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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을 뜯어먹는 김정일의 10年





■ 金日成(김일성)을 뜯어먹는 金正日(김정일)의 10年 總括(총괄)





● 金日成主席死後(김일성주석사후) 10年



「獨裁繼續(독재계속)」 許諾(허락)한 中·韓



向後(향후) 10年…日本의 役割(역할) 重要(중요)



産經新聞(산케이신문) 2004年7月8日 朝刊(조간)



[서울=黑田勝弘] 北朝鮮(북조선)의 金日成(김일성) 主席(주석)이 죽은 지 7月8日에 10年이 된다. 「金日成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일이 있다. 1990年代 初盤(초반), 서울 駐在(주재) 舊東歐圈(구동구권) 나라의 大使(대사)가 말하고 있었던 이야기다.



그는 金日成大學(김일성대학)에의 留學經驗(유학경험)과 平壤勤務(평양근무)의 經驗(경험)이 있어, 朝鮮語(조선어)[韓國語(한국어)]도 能熟(능숙)한 北朝鮮通(북조선통)이었다. 그는 『北朝鮮의 變化(변화)를 위해서는 生物學的(생물학적)인 解決方法(해결방법)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生物學的인 解決方法」이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外交官(외교관)답게 소프트(soft)하게 表現(표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數年後(수년후)인 1994年, 實際(실제)로 金日成은 죽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直面(직면)해, 筆者(필자)를 包含(포함)한 많은 北朝鮮 와처(watcher)들은, 그리고 아마 前述(전술)한 大使도, 北朝鮮에 「變化(변화)」를 豫想(예상)하며 期待(기대)했다. 그 變化에는 北朝鮮의 崩壞(붕괴), 즉 獨裁體制(독재체제)의 終末(종말)이라고 하는 것도 包含된다.



그때부터 10年. 그러나, 北朝鮮은 부서지지 않았다. 豫想하며 期待했던 것 같은 變化는 일어나지 않았다. 周知(주지)하는 바와 같이 金正日(김정일) 總書記(총서기)에 의해 獨裁體制는 維持(유지)되고 있다.



왜 豫想이나 期待는 빗나간 것인가. 理由(이유)는 分明(분명)하다. 周邊(주변)에서 부서지지 않게 支援(지원)했기 때문이다. 同盟國(동맹국)인 中國은 물론, 韓國, 美國, 日本… 모두 달라붙어 北朝鮮을 도와 金正日 體制(체제)를 떠받쳤던 것이다. 이것은 豫想外(예상외)의 展開(전개)였다. 獨裁體制의 崩壞 등 「變化」를 期待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確實(확실)히 「잃어버린 10年」이 되어 버렸다.



그 最大(최대)의 責任(책임)은 中國과 韓國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中國은 食糧(식량)·에너지를 비롯해, 最大의 支援國(지원국)이면서 北朝鮮을 開放(개방)·改革(개혁), 즉 「중국의 길」로 誘導(유도)할 수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核開發(핵개발)까지 放任(방임)[?]해, 지금에서야 「6개國 協議(협의)의 主宰者(주재자)」로서 苦生(고생)하고 있다. 이 中國의 責任은 嚴格(엄격)하게 追窮(추궁)받고 있다.



韓國의 責任도 크다. 아니, 같은 民族(민족)[!]으로서 이쪽의 責任이 클지도 모른다. 게다가, 國內問題(국내문제)에 있어서만 「民主化(민주화)」나 「人權(인권)」을 말해 온 사람들이 政權(정권)의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北朝鮮의 獨裁體制 批判(비판)이나 民主化, 人權問題(인권문제)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體制批判(체제비판) 등 『北을 刺戟(자극)할 것 같은 일은 해선 안된다』라고 한다. 그 代身(대신)에 食糧이나 肥料(비료) 등 物資(물자)는 물론, 經濟交流(경제교류)를 위해서 라며 巨額(거액)의 外貨(외화)까지 提供(제공)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것은 『北은 同胞(동포)』라며, 對立(대립)·敵對感情(적대감정)을 後退(후퇴)시킨 것이다.



지금 北朝鮮에게 있어 韓國은 物件(물건)·돈을 받을 수 있는 絶好(절호)의 「돈줄」이며 最大의 「安全保障裝置(안전보장장치)」로 되어 있다. 韓國 自體(자체)가 威脅(위협)이 되지 않고 있으며, 親北(친북)·反美感情(반미감정)에 의해 「美國의 威脅」으로부터도 北朝鮮을 지켜 주고 있다. 金正日은 反對(반대)로 韓國 쪽이 變化(변화)한 德分(덕분)에 安心(안심)하고 獨裁(독재)를 繼續(계속)할 수 있다.



北朝鮮에게 있어 더욱이 기쁜 것은, 韓國 社會(사회)에서는 北의 獨裁打倒(독재타도)나 體制批判을 하고 있는 亡命者(망명자)는 미움을 받으며, 金正日에 대한 個人批判(개인비판)이 터부(taboo)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最近(최근), 金正日의 서울 첫 訪問(방문)의 條件(조건)으로서 「雰圍氣(분위기) 만들기」를 注文(주문)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나와 있다[2004年7月7日字(자), 中央日報(중앙일보)]. 金正日에 대한 批判은 커녕「稱讚(칭찬)」의 움직임까지 公然化(공연화)할 수도 있다.



結局(결국), 左翼(좌익)이나 親北朝鮮勢力(친북선세력)을 解禁(해금)하며 「北의 威脅」을 否定(부정)한 韓國의 民主化가 「北의 獨裁」를 維持시킨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10年」은 韓國이 演出(연출)했다고 하는 것이 되지만, 다음의 10年은 어떠한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日本에 그 「責任」이 돌아올 것 같다.



日本[小泉純一郞(고이즈미 준이치로) 首相(수상)]은 北朝鮮과의 國交正常化(국교정상화)를 서두를 姿勢(자세)를 보이고 있다. 北朝鮮은 以前(이전)부터 그것을 期待(기대)하고 있다. 韓國이 1965年, 日本과의 國交正常化로 經濟發展(경제발전)의 基礎(기초)를 만든 것처럼, 北朝鮮도 40年 늦은 對日 國交正常化로 經濟再建(경제재건)·體制再建(체제재건)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核(핵)과 長距離(장거리) 미사일과 獨裁體制」를 그대로 둔 채 國交正常化를 進行(진행), 北朝鮮을 支援하는 것은 또다시 「잃어버린 10年」이 되어 버린다.



北朝鮮政策(북조선정책)의 實戰(실전)[本番(혼반)]을 맞이하는 日本은, 金正日이 이 10年 동안, 國際社會(국제사회)를 相對(상대)로 展開한 體制生存(체제생존)을 위한「弄奸(농간)」을 속속들이 알지 않으면 안된다. 韓國의 往年(왕년)의 對北 베테랑(veteran) 交涉者(교섭자)는 敎訓(교훈)으로서 一言(일언), 「땀 흘리는 쪽이 敗北(패배)」라고 하고 있다.



http://www.sankei.co.jp/databox/n_korea/index.html







● 金日成主席死亡10周年(김일성주석사망10주년)…繼續(계속)되는 獨裁(독재), 經濟危機(경제위기)



讀賣新聞(요미우리신문) 2004年7月8日 00:04



[서울=淺野好春, 福島恭二] 北朝鮮(북조선)의 金日成(김일성) 主席(주석)의 死亡(사망)으로부터 7月8日에 10年이 된다.



長男(장남)인 金正日(김정일·62) 總書記(총서기)는 죽은 아버지의 위광(威光)을 背景(배경)으로, 잇달아서 獨裁體制(독재제제)로 國內(국내)를 統治(통치), 對外的(대외적)으로는 核(핵)이나 미사일을 카드(card)로 한 恐喝外交(공갈외교)로 生存(생존)을 圖謀(도모)해 왔다. 그러나, 食糧(식량)·에너지 不足(부족) 등 經濟危機(경제위기)는 여전히 深刻(심각)하며, 自身(자신)의 後繼體制(후계체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 金日成의 遺訓(유훈)



朝鮮中央放送(조선중앙방송)은 7月4日, 金日成의 死後(사후) 10年에, 平壤(평양)의 金日成銅像(김일성동상)에는 合計(합계) 약 1億466萬명이 訪問(방문)했다고 傳(전)해, 金日成의 影響力(영향력)의 「健在(건재) 모습」을 다시한번 어필(appeal)했다. 勞動新聞(노동신문)도 7月7日字(자)의 論說(논설)에서, 金日成의 革命思想(혁명사상)이, 金正日에 의해 「永遠不滅(영원불멸)의 革命思想」으로서 빛나고 있다고 報道(보도)했다.



金日成의 死後, 金正日은 金日成의 수많은 가르침을 지키는 「遺訓統治(유훈통치)」를 繼續(계속)했다.



金日成은 死亡直前(사망직전), 訪北(방북)한 카터(Jimmy Carter) 前 美 大統領(대통령)과 會談(회담)해, 核問題解決(핵문제해결)에 길을 놓았다. 2年前에 核危機(핵위기)가 再燃(재연)되었지만, 美國과의 直接去來(직접거래)를 노리는 점에서는, 金正日은 遺訓을 踏襲(답습)하고 있다. 金日成은 韓國의 金永三(김영삼) 大統領과의 南北 首腦會談(수뇌회담)에도 合意(합의)하고 있었지만, 金正日은 2000年에 金大中(김대중) 大統領과 會談(회담)을 實現(실현)시켰다.



遺訓은 지금도, 金正日의 重要(중요)한 政治手段(정치수단)이다.



▶ 金正日 體制(체제)



金正日에게 있어 最大(최대)의 懸案(현안)은, 對美關係(대미관계)다. 民主黨(민주당)의 클린턴(William J. Clinton) 前 政權(정권)과는, 2000年10月에 敵對關係(적대관계)의 終結(종결)을 포함시킨 「美·北 共同(공동) 코뮤니케(communique)」의 發表(발표)까지 이드렀다.



그러나, 共和黨(공화당)의 부시(George W. Bush) 政權에게 「惡(악)의 樞軸(추축)」이라고 非難(비난)받아, 關係改善(관계개선)의 길은 멀어졌다. 金正日은 「軍事優先政治(군사우선정치)」를 내걸어, 軍 中心(중심)의 支配體制(지배체제)를 構築(구축)했다. 하지만, 食糧(식량)과 에너지의 慢性的(만성적)인 不足狀態(부족상태)는 改善(개선)되지 않아, 國際社會(국제사회)에 每年(매년), 支援(지원)을 부채질하고 있다. 새로운 價格制度(가격제도)의 導入(도입) 등 經濟改革(경제개혁)에 나섰지만, 큰 成果(성과)는 얻지 못하고 있다.



▶ 後繼問題(후계문제)



金正日의 後繼問題는 表面化(표면화)된 움직임이 없어, 明確(명확)하게는 모른다. 一般的(일반적)으로는, 金正日의 前妻(전처)인 成惠琳(성혜림)과의 長男(장남)인 金正男(김정남), 後妻(후처)인 高英姬(고영희)와의 사이의 正哲(정철), 正雲(정운) 兄弟(형제) 가운데, 어느쪽이든가 後繼者(후계자)로 指名(지명)된다고 豫測(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韓國에서는 이것에 懷疑的(회의적)인 見解(견해)도 뿌리깊다. 3명 모두 20,30代로 아직 젊은 데다가, 일찌기 金日成을 떠받친 「革命第1世代(혁명제1세대)」라고 불리는 古參幹部(고참간부)가 金正日에의 世襲(세습)을 强力(강력)하게 後援(후원)한 것 같은 狀況(상황)이 이번에는 期待(기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등이 根據(근거)다. 權力世襲(권력세습)의 再現(재현)이 없이, 軍幹部(군간부) 등에 의한 集團指導(집단지도) 등의 後繼體制가 出現(출현)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推測(추측)도 있다.



http://www.yomiuri.co.jp/world/news/20040707id23.htm





▶ [意見(의견)] 神經(신경)이 쓰이는 것은 軍部(군부)에 의한 集團指導體制(집단지도체제)의 可能性(가능성)이다. 나는 그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獨裁體制(독재체제)라고 하는 것은 絶對權力(절대권력)을 掌握(장악)해야 可能(가능)하게 된다.



集團的(집단적)인 指導體制(지도체제)에서는 北朝鮮(북조선)과 같은 洗腦國家(세뇌국가)는 成立(성립)되지 않는다. 獨裁者(독재자) 金正日(김정일)은 神(신)처럼 君臨(군림)하며, 敎育(교육)이나 매스컴(masscom)이라고 하는 社會制度(사회제도)도 獨裁者에게 絶對忠誠(절대충성)을 誓約(서약)하기 위해서 動員(동원)된다. 그 때문에 金正日조차도 카리스마(charisma)을 높이기 위해서, 아버지 金日城(김일성)의 神聖化(신성화)를 活用(활용)할 수밖에 方法(방법)이 없었다.



最近(최근), 美國이 北朝鮮에 柔軟(유연)한 對應(대응)을 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金正日을 認定(인정)한 것이 아니라, 金正日의 카리스마를 失墜(실추)시키기 위해서 행하고 있는 戰術(전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小泉純一郞(고이즈미 준이치로) 首相(수상)이 金正日에게 約束(약속)한 25萬 톤의 食糧支援(식량지원)에 대해서는, 當初(당초), 이것은 日本 國內産(국내산)의 備蓄米(비축미)를 보낸다고 하는 이야기가 報道(보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北朝鮮이 崩壞(붕괴)되었을 때에, 北朝鮮에 緊急支援(긴급지원)하기 위한 準備米(준비미)였다. 그렇게 韓國 政府(정부)와 論議(논의)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日本 政府는 支援食糧(지원식량)을 옥수수나 밀로 보내고, 北朝鮮이 希望(희망)하는 쌀은 海外産(해외산)을 사서 보내는 것 같다.







● 北朝鮮(북조선), 金正日(김정일) 體制(체제)가 10年의 轉機(전기)



外交實績(외교실적)만을 宣傳(선전)



每日新聞(마이니치신문) 2004年7月8日 20:53



[서울=堀山明子] 北朝鮮(북조선)의 金日成主席死亡10周年(김일성주석사망10주년)이 되는 7月8日, 平壤市內(평양시내)에서 5年만에 金正日(김정일) 總書記(총서기)가 參加(참가)하는 中央追悼大會(중앙추도대회)가 열렸다.



勞動新聞(노동신문)의 7月8日字(자) 社說(사설)은, 金正日 體制(체제)가 되고부터 10年을 「反美鬪爭(반미투쟁)의 歷史(역사)」라고 評價(평가)하는 한편, 2000年의 南北 首腦會談(수뇌회담)을 「民族(민족)의 決定的(결정적) 轉換(전환)」이라고 强調(강조).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김일성)의 遺訓(유훈)을 이은 「外交實績(외교실적)」만을 宣傳(선전)하며, 直面(직면)한 經濟難克服(경제난극복)에 대해서는 言及(언급)하지 않았다.



金正日에 이어서 넘버2(Number 2)인 金永南(김영남) 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長(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은 追悼大會의(추도대회) 인사말로, 『敵(적)이 굳이 戰爭(전쟁)의 불을 지른다면 侵略者(침략자)들을 無慈悲(무자비)하게 掃蕩(소탕)한다』라고, 美國을 示唆(시사)하며 對決姿勢(대결자세)를 强調.



金鎰喆(김일철) 人民武力相(인민무력상)도 『美帝(미제)는 6개國 協議(협의)의 뒤에서 侵略戰爭(침략전쟁)의 準備(준비)를 進行(진행)시키고 있다』라고 美國를 非難(비난)했다. 한편, 2명 모두 韓國에 대해서는 「民族共助(민족공조)」를 呼訴(호소)하며. 「反美」와「統一(통일)」을 2代 事業(사업)으로서 呼訴했다.



10年의 轉機(전기)에 幹部(간부)가 外交課題(외교과제)를 强調한 것은, 이 2개가, 金日成의 遺訓과 合致(합치)되며, 어느 정도의 成果(성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金日成은 死亡直前(사망직전), 1994年 核危機(핵위기)의 最終段階(최종단계)에서 카터(Jimmy Carter) 美 前 大統領(대통령)과 電擊的(전격적)으로 會談(회담)해, 輕水爐支援(경수로지원)을 擔保(담보)로 核凍結(핵동결)하는 美·北 프레임워크(framework) 合意(합의)의 길을 놓았다.



이 「갈림길 외교」를 繼承(계승)한 金正日은, 高濃縮(고농축) 우라늄(uranium)에 의한 새로운 核開發(핵개발)을 카드(card)로 使用(사용)하며, 6月의 第3回(제3회) 6개國 協議에서, 美·北 사이에 解決案(해결안)을 서로 들이대는 狀況(상황)까지 이르렀다. 2000年 南北 首腦會談과, 盧武鉉(노무현) 政權(정권)에서 進行하는 南北間(간)의 經濟協力(경제협력)은, 北朝鮮에 있어서는 遺訓을 發展(발전)시킨 代表例(대표예)다.



한편, 金正日이 獨自決斷(독자결단)으로 實踐실천)한 分野(분야)임에도 不拘(불구)하고, 「經濟(경제)」와 「日·北」은, 10周年(주년)을 轉機로 한 社說이나 幹部演說(간부연설)에서 話題(화제)가 되고 있지 않다.



金正日은 2002年7月, 配給制度(배급제도)의 原則廢止(원칙폐지)나 物價(물가)·賃金(임금)의 大幅引下(대폭인하) 라고 한 大規模(대규모) 經濟改革(경제개혁)을 始作(시작)했다. 그리고, 日·北 國交正常化(국교정상화) 後의 經濟支援獲得(경제지원획득)을 노려 2002年9月, 拉致事件(납치사건)을 스스로 告白(고백)하며 日·北 首腦會談도 實現(실현)시켰다. 그러나, 拉致問題에 反發(반발)하는 일본 世論(세론)[輿論(여론)]을 받아, 正常化交涉(정상화교섭)은 難航(난항). 믿었던 刺戟劑(자극제)를 잃어, 經濟改革은 軌道(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7月7日의 韓國輸出入銀行(한국수출입은행)의 報告(보고)에 의하면, 北朝鮮의 國民總所得(국민총소득)은 1994年의 212億 달러에 대해 2003年은 184億 달러로, 10年前의 水準(수준)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있다. 發電量(발전량)은 231億 kW(kilowatt)에서 196億 kW로 減少(감소), 肥料生産量(비료생산량)은 73.8萬 톤으로부터 41.6萬 톤으로 半減(반감)하고 있어, 10年의 總括(총괄)에서 經濟問題(경제문제)는 言及할 수 없는 것이 實情(실정)이다.



http://www.mainichi-msn.co.jp/kokusai/asia/news/20040709k0000m030093000c.html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