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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 북괴군 트럭 서울 통과





■ DMZ 인민군 병사의 수기(手記)





● 남파공작원 [남침땅굴 포함]



대화와 교류의 분위기가 남북한의 오랜 긴장감에 촉촉한 평화의 향수를 뿌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싸움은 계속 되고 있다.



『우리의 과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통일은 무력통일만 있을 뿐이다』



지금도 북한군 내부에서는 이렇게 떠들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병력을 증강하고 새로운 사단과 각종 부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3개의 포(砲)여단을 후방에서 끌어내 전방에 배치하였으며 탱크부대를 전선지구에 집결시켰다.



그뿐인가, 경의선이 지나가는 모든 코스에 포와 탱크를 비롯한 중무기, 병력이 들어갈 수 있도록 참호를 굴설했다. 모든 전선부대에 전시용 물자를 공급했고, 생화학무기까지 비무장지대에 들여놓았다. 개성역전은 거대한 포탄창고로 변해버렸고, 그것들을 밤사이에 휴전선 일대로 싣고 갔다.



남한은 평화의 단꿈에 빠져있는 사이 북한은 지금이야말로 무장의 기회라며 철갑을 두르는 중이다.



내가 있던 민경[DMZ를 지키는 민사행정경찰. 한국의 MP(헌병)]부대에서는 50여 대의 「주체호」 자동차가 있다. 이렇게 많은 차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비무장지대를 맡고 있는 부대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부대 보급 창고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였으니 웬만한 차는 내가 직접 운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민경부대 「주체호」 자동차 50대 가운데 10대가 야간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10대 중 하룻밤에 동원되는 차는 다섯 대. 이틀에 한 번씩 교대로 운행했다. 아침에 자동차가 돌아오면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적재함이 온통 상처투성이로 깨지고 찌그러져 있곤 했다. 자동차 밑창은 돌멩이 부스러기들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운전수들에게 『도대체 무슨 작업을 다니냐』고 넌지시 물어보면 『밤사이 서울에 갔다 왔다』고 농을 하곤 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땅굴을 파는 공사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우리 부대가 근무하는 비무장지대에는 한국에서 찾아낸 「제3땅굴」이 있었다. 그래서 부대가 더 자랑스럽다는 말도 있었다. 땅굴을 개성지구에서 파고 있었고, 한국의 파주나 인근지역이 아닌 서울을 지난단다.



든든하다던 「주체호」도 한 달이 되니까 고물이 되어버렸다. 운전사들은 공사가 끝나면 새 차로 바꾸어준다는 말에 흥이 나, 지금 끌고 다니는 차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회담의 악수 뒤에서 일어나는 땅굴 공사! 북한은 절대로 체제를 포기하지 않으며 전쟁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부대장 운전수로 있을 때 한밤중에 부대장의 지프차를 타고 비무장지대에 나간 적이 있었다. 동행한 사복 차림의 장교는 나에게 알지도 못할 무전암호표를 주면서 주파수를 맞추어 자기의 말을 전달하라고 시종일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암호표를 받아본 순간 가슴이 꿍딱거리며 떨렸다. 우리가 통신훈련을 받으면서 익혔던, 전시 게릴라전에서 최악의 경우에 호출해야 하는 통신연락의 암호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훈련을 받을 때에만 써보았기 때문에 그 뒤로는 그저 머릿속에 암기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가 차를 몰고 지나가자 보병부대 차단소에서는 보병이 아니라 장교들이 문을 열어 주었고 비무장지대 역시 부대 참모장이 직접 열쇠를 들고 민경측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얼마 후 라이트도 켜지 않은 두 대의 승용차가 열어놓은 차단소 문을 통과하더니 여러 명이 내렸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보면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복장교의 말을 받아 외웠다.



『여기는 고원, 여기는 고원. 응답하라, 평강』



『고원을 지나서 계곡으로 내려간다. 밤 날씨는 매우 좋다』



여러 명의 사내 중 두 명이 대기해 있던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어둠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곳은 남쪽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두 시간을 그곳에 서 있었다. 사복장교의 긴장하던 얼굴이 풀리는 듯 싶더니 나를 찾았다.



『무사히 계곡으로 들어갔다. 이상!』



사복장교는 나에게 비로소 작은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종이를 한장 내밀었다. 목숨을 걸고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였다. 망설이지 않고 지장을 찍은 나는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어깨를 툭 건드린 사복장교는 다른 차를 타고 가버렸다. 돌아오면서 부대장에게 말했다.



『비무장지대에서 근무를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그러자 부대장이 나를 보면서 하는 말,



『나는 세 번째』



「아직까지 남파공작원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휴전선을 넘어온 많은 공작원들이 웃음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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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땅굴 자료 http://www.ddanggul.org ]







● [정주영이 보낸] 그 많은 소들은 어디로 갔나



반세기 동안 누구도 넘어 본 적이 없었던 분단선. 수백 마리의 소들이 떼를 지어 그 금단(禁斷)의 선을 넘어 북한으로 왔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소보다 못한 자기들의 모습이 처량해 북에 있는 형제, 남에 있는 가족들을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북한은 농기계가 대단히 부족해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다. 북한에서는 소가 짐승이 아니라 농기계 그 자체다. 따라서 소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식량난 시기에 농장에서 기르는 소를 잡아먹었다가 공개처형 당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남쪽에서 온 그 소가 당연히 농촌으로 보내져 「농기계」로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를 키워서 새끼를 치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북한 경제의 재생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단한 상상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남북의 주민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그 소를 보냈고 그 소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소가 정확히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였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점차 휴전선을 넘었던 소떼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누구나 다 인민들에게 쓰였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 소들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소들의 출처를 묻는다면 인민군이 먼저 대답할 것이다. 「조국을 지키는 데 썼다」고. 군인들이 다 먹어치운 것이다. 하긴 국제사회에서 보내는 지원식량이나 물품이 거의 모두 인민군대로 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김정일이 군부대 시찰을 할 때마다 몇 마리씩 승용차 뒤에 끌고 다니면서 자기가 시찰한 부대들에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김정일 측근이 꼭 한마디씩 남겼다.



『남조선 정부가 진상품으로 보낸 소인데 장군님께서 군인들에게 주시는 것이오』



참으로 군인들에게는 감지덕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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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현지시찰 - 군인들을 굶겨 죽이는 시찰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은 기우뚱거리는 체제를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군사력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쏟았다. 자기를 지켜주고 독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사력 강화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군부대 시찰의 길에 올랐다. TV나 신문에 보이는, 부대에 시찰 나온 김정일을 환영하는 모습들. 하지만 그 뒤에는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쓰러져 간 많은 군인들의 그림자가 비껴져 있다는 것을 외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김정일은 군부대 시찰을 며칠이 멀다 하게 진행하면서도 단 한번도 자신이 직접 특정한 군부대를 짚어서 가겠다고 한 적이 없다. 북한의 모든 부대들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사령관 동지를 모실 수 있게 준비하자!」는 구호 아래 부대를 갱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김정일이 시찰할 만한 부대들은 3-4년 전부터 무력부, 총정치국, 보위사령부의 지시대로 「김정일을 모실 수 있게」 특별히 준비해놓고 있다.



어느 날, 어떻게 올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다만 무력부, 총정치국, 보위사령부에서 내려와 사전검열을 한 다음에 합격이 되면 김정일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합동검열이 자주 있으면 장교들은 곧 「1호 행사」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어마어마한 보좌진을 대동한 김정일은 부대에 도착하여 단 한 시간도 안 되어 떠나지만 그 부대는 김정일을 모시기 위하여 오랜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모든 공급이 중단된 부대에서는 얼마 안 되는 군인들의 식량을 조절하여 부대 꾸리는 사업에 써야 했고, 그래서 영양실조 환자가 더욱 생겨나게 된다.



또한 김정일이 오면 총격술과 각종 훈련모습, 김정일이 좋아하는 공연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준비하느라 몇년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면서 훈련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어떤 부대 군인은 「김정일을 모시기 때문에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오지도 않는 김정일을 위하여 13년을 준비하다가 허탈한 심정으로 제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쳐 준비한 군인들이건만 막상 김정일이 오기 전에 또 신체검사를 받아 허약하다고 판정되면 행사가 끝날 때까지 갱도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대신 다른 건장한 군인들로 그 자리를 메운다. 일반 보병부대 군인들의 상당수가 허약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알게 된 북한군 수뇌부에서는 김정일 몰래 별도의 호위 성원들로 조를 짜놓았다가 보병들과 바꾸어 놓는 앙천대소(仰天大笑)할 일까지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급기관의 비상미를 털어 부대 창고에 채워 놓고 김정일에게 보여준 다음 그가 떠나면 모조리 회수해 다시 올려 보낸다. 심지어는 행사 때문에 입혔던 새 군복까지 깨끗이 벗겨간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시찰에 만족한 김정일은 행사를 조직한 장교들에게 선물과 표창을 준다. 그 부대 군인들은 오늘도 굶주림과 허약에 쓰러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매일 같이 북한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되는 김정일의 인민군부대 시찰소식, 그를 환호했다는 군인들의 외침소리에는 감격의 목메임보다 고통과 아픔의 신음이 더욱 간절히 서려있다.



김정일은 그에 아랑곳 않고 오늘도 군부대를 돌며 자신이 정치를 잘하는 줄 착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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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댐을 무너뜨려라



[前略]



그런데 그 해 장마는 「64년 만에 처음」이라는 대홍수를 맞았다. 상급 단위에서는 훈련소에 훈련을 중지할 것을 지시했고 그 이유에 대하여 구구히 설명했다. 숱한 군인들이 장마에 실종됐고 아파트들과 개인집들이 줄줄이 무너져 수백 명의 사상자들이 속출했다고 처음으로 외부소식을 공개했다.



[中略]



장마는 여간해서 멈추질 않았다. 계곡이 불어나 바윗돌을 삼키고 무서운 소리르 내면서 논밭을 휩쓸었다. 훈련병들은 북한에서 남침용으로 건설한 안변청년발전소 같은 것들이 이 기회에 조국을 물로써 통일시킬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안변청년발전소란 북한에서 강원도 안변군에 5천 명이 넘는 인민군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지어놓은 발전소이다. 100리 굴을 뚤어 물을 가득 채워놓은 안병청년발전소가 터지는 날에는 서울이 물바다에 잠긴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병들이 곤히 잠들어 있던 훈련소에 갑자기 비상명령이 떨어졌다. 훈련병들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무기고로 달려갔다. 처음 훈련받을 때의 느릿한 동작과는 완전히 다른, 거의 완벽한 동작들이었다. 훈련병들이 무기고로 달려가자 이미 그곳에 있던 교관들은 손과 턱짓으로 공구(工具) 창고를 가리켰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수해복구 아니면 사전방지 작업을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삽, 곡괭이, 맞들이(들것) 같은 도구를 들고 밖에 집합하자 미리 대기 중이던 두 대의 민경 차량이 우리를 태우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개성에 와서 한 번도 훈련소 밖에 나가보지 못했던 우리는 어딘지 분간하지 못했지만 지형정찰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솨~」 하는 거대한 물소리가 빗소리를 제압하고 있었다. 차가 멈춰서고 우리들은 구령소리에 맞춰 정렬해 임무를 기다렸다. 그때 지프차와 「갱생」 승용차 석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더니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나는 지프차 실내조명등 불빛으로 안에 앉아있는 민경 부대장과 여러 장교들, 그리고 뱃살이 두둑해 보이는 사민(私民) 몇 명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을 지도를 들고 뭔가 손짓을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더니 이내 훈련소 중대장을 불러 명령을 하달하고 차를 돌려 빗물을 우리들에게 들씌운 채 가버렸다.



나는 상황을 가늠할 수 없었다. 후에 듣기로 여기는 봉동리 작은 댐이었는데, 지금은 경의선 철도가 지나가는 자리이다. 그때 보기에 그 댐은 장마에 허물어지거나 보강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교관들과 훈련소 장교들은 평소 자랑삼아 가지고 다니던 손전지를 한 번도 뻥끗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불빛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모든 것들이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낌새가 이상했다.



작업명령이 내려지자 훈련소 동료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댐이 무너질 수 있도록 돌을 뽑고 흙을 파는 작업을 하라는 것이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쭉 펼쳐진 논과 옥수수 밭이 보였고 몇 채의 살림집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무얼 어쩌자는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은 명령받은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숱한 논밭과 사람이 살고 있는 살림집들을 파괴하면서까지 구해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서둘러 차에 타라는 다급한 소리에 댐을 보니 무너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을 태운 차가 그곳을 빠져나와 국도에 올라섰을 때 댐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물이 노도 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훈련병 모두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거센 숨소리를 내며 질풍 쳐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훈련소에 돌아오니 교관들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밤참을 먹도록 배려해주었다. 오랜만의 살뜰한 배려에 모두 감개무량한 듯 눈만 껌뻑였다. 장마가 끝나고 훈련이 다시 시작되자 훈련병들은 그 일을 잊어버렸다. 아니,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뒤 훈련을 끝마치고 훈련병들이 모여 앉아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개성시 수해복구 현장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자연재해로 우리나라가 엄청난 수해를 입었고 특히 개성시 판문군 봉동리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 인민과 군대가 떨쳐나서 수해복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에서는 봉동리의 피해현장을 보여주면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복구 작업을 하는 모습도 비춰줬다. 우리가 보기에도 건질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싹 쓸어간 곳에서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국제사회에서 그곳을 촬영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직접 무너뜨려 형체조자 없는 댐과 물이 휩쓸어버린 봉동리, 거기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 그리고 국제지원단체의 일원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서 봉동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 소식과 함께 큰 수해를 입은 우리나라가 적십자정신에 입각한 대대적인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벌레가 몸으로 기어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지원을 받기 위해 일부러 댐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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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벌한 휴전선



민경이 처음 생겨난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53년7월27일 전쟁의 포성이 멈추고 북한과 남한은 38도선에 대치했다. 민경은 그때 생겨난 인민군과 국국의 비무장지대 부대이다.



정전협정을 체결한 유엔군과 북한군은 중앙분계선을 기준으로 4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조성하기로 합의했는데, 남북이 각각 2킬로미터씩 분할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지대 내에는 군대를 두지 않고 인민군, 국군 관계없이 공통어로 명명되는 「민사행정경찰」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두기로 했는데, 말이 경찰이지 「특별한 군대」라고 볼 수 있다.



국군의 민경은 왼쪽 팔에 「MP(헌병)」라는 완장을 끼었고 북한군은 「민경」이라고 쓴 완장을 끼고 근무한다. 이들은 판문점에 위치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감시를 받게 되어있다. 비무장지대에 들어오는 북한쪽의 모든 자동차들은 빨간 깃발을 달았고 농사일로 들어오는 국민들 역시 빨간 천으로 팔을 동여맨다.



북한군은 무력부 직속 「민경지도국」이 별도로 생겨났으며 이 「민경지도국」이 휴전선 155마일에 위치한 9개 민경부대, 1만8천 명의 민경요원들을 장악 관리하고 있었다.



애초에 비무장지대는 그야말로 무기가 없는 지대로 계획되었지만 사실은 완전무장지대로 바뀐 지 오래다. 탱크나 비행기 같은 기계화 장비들만 없을 뿐이지 내노라하는 무기들을 모두 배치되어 있다. 37-57mm 고사총들과 비반충포, 화력이 센 기관총이나 투척소총, 방사총, 박격포와 같은 무기들이 비무장지대 참호들에 배치되어 있으며 모든 민경들이 그 사용에 능숙하다.



37-57mm 고사총들과 비반충포는 유사시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살상화력이 센 신형포탄을 장착하여 솔 수 있게도 되어 있다.



뿐만 아니다. 지구상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철의 장벽」, 「요새중의 요새」라고 불릴 만큼 상상도 못할 장애물들이 철옹성같이 이 민족의 분단을 지키고 있다. 오죽하면 김정일이 『국경과 비무장지대는 다르다. 휴전선만큼은 확실하게 마음 놓고 있다』고 자화자찬을 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왜 그토록 휴전선에 대해 큰소리를 칠 수 있겠는가.



북한군의 절반 가량에 달하는 숱한 병력이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내가 있었던 판문군[개성시 판문군은 북한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고 땅이 작은 군으로 불린다.] 주변에만 2만 명의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



민경들이 포진한 비무장지대를 제외하고도 1지대, 2지대, 3지대로 나누어 포병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각종 포(砲)부대들과 탱크부대, 그리고 전선군단, 사단들이 마치도 거미줄처럼 조밀하게 주둔해 있다.



판문점을 중심으로 도라산전망대 쪽 동부전선과 임진강계선의 서부전선으로 나뉜다. 동부전선에는 1군단과 5군단[강원도 준양군과 평강군]이 주력을 이루고 있으며 서부전선은 2군단과 4군단[황해북도 평산군과 황해남도 해주시] 관할지역이다. 4군단을 제외한 1,2,5군단은 북한군 전선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다. 최근에 북한은 전시작전 때문에 「민경지도국」을 해산하고 민경을 전선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럼 비무장지대에 있는 장애물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4킬로미터 비무장지대를 양국 군대가 각각 2킬로미터씩 차지하고 있지만 북한군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초소까지 다 합쳐서 사실상 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1킬로미터는 어디에 갔을까.



그 1킬로미터는 전구간이 지뢰밭으로 탈바꿈되어 악마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있다. 지구상에 1억 개의 지뢰가 있다고 하지만 그 대다수는 아마도 북한군 비무장지대의 지뢰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뢰만 해도 30종이 넘는 각양각색의 내노라하는 최신지뢰들이다.



또 50미터마다 잠복호가 하나씩 있으며 여기에는 3명의 완전무장인원들이 잠복근무를 서고 있다. 밤에는 이들에게 결코 아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조건 적으로 치부하고 이들에게는 포로도 필요없다. 총탄을 날려 사살할 뿐이다.



그리고 악명 높은 만(萬) 고압선이 있다. 남한 국군이 설치한 콘크리트 장벽을 북한에서는 「분단의 장벽」이나 「민족을 두 동강낸 장벽」이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남한에서는 북한의 만 고압선을 보고 「통일의 원수」라고 한다. 휴전선 615리를 가로지른 북한군의 만 고압선. 보통 사람들은 220볼트의 전기를 맞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휴전선의 만 고압선은 흐르는 전압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 볼트의 고압선이다.



그것도 하나뿐이겠는가. 아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전기가 흐르고 있는 만 고압선과 6,000선, 3,000선, 2,000선 등 4개의 고압선이 철책처럼 우뚝 서있다. 만 고압선에 걸리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시커멓게 타고 만다. 2,000선에 걸리면 일단은 전기의 힘에 튀어나오지만 머리가 깨지던지, 몸의 약한 부위가 터져 죽고 만다. 그러니 3,000선과 6,000선은 더 말해 무엇하랴.



북한은 지금 전력이 부족해 수도인 평양에도 제대로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최전방은 아니다. 오래 전에 김정일의 명령으로 평양화력발전소와 직선으로 연결된 어마어마한 전류가 비무장지대로 흐르게 되었고, 그것이 고압선의 전원(電源)이 되고 있다. 그것들은 장애물이 되어 이 땅을 둘로 가르고 있는 데 톡톡한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탱크장애물이라는 것이 있는데 실지로는 귀순자나 간첩을 잡는 데 쓰고 있다. 깊이 5미터, 너비 4미터의 탱크장애물에는 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것을 통과하는 길목에는 복병이 있다.



이렇게 굵직한 것들 말고도 자질구레한 각종 차단물과 장애물이 비무장지대 전역에 널려 있다. 깊은 함정을 파고 거기에 창이며 대못 같은 것을 거꾸로 박아 놓기도 하고 돌벼락 지뢰나 전기충격을 가하는 장치 등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장애물들이 있다. 민경들이 다니는 길목에는 상대가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두었다.



또 2중 가시철책선과 격자철망이라고 하는 철책선이 있다. 철책선에는 10미터에 하나씩 감시등이 켜져 있어 감시병들이나 잠복병들이 쉽게 사물을 파악하게 한다. 비무장지대에는 잠복병, 감시병, 동원병들이 항상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북한군 2개의 초소[한 개의 초소에 약 50명의 인원이 있음]가 국군 한 개 초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초소에는 세퍼트 경비견[군견]들이 있으며 화상(畵像) 시스템으로 된 러시아제, 일본제 각종 탐지기들이 비무장지대를 샅샅이 훑고 있다.



명백한 것은 내가 위에 소개한 모든 장애물들이 한 점도 빼놓은 것 없이 고스란히 1지대 보병부대와 2지대 보병부대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화학병기가 10톤이나 분포되어 있다. 나아가 815훈련소, 425훈련소, 620훈련소, 806훈련소와 같은 기계화 포병부대들의 포신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북한의 평성과 간리 쪽에 배치되어 있는 일명 「주체포」라고 불리는 105mm 방사포와 122mm 방사포 7천500문을 비롯하여 전선지구에 배치된 1만여 대의 포들이 비무장지대와 휴전선 이남지역을 겨누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북한 민경들의 명단은 무력부[인민무력부.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나 작전국에 존재하지도 않겠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적[국군]의 포탄에 앞서 자기들[인민군]의 폭탄 때문에 재도 찾지 못할 거라고 장교들이 공공연히 떠든다. 이것은 사실이다. 과연 김정일이 호언장담할 만도 하다.



휴전선은 이처럼 무섭게 봉쇄되어 있다. 휴전선을 넘어오는 귀순자가 없는 원인이 바로 이러한 봉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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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DMZ의 봄 - 비무장지대 인민군 병사의 수기(手記)



발행일 : 2004년7월30일



출판사 : 시대정신



저자소개 : 주성일



1981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공군 장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자랐다.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시절 학교 소년단 위원장을 맡았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함흥고등중학교 비서를 맡기도 했다.



1997년 16살의 나이로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민경]에 입대하여 1998년 무전수, 헌병대 검열원, 1999년 사단장 연락병, 민경부대 보급창고장, 2001년 민경부대 고압선 책임자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1년 민경부대 대남방송국 방송조장을 하다가, 2002년2월19일 근무하던 북한군 초소의 건너편에 있는 한국측 도라산전망대를 통해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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