士(농사)이다.
한겨레여...! 삼한시대의 진한과 삼국시대의 신라는 임금이 친히 祭天壇(제천단:참성단)에서 “ 여호와 삼신하느님 ”에게 제사 올리는 祭司長(제사장)의 나라이며, 宗主國(종주국)이다. 여호와 하느님은 인류의 어머니로서 우리나라 조상이며 대한 민족은 진실로 천손이다.
단군왕검은 황제헌원의 외손자이다.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배달국 제 18대 환웅 거불단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熊氏)국 왕 황제헌원의 딸이다. 신묘(BC 2370년)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왕검의 나이 14세 되던 갑진(BC 2357년)에 웅씨국 왕(황제헌원)이 비왕(裨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정사를 24년간 대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즉 단군왕검은 황제헌원의 외손자이며 여호와 삼신상제(하느님)는 외증조 할머니가 된다.
단군 재위 67년 갑술(BC 2267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다. 이때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 임금은 대홍수가 일어나 山岳(산악)의 4면을 강물이 에워싸고 하늘에 닿을 듯 하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신하 중에서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의 근심을 덮어줄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를 맡기겠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治水(치수)에 능한 사람은 오직 崇伯(숭백) 鯤(곤)이 있을 뿐입니다. 곤이 9년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길은 잡히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요임금에게 이르기를 [조선국]에 부인도 없이 홀아비로 살고 있는 환부(신부)가 있는데 이름이 虞舜(우순)이라 합니다. 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요, 신하들이 말하기를 “장님의 자식으로 아비는 완악하고 어미는 간악하며 그의 아우 象(상)은 교만함에도 부모에게 효도하여 가정은 화목하게 잘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요임금이 말하기를 내 그에게 내 두 딸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해 본 후에 나라를 맡기겠소 하고 두 딸을 嬀汭(규예)로 내려 보내 우씨에게 시집가게 하고 공경하라고 일러 주었다. 요 나라를 섭정을 맡게 된 虞舜(우순)은 축융을 시켜 곤을 우산에서 주살하고 곤의 아들 우에게 치수 사업을 맡게 하였다. 요 나라를 섭정을 맡은 舜(순)임금은 세계 만국회의를 塗山(도산)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단군은 “도산국제회의”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虞舜(우순)의 司徒(사도) 禹(우)와 만나게 하시었다.
단군의 명을 받은 태자 부루는 塗山(도산)으로 가던 중에 琅耶城(낭야성)에서 반달 동안 머물면서 백성들의 형편을 듣고 물었다. 이때 순임금도 四岳(4악:벼슬명)을 거느리고 와서 치수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태자 부루에게 보고하였다. 태자는 순에게 낭야성에 扃堂(경당)을 세워 젊은 학도들에게 교육을 시키게 하고 아울러 泰山(태산:산동성 태안현)에서 여호와 삼신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부터 淮泗(회사:산동성 사수현에서 강소성 회하일대)에서 여호와 삼신할머니(하느님)을 받들며 제사지내는 일이 크게 성행하였다.
중국사에서 태평시대로 유명한 요임금은 여호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의 5대손이다. 요,순임금을 중국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으나 요순임금이 어찌 중국의 조상이 될 수 있겠는가? 요순임금은 우리나라 삼한시대의 제후이다. 또한 요순임금 시대를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태평시대로 알고 있으나 성경에 기록된 “태호복희(노아)의 홍수시대” 이며 잦은 전란과 괴물들이 출현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高叟(고수)의 아들 순임금이 요나라를 섭정을 맡았다. 대홍수로 인한 인류의 재앙을 만나 “ 도산국제회의 ”에서 단군의 아들 부루 태자로부터 天符王印(천부왕인), 神針(신침), 皇鉅宗(황구종)의 삼보물을 虞舜(우순)의 司祭(사제) 禹(우)에게 주어 홍수를 다스리게 하고 虞舜(우순)이 唐堯朝(당요조)를 섭정을 맡아 다스리므로서 비로소 堯舜(요순)시대는 태평시대를 이루어 졌던 것이다. 따라서 요순태평시대가 아니라 “단군왕검의 태평시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혁거세와 고주몽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손자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형제간이며, 아버지는 해모수이고 어머니는 여호와 삼신할머니(하느님)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유화)이다. 해모수의 아들 혁거세는 신라의 시조가 아니고 처음 북부여 제 7대 왕위에 올랐다. 한편 고주몽은 진시왕정에게 빼앗겼던 삼한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연호를 다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赫居世(혁거세) 居西干(거서간)이다. 시조의 姓(성)은 박씨며 諱(휘)는 혁거세이다. 前漢孝宣帝五鳳元年(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居西干(거서간)이라 하고 국호를 徐那伐(서나벌)이라 하였다. 선대에 조선의 遺民(유민)들이 山谷(산곡)에 나누어 살던 곳으로 六村(6촌)이 있었다. 첫째 閼川(알천) 楊山村(양산촌), 둘째 突山(돌산) 高墟村(고허촌), 셋째 嘴山(취산:선도산) 珍支村(진지촌)(혹은 于珍村(우진촌), 넷째 茂山(무산) 大樹村(대수촌), 다섯째 金山(금산) 加利村(가리촌), 여섯째, 明活山(명활산) 高耶村(고야촌)이 있었다. 이것을 辰韓(진한)의 六部(육부)라 한다.
突山(돌산)의 高墟村長(고허촌장) 蘇伐公(소벌공)이 楊山(양산:양주)의 기슭을 바라보니 蘿井(나정)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으므로 곧 찾아가 보았더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기에 깨트려 보았더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 곧 蘇伐公(소벌공)이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0여세가 되자 영리하고 夙成(숙성)하여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남과 달리 神異(신이)하여 임금으로 推戴(추대)하여 존경하였다. 辰(진)나라 사람들은 큰 알을 瓠(박)이라 함으로 처음에 둥근 박과 같다 하여 박씨성이 되었다. 居西干(거서간)은 辰(진)나라 말로 왕이란 뜻이다 (혹은 貴人(귀인)을 칭한다) 註: 突山高墟村(돌산 고허촌)의 楊山(양산)이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에 있어야 신라의 도읍지가 된다.(중략)
20년(BC:37년)에 京城(경성)을 쌓아 金城(금성)이라 하였다. 이해에 고구려의 시조 東明(동명)이 즉위하였다. 26년 봄 정월에 金城(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註 :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註(주)에서 金城(금성)은 輿地勝覽(여지승람) 慶州古跡條(경주고적조)에서 在府東西里(재부동서리).....土築(토축)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30년 여름 4월 己亥(기해) 그믐에 日食(일식)날 樂浪(낙랑)의 사람들이 장병을 거느리고 침범해 왔으나 변두리 사람들도 야간에 대문도 없이 들판에 곡식을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은 서로 도적질도 할줄 모르고 있으니 道(도)가 있는 나라 라고 할만하구나, 우리가 몰래 잠입하여 군사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과 다를 것이 없으니 부끄러운 짓이 아니냐 하고는 이내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註 :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樂浪(낙랑)의 사람들이 침범해 왔다하니 < ? >라고 표를하고 낙랑은 처음에는 지금의 平南地方(평남지방)에 불과하였으나 후에는 지금의 黃海道(황해도)까지 포함. 라고 하였다. 즉 한밤중에 평안남도에서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의 金城(금성)을 침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병도는 < ? >라고 했다. 한겨레여...! 경북 월성군 경주는 신라의 천년 도읍지가 아니다.
[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斯盧(사로)의 시조 혁거세 왕은 仙桃山聖母(선도산성모:사소 유화부인)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부여)의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嫩水(눈수: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러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 했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으로 받들어 존경하고 도읍을 徐羅伐(서라벌)에 정하여 국호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역시 斯盧(사로)라 하였다.
[삼국유사,북부여] 古記(고기)에 이르기를 前漢(전한) 宣帝(선제) 神爵(신작) 3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천제(해모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오룡차를 타고 訖升骨城(홀승골성:大遼(대요)의 醫州(의주)에 있음)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 북부여 “ 라 칭하고 자칭 이름을 解慕漱(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夫婁(부루)라 하고 解氏(해씨)라 하였다. 해부루왕은 그 후 上帝(상제)의 명을 받아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동부여라 하였다. 동명성제(고주몽:추모왕)는 북 부여에 이어 卒本州(졸본주)에 들어가 도읍을 졸본에 정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夫餘(부여)라 하였다. 즉 고구려의 시조 편을 읽어 보라.본문 끝.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차능)를 개국하게 된다. 즉 북부여 황제는 “ 해모수 ”이며 부여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 성모이며 이름은 娑蘇(사소)이며 또한 유화입니다. 즉 고주몽과 혁거세(해부루:불구내왕)의 아버지는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 東神聖母(동신성모) 사소(유화)이다.
또한 해부루는 혁거세와 같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해모수와 동신 성모 사소의 아들은 해부루, 혁거세, 동명성왕(고주몽)의 3형제가 된다.
박혁거세와 고주몽은 형제이며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제5권 感通 第 7 (감통 제 7 ) 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 수희불사)
仙桃山聖母(선도산 성모:동신성모(하백의 딸 사소, 유화)는 佛殿(불전: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새로 수리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안흥사 주지 지혜에게 도움을 주시었다.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이름이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행실이 많이 어질었다. 安興寺(안흥사) 住持(주지)로 있으면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새로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자금력이 모자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 꿈에 몸매가 호리 호리하고 간드러지게 예쁜 선녀가 쪽빗 머리에 푸른빛의 비취 구슬로 장식하고 내려와서 위로하며 약속하시기를 나는 선도산의 神母(동신 성모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은 사소, 유화) 이니라, 너희가 佛殿(불전:석가모니(혁거세)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을 수리하기를 소원하고 있으니 내가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협조하고자 하노라, 내가 앉은 좌대 밑에서 금을 취하여 主尊佛(주존불)을 三像(삼상)으로 모시고 점등하여 장식하고 벽 위에 53 부처님과 六類聖衆(육류성중)과 모든 天神(천신)과 五岳(오악)의 神君(신군)의 그림을 그려서 벽 위에 붙이고 매년 봄과 가을 두 계절 10일 날은 선남 선녀 들을 광장에 모아서 일체의 모든 含靈(함령)들을 위하여 占察法會(점찰법회)를 개최하는 일을 규정으로 삼아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지혜는 놀라운 생각에 승도를 거느리고 神祠(신사: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은 하백의 딸 동신 성모 사소를 모신 곳)로 가서 좌대 밑의 굴에서 황금 160량을 얻었다. 지혜는 지극 정성으로 공을 다하여 神母(신모: 동신 성모)가 일러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불상을 갖추고 모셨다. 그 事跡(사적)은 아직 남아 있지만 법회의 일은 폐지되었다.
[신라의 五岳(오악)은 동쪽의 吐含山(토함산), 남쪽의 智異山(지이산)과 서쪽에 鷄龍山(계룡산)과 북쪽의 太伯山(태백산)과 중앙의 父岳(부악)은 역시 八公山(팔공산) 이다) (본조:고려)때에도 황제(태조 왕건)의 꿈에 屈弗池(굴불지)에 용이 나타나 청원하며 부탁하기를 靈鷲山(영취산:선도산)에 藥師道場(약사도장)을 만들어 늘 법회를 개최하고 平海途(평해도)에도 역시 같이 하라, 라고 말씀하였다.]
[神母本 中國帝室之女,名娑蘇] : 神母(신모)는 본래 “ 중국(부여 황제 해모수의 궁전에 계셨던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娑蘇(사소)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깨우쳐 海東(해동: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父皇(부황:부여 황제 해모수)이 소리개 발에 편지를 매달아 그에게 말하기를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도록 하라. 娑蘇(사소: 하백의 딸 유화)는 편지를 읽어보고 솔개를 자유로이 날라 가도록 놓아주었다. 이 산에 솔개가 날아와서 멈춘 곳이므로 鷲山(취산)이라 하고 드디어 집을 짓고 地仙(지선)이 되었다.
솔개가 서쪽에서 날아왔으므로 이름을 西鳶山(서연산) 이라 하였다. 神母(동신성모:하백의 딸, 사소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늘 玆山(자산:선도산)에서 오래 살면서 신라국을 鎭護(진호)하시어 신라국은 신령스러운 일이 매우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개국이래로 항상 三神(삼신:여호와 할머니)을 一神(일신)으로 받들어 望祭(망제)를 지내고 군중들은 기원하였다. [하백의 딸 사소는 여호와 삼신 할매의 딸이다.]
신라국 제 54대 경명왕(서기 917-923년)은 매를 좋아하였는데 이 서연산(선도산)에 올라 매를 놓아 잃어 버렸다. 神母(신모:동신 성모 사소 유화)에게 기도하기를 만약에 매를 얻는 다면 당연히 爵位(작위)에 봉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갑자기 매(독수리)가 책상 위에 날라 와 멈췄다. 이로 인하여 聖母(성모:동신 성모 여호와의 딸)를 <신라국> 대왕에 봉하였다. 그 聖母(성모:사소 유화 하백의 딸)가 시초로 辰韓(진한:신라)에 도착하여 聖子(성자:고주몽,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대개 혁거세왕과 閼英(알영) 두 분을 聖人(성인)이라 한다. 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처음 출생하면서 입술이 닭 부리 같았기 때문에 鷄龍(계룡), 鷄林(계림), 白馬(백마)등으로 칭하였다. 닭 鷄(계)자는 十二支(12지)로 酉(유)며 서쪽에 속하기 때문에 西述聖母(서술성모)라 하였다. 聖母(성모:여호와의 딸 사소)는 하늘의 모든 仙女(선여)들에게 비단을 짜서 붉게 염색된 비단 직물을 가지고 와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신비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비로소 神驗(신험)을 알게 되었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政和年(정화년)에 사신으로 宋(송)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佑神館(우신관)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女仙像(여선상:여호와의 딸)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館伴學士(관반학사) 王輔(왕보)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神(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中國帝室之女(중국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辰韓(진한: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地仙(지선)이 되어 仙桃山(선도산)에 늘 계시며 이분이 그 像(상)입니다. 또 大宋國(대송국)의 사신 王襄(왕양)이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祭文(제문)에서 “ 東神聖母女有娠賢肇邦之(동신성모여유신조방지) ”라는 구절이 있었다. 즉 동신성모(여호와)의 딸 (사소,유화부인)이 임신하여 낳은 聖賢(성현:혁거세,고주몽=추모왕= 동명성왕)이 나라를 개국하였다. 는 구절이 있었다. <안흥사 주지 지혜>는 선도산 성모(여호와의 딸)님께서 시주한 금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佛殿(불전)을 수리하고 부처를 받들어 모시고 중생을 위하여 향불을 피우고 법회를 열어 津梁(진량)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여호와 성모님(서왕모)은 아득히 먼 옛날의 성인으로 인식하고 종교인들은 오래 사는 술법만 배우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讚曰(일연 국존이 찬송하시기를)
來宅西鳶幾十霜, 招乎帝子織衣裳,長生未必無生異,故謁金仙作玉皇,
북부여의 황제 해모수의 궁실에 계셨던 동신 성모 사소는 해동(신라)에 와서 서연산에 집을 짓고 몇 십 년을 살았다. 동신 성모 사소(여호와의 딸)는 황제헌원의 자손(신라 사람)들을 초청하시어 하늘의 선녀들이 베를 짜고 붉게 염색된 비단 옷을 주시었다.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하늘나라의 옥황상제(여호와)의 명을 받은 천사가 신라의 진평대왕을 배알하고 옥으로 만든 天賜玉帶(천사옥대)를 주시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이 玉帶(옥대)는 [여호와 삼신 상제님]이 내려 주시는 보물이니 잘 간직하여 대대로 잘 전하도록 하시오, 신라국의 진평왕은 친히 꿇어앉아 길이가 十圍(10위)이고, 62개의 옥으로 새겨서 장식하여 만든 요대(허리띠)를 천사로부터 받았다. 긑. 일연/씀 /한얼원/번역
상기 본문 고찰
[ 1 ], [삼국사기]는 큰 알에서 나온 아이를 突山(돌산)의 高墟村長(고허촌장) 蘇伐公(소벌공)이 양육하고, [환단고기]는 부여황실의 여인 사소가 낳은 아들을 奈乙村(내을촌)의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양육하였다. 곧 突山(돌산)의 高墟村(고허촌)과 奈乙村(내을촌)은 같은 지명이다. 突山高墟村(돌산고허촌)의 촌장은 蘇伐都利(소벌도리)이며 처음에 兄山(형산:서형산 :중국의 산서성)에 내려 왔다. 이곳을 沙梁部(사량부)라 하였다.
[ 2 ]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에서 宋國(송국)의 王輔(왕보)가 말한 中國帝室之女(중국제실지녀)의 구절은 辰韓(진한)에서 聖子(성자)를 출생하여 東國(동국)의 시조가 되었다. 의 구절은 신라의 시조 “ 혁거세 “를 낳은 聖母(성모)가 된다. 또한 옛날 부여의 황제 궁실에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嫩水(눈수)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南下(남하)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하였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소벌공)가 그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 서 길렀다. 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된다. 즉 고주몽과 혁거세는 다 꼭 같이 蘇伐都利(소벌도리 :蘇伐公(소벌공)가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다.
[ 3 ] 仙桃山聖母(선도산 성모)는 東神聖母(동신성모)이며, 또한 선도산 神母(신모)이며, 神母(신모)는 본래 中國帝室之女(중국(부여) 황제 해모수의 궁전에 계셨던 하백의 딸 娑蘇(사소)이다. 또한 昔有夫餘帝室之女娑蘇(석유부여제실지녀사소: 옛날 부여 황제 해모수의 궁실에 계신 하백의 딸은 사소이다. 북부여 황제 해모수는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였으므로 사소와 해모수는 부부가 된다. 고주몽과 혁거세는 형제이며, 아버지는 북부여 황제 解慕漱(해모수)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사소(유화)이다. 혁거세는 해모수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광개토대왕 비명에서 동명왕은 천제(해모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 河伯(하백)의 딸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모두루 비명“에서 하백의 外孫(외손)이라 하였다. 즉 고주몽의 어머니가 河伯(하백)의 딸이기 때문에 하백(西王母(서왕모:여호와)의 외손자가 된다.
선도산은 중국 山西省(산서성)에 있다.
복희와 여호와 삼신상제의 아들 황제는 해동의 仙桃山(선도산)에 살고 있는 神荼(신도)와 鬱壘(울루) 형제에게 인간 세상의 귀신을 다스리게 하였다. 선도산에는 꾸불 꾸불한 나무 가지가 삼천리를 덮을 수 있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복숭아나무 꼭대기에 금색의 닭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 금색의 닭(鷄神(계신:신라에서 닭 신을 믿고 임금의 관에 닭의 깃을 꽂았다, 또한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때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닭은 햇살이 몸을 비추면 찬란한 금빛을 비추었다, 또한 扶桑樹(부상수: 뽕나무)에도 구슬 소리를 내는 닭이 있었다. 동쪽의 복숭아나무와 북쪽의 뽕나무 사이에 매일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문이 있었다.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鬼門(귀문) 앞에 신도와 울루 두 형제를 지키게 하여 인간 세상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각양 각색의 크고 작은 귀신들을 붙잡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귀신들은 밤에만 나타날 수 있고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 귀신들 중에서 흉악하고 교활한 귀신과 인간 세상에서 착한 사람을 해친 귀신들이 돌아오면 두 형제는 즉시 그 귀신을 갈대 끈으로 꽁꽁 묶어 커다란 호랑이에게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을 해치는 흉악한 귀신은 점점 줄어들었고 또한 사람을 해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복숭아나무에 갈대 끈을 들고 있는 두 신의 모습을 만들어 대문 양쪽에 걸어두고 큰 호랑이 한 마리를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혀 두고 사악한 마귀를 막았다. 혹 어떤 사람은 두 형제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문 위에 붙이기도 하고 혹은 두 형제의 이름만을 써서 붙혀도 효과는 같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곧 고대부터 전래된 門神(문신)이다. 또 다른 문신은 대장군의 모습에 손에 무기를 든 秦叔寶(진숙보: 백제 의자왕 숙부)와 胡敬德(호경덕) 두 장수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唐太宗(당태종)이 몸이 쇠약하여 날마다 밤에 귀신을 보고 두 장수를 불러 자신의 방문을 지키게 하자 귀신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후세에 두 장수가 문신이 되었다.
황제의 아들 중에는 신인도 있고 인간도 있고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귀에 두 마리의 누런 뱀을 걸친 바다의 신 禺虢(우괵)이 있었다. 우괵의 아들 역시 바다의 신이며 아버지 우괵과 함게 동해와 북해를 관장하였다. 하늘나라의 식양을 훔쳐 인간 세상의 홍수를 다스린 鯀(곤)은 황제의 손자가 되고 전욱은 황제의 종손자가 되며,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은 중과 려는 황제의 5세손이 된다. 그리고 犬族(견족), 戎族(융족), 北狄(북적), 苗族(묘족), 毛族(모족)등 변방의 민족들 역시 황제의 후손이 된다.
황제가 행차 할 때는 오룡차를 타고 치우는 호랑이와 이리떼를 이끌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雨師(우사)와 風伯(풍백)이 뒤를 따르고 길의 먼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길을 인도하였다.
풍백의 이름은 飛廉(비렴)이며 머리는 참새처럼 생기고 한 쌍의 뿔이 돋아나 있고 몸은 사슴과 비슷하고 표범 무늬가 있고 뱀의 꼬리를 달고 있었다. 雨師(우사)의 이름은 萍號(평호) 혹은 屛翳(병예)라고 불렀다. 그의 모습은 마치 누예와 비슷하고 몸은 작았으나 법술을 부리면 하늘 가득히 먹구름이 몰려와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황제의 행렬에 많은 귀신들이 뒤를 따라갔다. 귀신들 중에 어떤 놈은 사람의 얼굴에 말의 몸이고 또 용머리에 새의 몸이고, 또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통을 한 귀신, 돼지 몸에 여덟 개의 발과 뱀 꼬리가 달린 귀신 등 갖가지 색의 기괴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또한 봉황이 하늘에서 날아다니고 날개가 달린 騰蛇(등사) 뱀이 땅에서 기어 다녔다. 황제의 행렬은 이처럼 성대하고 위엄이 있었다. [중국의 신화 중 발췌]
한반도 경주의 선도산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일제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삼한의 역사를 조작하기를 馬韓(마한)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지역이고, 辰韓(진한)은 지금의 경상남북도지역이고, 弁韓(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임금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한반도 남쪽으로 정주한 곳도 한반도 남쪽 마한땅이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한의 영토를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3부족사회로 왜곡 조작하여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게 조작했던 것이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삼국의 역사를 조작하기를 신라(新羅)는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대구 경상도 지역에 위치하고, 고구려(高句麗)는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반도 북부와 둥북쪽 지방이고, 백제(百濟)는 현재의 서울 漢江(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또한 가락국(駕洛國)은 경남 김해에 도읍을 정하고 낙동강 하류지역이라 하고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발해(渤海: 대진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없애고 우리나라의 역사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삼한과 삼국은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하여 중국에 있었던 지명을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이미 조작된 삼국사기를 증서로 삼아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내로 옮겨 심은 [반도조선사:한국 국사]를 편찬하여 한반도내로 쪼그라들게 조작했던 것이다. 즉 삼국의 영토를 왜곡 축소하려면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한반도내의 모든 지명을 왕명으로 바꾸어 놓고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얽어 맞추면 중국에서 건국하여 광활했던 삼한(진한, 마한, 변한)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는 저절로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게 된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행각과 한편 중국은 우리나라 聖君(성군 :三皇五帝(3황 5제)의 역사를 중국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소위 漢書(한서),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등의 僞書(위서:가짜 역사서)를 대량 편찬하여 널리 배포하므로서 후세의 한겨레는 혼돈을 일으켜 큰 착각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교육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선 삼한의 역사를 부정하고 불신하여 聖君(성군:삼황오제)의 우리역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중국의 역사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의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에 仙桃山(선도산)이 있고 황룡사 절터가 있고,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 인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심지어 중국의 漢書(한서), 魏書(위서)등과 한국의 사서와 중국 일본 등 어느 사서에도 경북 월성군의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라고 기록된 증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신라의 도읍지는 경북 월성군 경주이고 이 산이 仙桃山(선도산)이다. 라고 지적하고 국사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황제헌원이 해동(신라)의 仙桃山(선도산)에 살고 있는 神荼(신도)와 鬱壘(울루) 형제에게 인간 세상의 귀신을 다스리게 하였다. 경주의 선도산이 진짜인가? 한만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만든 가짜 선도산 인가? 만약에 경북 월성군 경주가 신라 천년의 도읍지란 사실과 경남 김해가 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의 도읍지란 사실을 고증을 통해 입증 한다면 현상금 1천억을 본 한국정신문화 선양회에서 즉시 현금으로 지불 할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한다.
동북공정은 일제가 우리 국사를 왜곡 변조한 산물의 결과이다.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각 서적을 색출해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워 없앴다.
1922년 12월 훈련 제64조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새로 제정, 공포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등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중국 대륙과 한국 각처를 누비며 조선 사료를 찾아내고 심지어 한국의 역사적 증거가 될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모두루 비문을 비릇 모든 비문의 글자마저 훼손시켰다. 그리고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1923년(대정 12년)부터 1937년(소화12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의 총목록 종류가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반도 조선사≫ 편찬의 주역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 호소이(細井肇), 아오야나기(靑柳南冥),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박영효,이윤용, 권중현 같은 역적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일황의 칙령에 따라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조선사》(37책),《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반도 조선사≫ 34권을 간행하고 또한 조선왕조실록과, 심지어 고려사까지는 전부 일제가 왜곡 조작하여 만들어준 역사인 것이다.
7천만 한겨레여...! 청년학도들이여...! 오늘날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다. 이토록 많은 고조선관계 고사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도대체 어찌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게 되었는지 단 한번 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일제는 왜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 간 우리나라의 고사서를 수집하여 무려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거액을 투자하면서 남의 나라 조선사(우리나라 국사) 편찬을 국책으로 삼아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흔적을 말살했겠는가?
대한제국을 침략한 일제는 장기적 계략을 세워 처음 속국으로 만들고 그 후 우리영토를 일본영토에 귀속시키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 조작했던 것이다. 거룩한 성인의 역사를 두고 어찌 속국으로 통치 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한반도내로 쪼그라든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는데 그 증서로 필요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서적만 남기고 모두 다 불태워 없애고 이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현재지명을 조작한 후에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로 하여금 반도조선사 편집을 완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반도 조선사≫는 우리나라의 환국시대 3,301년 -배달국시대 1,565년 -조선국 삼한시대(진한, 마한, 변한) 2,096년과 동북부여시대 204년 도합 7,166년의 역사를 말살하고 삼한과 삼국은 중국대륙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고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 변조하고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변조하여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 황제에 의하여 책봉되는 속국이라고 왜곡하여 편찬된 책이 바로 [반도조선사:한국의 국사]이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사를 왜곡 변조한 산물의 결과인 것이다.
중국 동북공정의 방책은 오직 왜곡된 국사개편 뿐이다
7천만 한민족의 반역자 " 이 병도 "의 범죄행각으로 인하여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 교육에 오랜 세월로 세뇌되고 각인된 지식에 고착되어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람들과 소위 정통 사학계는 물론 정부당국자도 우리나라의 국사가 왜곡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모든 백성들이 암울한 시대에 모든 백성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단군조선의 역사 말살에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민족정기)로부터 시작되고 오직 단군사상을 회복하는 것 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하고 일제가 말살한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와 고구려, 발해, 고려사를 한 대 묶어 “桓檀古記(환단고기)를 편집했다. 1923년 계연수 선생은 결국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밀정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인들은 계연수 선생을 처형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물에 던지고 몸통과 사지는 압록강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초대총독으로 취임하자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으로 망명해 윤세복(尹世復),이동휘(李東輝)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일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본국에서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고조선 삼한에 대한 역사를 말살한다는 일제의 흉계에 맞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 등의 역사서를 저술했다.
1925년경 동아일보에 게재된 [전후 삼한고]는 전 삼한과 후 삼한으로 나누어 논증하였다. 조선의 전 삼한은 곧 마한,진한,변한이며 후 삼한은 곧 고구려, 백제,신라(가야)라 하였다. 단재는 이두의 해석 방법을 이용, 조선 삼한의 범위를 요동일대에 비정하고 마한 50여국과 진한과 변진 24개국의 위치 비정(比定)을 시도하고 이두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각종 전적에 대한 사료와 언어 풍속의 연구 등을 제시하고, 이와 병행하여 현장 확인, 문헌수집, 유물 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으로 당시 일제 학자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주장하던 한4군(漢四郡)의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무력화시켰다. 단재는 전후 삼한설에서 한4군(漢四郡)은 한반도 내가 아니라 중국내의 존재 설을 주장하고 우리의 상고문화는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강조하고 일제의 식민지상황에서 남의 나라 역사왜곡을 철폐하라고 각 신문에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조선 상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때 '조선사'는 총 102회 연재되었고(10월 14일까지), 이어서 '1, 조선상고문화사'가 두 번으로 나뉘어(1931년 10월 15일 ~ 12월 3일, 39회;1932년 5월 27일 ~ 5월 31일, 4회) 같은 신문에 총 43회분이 연재되었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그는 한사군에 의해 멸망한 위씨국(衛氏國,위만조선)의 강역을 요동반도로 비정(比定)하여 그간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정설로 통하던 󰡐패수=대동강󰡑 󰡐왕검성=평양󰡑설을 완강히 부정했다. 이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현도군(玄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던 일제의 앞잡이 이병도의 논리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주장은 일왕의 밀명을 받고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제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학설에 반론을 재기하며 통절이 공박했으나 결국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살인적인 고문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일체 타협을 불허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이국 땅 여순 감옥에서 1936년에 순국하여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한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보다 앞서 당시 민족주의사학의 대표 박은식(1859-1925)은 1915 《한국통사韓國痛史》,1920 《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1919 《한일관계사료》4권과 국권회복 투쟁사와, 1930년대 후반 안국선(安國善)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김병조(金秉祚)의 《한국독립운동사략》,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최현배(崔鉉培)의 《조선민족 갱생의 도》, 배성룡(裵成龍)의 《조선경제론》 등이 항일 민족정신을 크게 고취하여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제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사전검열제도를 확립하고 이미 출판된 모든 사서는 금서로 지정하고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게 된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왕의 지령에 따라 한민족반역자들이 만든 국사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단 한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모두 수용하고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또 있겠는가...? 자기 나라의 국사를 자기 국민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나라를 강탈한 남의 나라 손으로 왜곡해서 만들어준 국사로 오늘날까지 교육하고 있으니 어찌 “ 얼빠진 민족 ” 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대에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주역이 되어 편찬된 반도조선사, 조선사료총간, 조선사료집진,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을 증서로 삼아 오늘날 한민족의 국사로 둔갑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사학의 선구자로 맹신하고 있으니 어찌 넋이 살아있는 민족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사학계는 소위 [정통사학계]와 [재야사학계]로 나누어져 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만든 오늘날의 국사교과서(반도조선사)를 고집하며 맹신하는 교과서적인 학계를 [정통사학]이라 하고 한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와 한민족의 선구자 계연수 선생이 저술한 [환단고기]를 한민족의 정통사학이라고 주장하는 학계를 [재야사학]이라 한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식민지시대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편집한 계연수 선생의 [환단고기]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를 극구 불신하며 僞書(위서)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을 어찌 정통사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와 계연수 선생의 [환단고기]로 국사교과서로 삼는 것이 옳은가? 또한 일제식민지시대에 일본왕의 지령을 받고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남의 나라 국사를 왜곡해서 만들어준 [조선 반도사]로 국사교과서로 삼는 것이 옳겠는가? 한민족의 정통사서와 僞書(위서)를 올바로 구분 할 줄도 모르는 참으로 괴이한 민족이며 어찌 얼빠진 정신병자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부당국에 간곡히 건의 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치며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조선 반도사』편수회에 맞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 등의 역사서를 저술함과 동시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까지 하며 남의 나라 역사왜곡을 철폐하라고 각 신문에 강력히 주장한 역사적 증서가 살아있습니다. 또한 한민족의 선각자 계연수 선생은 특히 일제가 말살한 우리나라의 고대역사 환국, 배달국,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와 고구려, 발해, 고려사를 한 대 묶어 편집한 “桓檀古記(환단고기)는 진실로 한민족의 국보적 정통사서입니다.
지금 한국의 고대역사를 탐구하는 개인과 여러 단체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들은 모두 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편찬한 반도조선사를 정통사학으로 맹신하고 한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계연수 선생의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며 한민족의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 얼빠진 소위 정통사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얼빠진 정통사학자들이 탐구한 사료를 증서로 채택하고 정부당국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서 대응 한다면 백전백패로 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지금의 국사교과서에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현도군(玄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설치하여 한족이 속신국으로 다스렸다. 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중국의 주장이 틀림이 없고 옳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한민족의 국보적 정통사서의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고 한민족의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 연구단체에 정부당국에서 연구 자금을 지원 한다면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여 국고의 낭비 일 뿐입니다.
정부당국은 한민족의 선각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계연수 선생의 [환단고기]를 한민족의 정사로 인정하고 왜곡된 우리 국사교과서를 시급히 개편한 후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대응 한다면 당연히 백전백승 할 것입니다. 또 한편 중국은 우리나라의 조상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둔갑시킨 역사적 진실이 만천하에 들통 나고 오히려 한국의 국위는 세계 만국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중국정부당국에서도 한국의 얼빠진 정통사학자들과 같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 한다면 한민족의 정사 삼국사기를 증서로 삼아 국사교과서를 개편한다면 그 어떤 사람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삼국사기 권 제 41 " (열전 제1 김유신 상)에서 금관국(가락국:가야)의 首露王(수로왕)은 김유신의 12대조이고 9세손 仇亥(구해)왕은 김유신의 증조가 된다. 신라의 國子博士(국자박사) 薛因宣(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碑銘(비명)과 朴居勿(박거물)이 짓고 姚克一(요극일)의 글로된 三郞寺(삼랑사) 碑文(비문)에서 신라 사람들은 小昊金天氏(소호금천씨)의 후손이고 황제 軒轅(헌원)의 후예이다. 고구려 또한 高辛氏(고신씨)의 후손이다. 라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공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뚜렸이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및 가락국의 4국은 중국 대륙에서 개국한 사실을 뚜렷이 기록하고 고구려 본기 제 1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보다 먼저 천제(하느님)의 아들 解慕漱(해모수)의 북부여시대를 명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역사적 진실은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자신이 번역한 삼국사기의 譯註(역주)에서 자기 임의대로 모든 지명을 조작하여 신라의 도읍지는 경북 경주로 비정하고 고구려는 평양으로 백제의 도읍지는 경기도 하남으로 가락국은 경남 김해로 도읍지를 비정하여, 마치 4국의 강역이 한반도내에서 건국된 것처럼 도읍지와 모든 지명을 이병도씨 임의대로 조작하여 [조선사: 우리나라의 국사교과서]를 왜곡 편찬했던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사를 왜곡 변조한 산물의 결과입니다.
본 한국정신문화 선양회는 중국 동북공정의 음흉한 계략을 미리 예견하고 [2003년,12월 24일. 청와대 개시판에 [ 노무현 대통령에게 “왜곡된 국사 정립 ” 건의문 ]을 띄우고 등록번호 [ 03010312231 ]과 [ 0302031243 ]번을 통보 받았습니다. 본 [한국정신문화 선양회]는 2000년에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왜곡된 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매월 마지막 금요일 오후 3시에 수원새마을 회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올바른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5개국어로 번역하여 만천하에 공개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만약에 정부당국에서 [왜곡된 국사개편]에 공감하고, 본 [한국정신문화 선양회]에 연구자금을 지원해 준다면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명확한 증서를 1년 내에 제시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드시 무력화 시키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환국, 배달국, 단군 조선 삼한과 삼국시대의 광활했던 강역이 쪼그라들고 뒤틀린 이 나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전에는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하고 세계의 인류를 구제하였던 진실로 宗主國(종주국)의 거룩하신 聖人(성인) 국조와 대한독립을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열의 영령은 결코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입니다. 끝으로 상기의 본문은 세상에 처음 밝히는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역사적 증서이기 때문에 처음 읽는 사람이나 왜곡된 국사 지식의 고정관념과 종교적 사유로 혹 불신하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다시 한번더 읽으면 인류의 문명과 종교의 원천국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비릇된 역사적 진실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상기 전대미문의 역사적 진실에 대하여 의문이 있다면 본회로 문의하시면 상세한 답변을 올리겠습니다. 본 한국정신문화 선양회원 일동의 뜻을 정부당국에 엄숙히 공개 건의하오니 정부 당국의 협조를 간곡히 당부하오며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가부의 결정을 본회에 통보해 주실 것을 고대하옵니다.
끝까지 읽어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
2004년 8월 12일. 한국정신문화 선양회 일동
韓 國 精 神 文 化 宣 揚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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