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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삼성이 아니었다면, 엘리엇이 아니었다면

[취재파일] 삼성이 아니었다면, 엘리엇이 아니었다면
삼성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 ‘합병=국익’이라는 황당한 논리의 등장. 초기에 설정한 ‘먹튀’ 프레임이 엘리엇의 사전준비에 의해 부정되자, 그들은 ‘국익’ 프레임으로 대체했다. 삼성물산의 합병 관련 홈페이지에 거대한 태극기 그림도 걸렸다. ‘삼성=대한민국’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아도 통하는 듯 보인다. 異意는 부각되지 못한다. ‘3세로의 부드러운 승계=국익’이라는 논리가 등장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2. ‘합병을 공정하게 하라’는 주장이 ‘해외 투기자본의 국내 기업 경영권 탈취 시도’로 치환된다. ‘합병을 공정하게 하라’는 엘리엇 주장의 이면에 이익 추구라는 헤지펀드의 속성이 숨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국내 기업 경영권 탈취 시도’로 치환되는 건 너무 심한 비약이다.

더구나 이런 공포 마케팅은 황금주,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 제도의 도입 필요성으로까지 진격한다. 삼성물산 스스로 홈페이지에서 차등의결권 도입을 주장할 정도다. 언론이 나서고 토론회가 열린다. 그런데 만일 국민연금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에 문제를 제기했다면? 국민연금이 ‘합병을 하더라도 공정하게 하라’고 주장했어도 ‘국민연금의 삼성 경영권 탈취 시도’라는 초유의 사태로 간주될 지 의문이다.

엘리엇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은 다음과 같다.

3. 삼성물산이 절반을 외부인으로 채운 거버넌스 위원회를 만든다. 삼성 계열사로는 처음이다. 주주 권익 보호 담당위원도 탄생한다. 영업이익의 0.5%를 사회공헌 기금으로 내겠단다. 그동안 여러 회사를 쪼개고 합치는 과정에서 거론된 적도 없는 조치다.

4. 삼성이 신문 1면에 ‘도와달라’는 광고를 싣는다. 100개 매체에 광고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물산 임직원들이 위임장을 받기 위해 몇 천 주, 몇 백 주 가진 주주까지 일일이 찾아다닌다. 삼성물산의 소액주주들로서는 이런 주주 대우가 낯설다. ‘평소에 그렇게 할 일이지’라는 비아냥이 소액주주 카페에도, 삼성물산 홈페이지에도 넘쳐난다.  

삼성과 엘리엇 때문에 새삼 확인하게 된 일들은 또 이렇다.

5. ‘삼성이 하면 뭔가 다르다’는 신화는 허구다. 삼성물산 홈페이지에서 묘사된 엘리엇은 아르헨티나를 재정 위기에 빠뜨리고 콩고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 지원금까지 빼 먹을 만큼 ‘독한’ 존재다. 그런 엘리엇이 2월4일 서신 교환을 통해, 또 4월9일 삼성물산 경영진과의 회의를 통해 현재와 같은 방식의 합병에 대해 분명히 경고했지만 삼성물산은 무시했다.

그런 엘리엇은 바로 13년 전 삼성전자 우선주를 놓고 분쟁을 벌여 삼성을 누른 적이 있는 존재다. ‘독한’ 존재가 덤벼오는데, 더구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3세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핵심적인 사안인데 삼성은 그렇게 허술했다. 물론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대처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양상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6. 헤지펀드도 감성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삼성 측의 애국심 마케팅이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엘리엇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상암경기장 앞에서 찍은 ‘붉은 악마’ 폴 싱어 회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7. 국민연금은 자신의 의결권이 주총의 결과를 뒤집지 않는 선에서만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판단을 맡긴다. 국민연금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는 SK와 SK C&C와의 합병안에 반대 의견을 냈고,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그렇게 행사됐다. 하지만 SK의 주총에서 합병안은 출석 주주 86.9%의 찬성으로 승인됐다. 국민연금은 자신의 SK 지분 7.19%가 합병안의 승인 여부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 존재감을 살려주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건은 다르다. 국민연금 지분이 주총 결과를 바꿀 수도 있다.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맡기지 않고, 자체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해 버린 이유다.

8. 대기업 집단의 결속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KCC는 선뜻 수천억 원을 들여 삼성의 백기사로 나선다. 상장사협의회는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한다. 시장에서 경쟁자로 보이는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의외로 빨리, 그리고 단단히 뭉친다.

9. 합당한 세금 없는 3세 승계는 역시 만만치 않다. 16억 원의 증여세만 내고 약 8조 원 안팎의 시장가치를 지닌 삼성전자 지분 4.06%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묘수(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악수)의 민낯이 드러났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조건은 법에 따른 것이라고 삼성은 주장한다. 

합법성을 내세우지만 과연 정당성까지 담보할 수 있을까? 20년 가까이 진행된 승계과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삼성은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가야할 길은 아직 머나 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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