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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형제와 제1적대국의 '악수'…북한이 투명인간 취급하는 쿠바?

이틀에 한 번이던 쿠바 보도 15일 이후로 끊겨…첫 반응 주목

[취재파일] 형제와 제1적대국의 '악수'…북한이 투명인간 취급하는 쿠바?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오직 국가 이익만이 존재할 뿐.

1848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 총리를 지낸 파머스턴 경이 남긴 말이다. 정책 결정자들이 아무리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다고 해도 결국 국익에 따라 운명이 갈릴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새삼 곱씹게 하는 경구다. 한국과 쿠바가 전격적으로 수교에 합의했다. 14일 밤 예고도 없이 날아든 수교 발표에 필자를 비롯해 적지 않은 기자들이 당혹했다. 물밑에서 움직임이 있는 줄은 감지하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갑작스럽게 성사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만큼 양국 간 기밀로, 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는 얘기다. 북한으로서는 형제의 나라에게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그 충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영원한 친구'란 유니콘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김정은과 북한의 고위 당국자들은 다시금 되새기고 있을까.

한국과의 수교 사실을 알리는 쿠바 외교부 홈페이지 메인 첫 화면 (사진=쿠바 외교부 홈페이지 캡처)

북한은 공식적으로 반응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드러난 사실만 보아도 쿠바 측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쿠바에 대한 기록이 등장해야 마땅한 상황에서조차 북한 관영매체가 쿠바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북한 노동신문이 쿠바에 관해 실은 기사는 모두 24건, 가장 마지막 기사는 한-쿠바 수교 소식이 전해진 바로 다음 날인 2월 15일 자, 미구엘 디아스 카넬 쿠바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에 대해 규탄 메시지를 냈다는 내용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나오던 쿠바 소식이 15일 기사를 끝으로 끊어진 것은 퍽 흥미로운 대목이다. 같은 날 실린 또 다른 기사에서 에두아르도 루이스 코리아 가르시아 주북 쿠바대사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노동신문은 김정일 생일 8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북한에 주재하는 외교단이 꽃바구니와 편지를 전달하는 행사가 열렸고, 또 외교단 대상 연회도 열렸다고 전했다. 주북 러시아대사관이 페이스북에 공개한 연회 사진을 보면 쿠바대사의 얼굴이 보인다. 참석했단 얘기다. 그런데 노동신문에는 러시아대사와 베트남대사, 시리아대사의 참석 사실이 언급되었을 뿐, 쿠바대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코로나19 이후 북한에 다시 들어가 활동하는 대사급 외교관이 손에 꼽히는 상황이니 의도적 누락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김정은

15일만 해도 우왕좌왕했던 것인지, 쿠바 대통령의 대외 메시지는 보도했는데 이후로는 아예 침묵하고 있다. 쿠바 대통령은 17일 김정일 생일을 기념하며 X(옛 트위터)에 김정일 사진을 올렸다. 그는 "북한 당과 정부, 고귀한 인민들에게 애정 어린 인사와 함께 그의 유산을 기억한다"며 "쿠바는 북한과의 우정, 연대 형제애의 역사적 관계를 재확인한다"고 적었다. 북한에 직접 축전을 보냈을 개연성도 있어 보이는데, 형제애에 금이 갔다고 본 것인지, 북한은 쿠바에 관해선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노동신문은 23일 북한의 재외공관에서 김정일 생일 행사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는데, 여기서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북한이 보도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쿠바에 언짢은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드러나지 않은, 북-쿠바 양자 간의 대화에서는 더 격한 반응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북한이 언제쯤 첫 반응을 내놓을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북한으로서는 형제의 나라가 '가장 위해로운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2월 8일 김정은의 국방성 연설)'과 손을 잡았다. 단순하게 사실을 전달하는 것조차도 북한으로서는 껄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어떤 수준의 표현이 나올지 관심인데, 북한이 뒤통수를 맞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90년에는 소련이 한국과 수교했고, 1992년에는 중국이 한국과 손을 맞잡았다. 북한은 당시 소련을 향해서 "돈에 의한 굴욕 외교"라고 비방했다. 한중 수교 당시에는 충격이 더 했던지 한 달쯤 지나서야 중국을 '배신자', '변절자'라고 저격했다. 쿠바는 북한이 중국과 소련만큼 의존하는 상대가 아니고, 당시와 달리 이미 남북의 외교력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는 점에서 90년대 상황과 지금이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으로선 쓰린 속을 부여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여정이 갑자기 일본에 손짓을 하는 담화를 내놓은 것은 영 생뚱맞았다. 기시다 총리의 방북을 이야기하면서 납치자와 북핵을 문제 삼지 말라고 하고, 입장을 내놓고서는 개인 의견이라고 하는 것이 북한의 체면용 담화라고 해야 할까.

한국과 쿠바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외교 관계를 맺기로 했지만 아직은 빈 스케치북이다. 영사관을 지을지, 대사관으로 직행할지 아직은 본격적인 협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쿠바와 빈 스케치북을 채워가야 하는데, 북한도 그 그림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기 위해 크레파스며 물감을 들고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다. 스케치북에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지기 위해서는 한국도 쿠바도 국가 이익을 중심에 둔 꼼꼼한 스케치가 필요하다.

북한,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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