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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共防諜] 개정일 색희 처제 미국으로 망명!







김정일(金正日)의 처제(妻弟) 고영숙(高英淑) 부부(夫婦), 미국으로 망명(亡命)





1998년 5월 스위스(Switzerland) 거쳐 망명





김정일의 스위스·런던(London) 등 해외비자금(海外秘資金)에 대해 정보제공(情報提供)





미국 정부(政府), 뉴욕(New York) 증시(證市)에 투자(投資)된 김정일 비자금 동결(凍結)





미국측에 김정일 망명을 주선(周旋)하겠다고 제의(提議)하기도





「김정일의 요리인(料理人)」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증언(證言) : 『김정일 부부와 잘 어울리던 고영숙 부부 가족이 1998년 이후 보이지 않아 의아(疑訝)하게 생각했었다』





우리 정부 인사(人士)도 남편 朴씨 면담(面談)





망명이유(亡命理由)는 『너무 많은 비밀(秘密)을 알고 있어 살해(殺害)될까 두려웠다』





미국 정부, 신분확인(身分確認) 후 망명허가(亡命許可)





月刊朝鮮(월간조선) 2003년 9월호 특종보도(特種報道)





김정일(金正日)의 애처(愛妻) 고영희(高英姬·50세)의 여동생 고영숙(高英淑·45세)과 그의 남편(朴씨·40대 후반)이 1998년 5월에 스위스(Switzerland)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亡命)하여, 현재(現在) 미국 정부(政府) 보호하(保護下)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8월18일 발간(發刊)된 月刊朝鮮 2003년 9월호의 보도(報道)로 밝혀졌다.





김정일의 처제(妻弟)인 고영숙 부부는 망명 후 미국 정보기관(情報機關)에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海外秘資金)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情報)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이 부부로부터 김정일이 뉴욕(New York)과 런던(London)의 주식시장(株式市場) 및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을 투자(投資)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인(確認)하고 뉴욕 시장(市場)에 투자한 자금을 동결(凍結)시켜버렸다고 한다.





月刊朝鮮은 고영희 부부를 면담조사(面談調査)했던 미국측 인사(人士)와 한국 정부 당국(當局)으로부터 망명사실(亡命事實)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망명 당시(當時) 미국 국무부(國務部)에 근무(勤務)했던 한 고관(高官)에 따르면 고영숙 부부는 스위스에서 생활하던 중 스위스 주재(駐在) 미국 대사관(大使館)을 통해서 망명을 신청(申請)했다고 한다.





미국 당국에서는 이 여인(女人)이 과연 고영희의 여동생인지 확인하는 데 꽤 시간(時間)이 걸렸다고 한다. 틀림없다는 확신(確信)이 들자 망명신청(亡命申請)을 받아들이고 미국 정부의 보호하에 두고 신문(訊問)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영숙은 망명동기(亡命動機)에 대해서 『김정일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것이 많아, 그 때문에 살해(殺害)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설명(說明)했다고 한다. 고영숙의 남편 朴모씨의 신분(身分)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스위스는 김정일이 40억 달러로 추정(推定)되는 비자금을 예치(豫置)하고 있는 곳이고 별장(別莊)도 있어 김정일의 친족(親族)들이 유학(留學)도 하고 유람(遊覽)도 하는 근거지(根據地)이다.





고영숙은, 언니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난 두 아들 정철(正哲)·정운(正雲)이 스위스 베른(Bern) 근교(近郊)에 있는 빌라(villa)에 살면서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를 다닐 때 따라와 이들을 보살펴 주는 일을 한 적도 있다.





고영숙은 북한 외교관(外交官) 신분을 갖고 있었으며 이 빌라의 소유주(所有主)로 등록(登錄)되어 있었다고 한다.





5년 전 고영숙의 남편 박씨와 면담한 한 인사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그는 40대 후반의 아주 세련(洗練)되고 자존심(自尊心)이 강한 인상(印象)이었다고 한다. 朴씨는 『김일성(金日成) 사망(死亡) 후 김정일이 굉장히 불안(不安)해 하고 있다. 내가 나서서 그를 미국으로 망명하도록 주선(周旋)할 용의(用意)가 있다』는 취지(趣旨)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고영숙 부부가 탈출(脫出)한 시기(時期)는 김정일 정권(政權)의 핵심부(核心部)가 대기근(大飢饉) 사태(事態)로 한창 흔들리고 군부(軍部)와 측근(側近)에서 반란모의(反亂謀議)가 잇따르고 황장엽(黃長燁)씨가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미국 정부 일각(一角)에서는 고영숙 부부 망명후 북한의 비상사태시(非常事態時) 김정일을 스위스로 망명시키는 공작계획(工作計劃)도 검토(檢討)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편 10여년간 김정일의 전속요리사(專屬料理師)로 있다가 2년 전에 탈출(脫出)했던「김정일의 요리인(料理人)」 저자(著者)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씨는 月刊朝鮮 기자(記者)에게 아주 흥미(興味)로운 증언을 했다.





『고영희의 여동생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김정일 집안 사람들과 자주 식사(食事)를 하고 놀았다. 이 여동생의 아들은 김정일-고영희 부부 사이의 둘째 아들 김정운(金正雲)과 친하여 농구도 함께 하곤 했다.





그런데, 1996년에 내가 일본으로 일시귀국(一時歸國)하였다가 1998년 6월에 돌아가니 고영희의 여동생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짐작이 간다』





고영희는 1953년생으로 올해 50세이고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은 다섯 살이 아래이다. 고영희는 제주도(濟州道) 출신(出身)의 재일교포(在日僑胞) 고태문(高太文)의 2녀 중 장녀(長女)로 태어났다.





고영희는 북한의 만수대예술단(萬壽臺藝術團)이 1973년 일본에서 공연(公演)을 가질 때 단원(團員)으로 참가(參加), 일본 언론(言論)의 주목(注目)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 일본 언론에 고영희 얼굴이 공개(公開)되었다.





일본 공영방송(公營放送) NHK 취재진(取材陳)에 따르면 고영희의 아버지 고태문은 일본의 유명(有名)한 유도선수(柔道選手)인데, 이북(以北) 출신의 일본 프로레슬러(pro wrestler) 역도산(力道山)과 친했다고 한다. 고태문은 역도산의 도움으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金日成) 앞에서 유도시범(柔道示範)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태문 가족은 1960년대 초(初), 북송선(北送船)을 타고 북한에 들어갔다.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원(萬壽臺藝術團員) 시절(時節)인 1974년 무렵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김정일은 자신(自身)의 별장(別莊) 중 하나인 창광산(蒼光山) 관저(官邸)[평양(平壤) 소재(所在)]에 고영희를 들여앉혔다.





안기부(安企部, 국가안전기획부, 國家安全企劃部) 출신의 한 고위(高位) 관계자(關係者)는 『고영희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愛情)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모로 확인(確認)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씨는 『고영희를 알고 난 뒤부터 김정일의 여성편력(女性遍歷)이 줄었다』고 말했다.





여동생 부부의 탈출망명(脫出亡命) 이후(以後)에도 고영희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을 변치 않고 있고, 2002년 말부터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에서는 고영희를 우상화(偶像化) 하는 캠페인(campaign)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專門家)들은 이는 고영희의 소생(所生)을 김정일의 후계자(後繼者)로 옹립(擁立)하기 위한 전초작업(前哨作業)이 아닌가 관측(觀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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