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나 예술로 밥벌이를 하던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자유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헤밍웨이, 고흐, 스테판 츠바이크,
버지니아 울프... 그들의 죽음은 핏빛 선명한
이미지를 그들 작품에 남겨놓고 떠났다.
죽음의 순간은 비슷하겠지만, 죽음의 이미지는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과 큰 차이가 있다.
생활고로, 성적 비관으로, 실직으로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더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절연한
외침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래서 더
파괴적이고 더 아픈 죽음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두고 많은 수식어를
덧붙인다. 그들처럼 죽지 않고 이 세상에
버티며 살아가는 이유와 변명을 찾기 위해,
죽음을 택한 이들과는 적어도 질적으로 다른
삶의 범주 속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 유리알 같은 간격을 벌려놓고 있다.
그러나, 그 간격이란 것이 30센티 자를
들이밀기도 비좁을 만큼 우리들에게도
삶의 지뢰는 여기저기서 터질 게 분명하다.
그 폭발은 삶 속에서 죽음을
감지하고, 결국 삶이 곧 죽음인 것을
확인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세상은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살은 나쁜 거고, 세상은 아직 살만하며,
자살을 어떤 방법으로든 예방해야
한다고 하지만, 세상의 논리로 자살자의
선택을 막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이렇게 살기 힘든 곳"이란 외침과
함께 온 몸을 던지는 그들에게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욕먹을 소리라는 건 안다)
자살자에 대한 세간의 무미건조하고도
무모한 분석은 이젠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의 죽음엔 활자화될 수 없는 수많은
실존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난 일요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란
프로그램의 경박함을 목격하면서,
그들의 죽음이 또한번 매스컴의 난도질에
오염되어가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죽음이 죽음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세상의
냉정함이 또하나의 절망으로 다가왔다.
더이상 자살자의 죽음을 심심풀이 화제거리로
삼지 말 것을, 그들 죽음에 신파적 분칠을
해대지 말 것을, 그리고 좀더 죽음에 좀더
침착해질 것을, 방송하는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한마디.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뿐이다.
잘 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 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죽는다"
(김열규,『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궁리, 2002, 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