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확장..
왜 건설경기를 부양하면 내수가 풀리고 도 투기가 조장되고등 하면서 순효과가 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로 치닫게 되는가?
물론 다수는 이틀간의 글에서 모든 것을 알수 잇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이해가지 않은 분이 있어서는 아니되겠기에 추가설명을 드린다.
우리의 경제성장과 건설시장은 평행선을 긋듯이 비례적으로 팽창되어 왔다. 특히 70년대 이후의 외화획득의 주수단으로서의 건설분야를 우리는 쉬이 기억한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의 아파트 건설 붐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말해 국민주택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주택에 관한 건설의 붐도 역시 발동되었고, 역시나 SOC는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건설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또 그 팽창도는 서서히 증가하는 추세로 일관되어 왔다.
물론 그런 한경하에서 건설사나 건설인력들 역시 서서히 핑창되어 가는 추세 즉 안정된 증가추세를 보여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87년을 우리는 민주화시기로 기억한다. 그리고 당시부터 노사분규가 봇물을 이루고 급작스런 임금상승이 시작되는 시기로 기억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혼란도 그리고 경제급팽창도 그리고 민주화도 급속도로 실시되면서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로 기억한다. 또한 아울러 3저호황의 시기로도 기억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연상되는 것이 바로, 건설업의 급팽창이다. 임금상승으로 인한 내수확대로 인한 투자확대, 주택수요급증, 그리고 노사분규로 인한 상당한 근로자들의 직장이탈, 고임금구조로 변화되는 과정에서의 산업구조재편의 필요성 대두(이 경우에 고유기업 다수가 폐업이나 해외이전 등으로 귀착), 그리고 건설임금과 제조업 임금의 격차로 인한 다수 근로자들의 건설업에의 편입, 그리고 기타의 각종의 건설수요 급증 등...
일단 이 정도의 이유만 기술해도 아마 당시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당장에 급작스레 건설수요의 급증에 기인한 건설사 및 건설인력의 급증이 87년부터 93년사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93년을 지나 94년에 접어들면서, 차츰 주택문제가 해소되어 가고, 사회간접투자 역시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당시 건설업계는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성과가 좋은 그런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노태우정권 당시 국가주택건설의 노력은 주택수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고, 도시 농촌을 망라한 사회간접투자 역시 어느 정도 수요를 충족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며, 94년 이후로의 건설의 이슈는 역시 농촌현대화. 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며, 아차! 각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건설한 관공서 신축경쟁도 뻬 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 등 정도일 것이다.
어쨋든 94냔 이후로는 아파트미분양 물량이 급증했고, 그 여파로 부도를 맞는 건설업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IMF시기를 맞고 건설업계는 엄청난 재앙을 맞지만, 실재 한국의 고질적인 건설업의 특성 즉 오직 돈을 빌려서 건설하고 그 분양 후에 빛을 청산하는 그런 구조, 그래서 부채비율이 너무니 없이 높은 그런 구조였을 터이고, 더군다나 상당수 건설사들은 공룡화되어서 위기에 대처할 수 없는 그런 상태, 거기다가 건설업의 급팽창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불균형의 주요인의 역할, 제조업보다 더 과도한 건설노임, 그리고 97년 경의 3저호황과 동시에 향유햇던 저환율(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 원자재에 대한 부담이 없었음), 이런 것들은 결국 건설업계를 한국의 수용정도를 지나치게 처과하여 발붙이게 하는 동기부여를 하게 한 장본인들인 바, 그런 것들이 IMF사태 이후 건설업계에는 모두 악재로서 작용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주택경기의 급냉각으로 인한 시장악화마져 격게 되어서, 상당수 건설사들은 파산위기 또는 마비상태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정이 몇년 즉 98년부터 2000년까지 계속되었지만, 건설업계 역시도 99년 이후로는 다시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를 보인 것이 사실이고, 또한 상당수 건설종사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급팽창된 건설부분의 규모는 잠재적으로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에서 다수 국민이 건설업에 종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런 경우 건설업을 활성화시키면 당연히 내수가 호전되는 것이며, 다만 그 부담은 더 많은 다수가 지게된다는 잠재적 미래만 간직한 채, 그런 판단 하에서 경기부양책의 최우선책으로 건설경기부양을 택하여 각종의 건설사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고, 건설사들ㅇ게 각종의 자유를 향유케 함으로써, 단기간 내수촉진을 일궈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구조조정 다시 말해서 한국호의 경쟁력 재고작업은 어느 정도 확고하게 이뤄냈어야 그 고통의 댓가를 회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이를 철회한 결과로, 건설업계에 대한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건설부분 종사자의 숫자를 줄여내지 못하고 건설부분의 규모를 축소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좁은 땅떵이를 가지고 있고, 특히 90년대에 급작스런 건설부분의 성과로 사회간접자본, 주택공급 등을 상당히 일구어 놓아서, 이후의 현재의 건설종사자들의 밥그릇을 채워줄 일거리를 찾기에 골몰하는 산세로 전략하게 된 것이다.
물론 87년 당시 만새는 그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낙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그것은 현재가 아닌 머지 않은 미래에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가 맘먹기에 따라서는 현재 당장에 그 성과물을 얻을 수도 잇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건설수요가 없다면, 그 다음은 북한이라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즉 국토기 바록 좁더라도 한국 즉 남한이 북한에 대한 건설경기를 탈 수만 있다면, 그리고 북한에 대한 건설을 우리가 담당할 수 잇다면, 지금의 급팽창된 위장을 그나마 채울수는 잇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이후에는 중국과 소련을 우리의 건설사가 점령해 갈수도 잇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통일과 북한에 대한 건설담당은 요원하다. 그런 속에서 건설부분의 위장을 축소수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건설부분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고, 그 사회문제를 고스란히 간직해야만 한다. 따라서 당시 다시 말해서 97냔밀브타 98년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였음이 입증된다. 물론 다른 분야의 구조조정과 산업재편 그리고 경쟁력 재고를 위한 사전작업이 상당수 이루어졌다. 그래도 만새는 그것은 부족하다고 말한 바 잇다. 그 중 건설부분은 확고하게 위장축소수술을 단행하여 그 수술받은 이가 일상사에서 전혀 부자연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놓았어야 옳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다시 말해 당장의 위장축소의 고통 즉 칼이 무서워서 칼로 개복하다 말고 다시 봉합수술을 해 버린 꼴이다. 따라서 위장은 확장된 채로 그대로 존속하는데,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과거보다 훨씬 적다. 그러니 배가 고플 수 밖에.....
이 정도면 어제와 그제의 글이 이해될 것이라 생각된다, 구고조종이라는 것은 다만 한 기업 또는 한 분야의 업종의 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한 기업 또는 한 업종,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모든 경제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조를 다시 재편하는 것이 바로 구좋조정이다.
즉 80년대까지는 우리의 주 업종이 섬유제조업이었다면, 그리고 경공업이 차츰 그 자리를 차지해 왓다면, 90년대 이후는 반도체와 자동차, 그리고 정보산업이라 말할 수 잇다. 다시 말해서 업종의 구조적 배분율이 변화하여 그 한 나라의 산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미래를 예측하여 미리 이를 임의적으로 개편해 줄 수 잇다면 많은 폐해릃 막고 또한 낭비도 줄이고 그리고 국가경쟁력도 한걸음 앞서 나갈수 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방치하고 결국 개편해서 잘라내야 할 부분을 아까워 또는 당장의 고통이 두려워 이를 방치하면서 그냥 놔둔다면 어떤 상황이 닥칠때 그것들은 곧 독으로서 그리고 적으로서 충분히 실력을 발휘해 버린다.
다른 잡다한 서명은 생략하고, 다만 이런 사전적 임의적 재편작업을 서두름으로써 미래의 기회를 포착하자는 우리의 기회는 곧 IMF위기가 기회였던 것이고, 그 기회는 높칠 수 없는, 그리고 주마간산식으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그런 기회였다는 것이다.
지금 수출이 잘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당시의 밑거름 주기 작업의 결과일 따름이지, 지금 경제운용을 잘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성과물을 보면서도 아직 당시의 기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다만 남이 풀어주는 산수를 그대로 베낄줄 밖에 모르는 모방의 도사일 따름이지, 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주체는 못된다고 생각된다
어쨋든 하고픈 말이 많지만, 오늘 하고픈 말은 다만 건설업이 급팽창되었다면 언젠가는 그 축소작업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언제까지 영원토록 팽창홀수도 그리고 먹이가 영원히 증가할수도 없음을 우리는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이 좁은 국토, 자원한 제대로 없는 국토, 더더구나 분단되었으면서도 열강의 포위망속에 같혀 잇는 국토하에서 말이다.
자! 이래도 또 내수진작한답시고 부동산경기 부양할손가? 아니면 전국에 아파트천국을 만들손가? 그리고 자율의 결과가 곧 자신들 맘대로 가격만 높이는 것임이 드러났는데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면서 다수 국민을 괴롭힐 것인가?....
균형은 한 번 깨지면 그것을 다시 추스르기엔 너무나 많은 힘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경험을 항상 하면서도 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냄비근성? 망각근성? 아니면 태생적 근시안? 어떤 것인가?......
^ 아참 하나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제조업임금과 건설노임의 차이와 그리고 상당수 제조업종사자가 당시 즉 87년부터 93년 당시 건설업에 편입된 사유를 적자면, 노사분규로 폐업하거나 해고된 노동자들 대다수가 건설노동자로 편입되었고, 제조업종사자중 고유업종의 저임금 근로자들이건설노임의 고단가 때문에 건설업에 편입되었고, 제조업하던 기업 사장님들 상당수가 건설업올 눈능 돌렸고,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당시로 보아서 대다수의 청년들이 일단 공장에 들어가 일을 좀 하다가, 다음 단계로 건설업에 종사하여 목돈을 만든 다음 자영업으로 정착하는 것이 수순이었던 바, 바로 그 단계중 가장 혹할 수 잇는 부분이 건설업 종사였고, 그들중 상당수가 자영업으로 귀착하는 것이 통례였다.
물론 지금은 곤장, 사무실, 어떤 직종의 근로자나 종사자들도 곧바로 자영업으로 자리잡지만, 이제는 자영업의 한계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시절이라, 서민들 판단이 매우 어렵게 된 시기임에 틀림 없다 할 것이다.
참고로 만새가 당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고 또 생산직에 징기간 복무한 경험도 있었던 시절이라, 당시의 파악은 틀림 없다 감히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만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