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어쩌다] 지금은 '남의 연애' 전성시대

[어쩌다] 지금은 '남의 연애' 전성시대

정혜경 기자

작성 2022.01.23 07:40 수정 2022.01.23 07:47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어쩌다 뉴스

"난 현승이(<솔로지옥> 출연진 이름) 편이야" 직장인 여성 A씨는 한동안 동료들과 출근 인사를 어제 시청한 연애 예능 수다로 대신했다고 합니다. "프리지아가 뭘 어떻게 했다고?" 오늘도 눈 뜨면 누구나 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넷플릭스 연애 예능프로그램 <솔로지옥>이 종영 이후에도 연일 입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화제성 1위입니다.

해외 성적도 여전히 좋습니다. 전 세계 넷플릭스 회원들이 <솔로지옥>을 시청한 시간은 1천9백25만여 시간. <오징어게임>을 넘어섰습니다. 1월 현재 넷플릭스 비영어 TV콘텐츠 중에서 무려 전 세계 4위 성적입니다.

<솔로지옥>이 꼭 아니라도 지상파, 케이블은 물론 다종다양한 OTT에서 내놓은 연애 리얼리티는 무자비한 콘텐츠 시장에서도 단연 뛰어난 승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가까이는 <나는 솔로>, <환승연애>, <돌싱글즈>, <체인지데이즈>부터 몇 년을 거슬러 <하트시그널>까지.. 짤막한 클립이나 캡처로 떠도는 사진이라도 보신 분들 많으시죠?

이번 <어쩌다> 뉴스에선 연일 화제성 분야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연애 리얼리티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지를 다뤄봤습니다. 정작 '요즘 애들' 연애는 망해가고 있다는데 어쩌다 남의 연애는 이렇게 전성시대가 된 걸까요?

어쩌다뉴스

인기 요인을 따지기 전에 역사부터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200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ITV의 <Britain's Got Talent>와 미국 폭스TV의 <American Idol>을 시작으로 국내에도 각종 경연 프로그램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죠.

'연애'도 경연 프로그램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2002년부터 미국 지상파 방송인 ABC에서 방영을 시작한 <The Bachelor>는 미혼 남성 한 명을 상대로 25명 안팎의 미혼 여성이 경쟁을 벌여 낙점을 받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올해로 25번째 시즌을 거듭할 만큼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경연 프로그램 열풍이 본격적으로 일기 전, 일찍이 MBC의 <사랑의 스튜디오>가 있었습니다. 국내 연애 예능의 시조새 격인 이 프로그램은 1994년부터 장장 7년 간 방송됐습니다. 방송국 실내 스튜디오에서 결혼하고 싶은 일반인 청춘남녀들이 서서 서로를 향해 '작대기'를 날립니다. 실제로 프로그램에서 만난 남녀가 결혼에 성공하면서 더 화제가 되기도 했죠.

사실상 '커플 매칭 쇼'를 위한 무대인 스튜디오를 벗어나 연애 예능이 본격적인 '리얼리티'의 가능성을 보여준 건 2002년부터 방영된 KBS의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입니다. 남자 연예인과 일반인 여대생들(이긴 하지만 실제로 연예인 지망생이 대부분이었던 여성들)이 커플 탄생을 위해 서로를 향한 구애의 춤을 추고, 의미심장한 말을 툭툭 던집니다.

어쩌다 뉴스

연예계 등용문으로 많은 스타를 탄생시킨 <산장미팅> 이후 비슷한 포맷을 가진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멸을 거듭했습니다. 관찰 예능의 유행이 더해져, 연애로는 성에 차지 않는 시청자들을 위해 스타들을 섭외해 가상으로 결혼을 시켜버리는가 하면(<우리 결혼했어요>), 아예 연예계 진짜 커플 또는 부부를 등장시켜 그들의 삶을 (반쪽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 출현하기도 했죠.

어쩌다 뉴스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이 주연으로 등장해 연예 지면을 채우는 리얼리티 예능이 시대를 풍미하는 동안, 바야흐로 2011년. 최근 회자되고 있는 여러 일반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등장합니다. 두둥. 바로 연애 다큐라는 충격적인 포맷을 들고 나온 SBS의 '시사 교양프로그램' <짝>입니다.

이후 연애 리얼리티의 '트렌드'가 확 바뀌었습니다. 출연자들의 (연애 및 결혼에 대한) 절실함과 진정성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좌우하는 콘텐츠가 됐습니다. '실화'가 갖는 힘이 더 커진 겁니다. 단지 '뜨기 위해 출연하는' 연예인 지망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요소들이 프로그램을 아우르는 큰 컨셉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나는 솔로>에서는 가명을 원칙으로 하고, 사전 면접에서 결혼에 대한 절실함이 없는 지원자는 걸러냈다고도 하죠.

그렇다고 자연인으로서 출연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전시되는 건 아닙니다. '연애'라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정교하게 설계된 실험실이 제공됩니다. 그 공간이 '애정촌'이든, 한강이 보이는 멋진 '펜트하우스'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몰입하도록 의도된 상황 속에서 개별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선택에 영향을 끼친 말과 행동, 분위기와 공기는 어떤지 시청자는 지켜보게 됩니다.

어쩌다 뉴스

<환승연애>는 실제 헤어진 연인들을 섭외해 그 전에 없던 핍진성을 획득한 사례입니다. 2021년 티빙 유료가입자가 전년대비 256% 늘어나게 견인한 일등공신으로 꼽힙니다.

연애라는 보편적 감정으로 공감하기 쉬운 재료를 만들어 놓은 뒤, 도무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해 그 속에 갇힌 인물들을 바라보게 한 제작진의 영민함이 빛을 발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두고 "이게 정상인가요?"라고 소위 '공감 논쟁'을 벌이는 한편, 누군가는 자신의 지난 연애를 돌이키며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상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한 관계자 역시 '실험'이라는 단어를 언급합니다. "사회 실험 예능이라는 큰 틀에서 프로그램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청자들이 단순히 연애 감정을 대리충족하기 위한 용도로 시청했다기보다 특정 상황과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관찰하려는 욕망이 연애 리얼리티의 기본 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다 뉴스

인터뷰한 익명의 제작진들은 '이 시국' 요인도 최근 예능 시장에서 연애 리얼리티가 우후죽순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꼽았습니다. 감염으로부터 비교적 관리가 용이한 제한된 환경에서,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특징을 갖춘 일반인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관찰 예능. 누구나 적극적으로 자기 PR을 하는 요즘 시대엔 사연 있는 출연자를 섭외하는 일도 크게 어렵진 않다고 합니다.

'내가 했을 법한 연애', '나였을 사람들'은 공감의 문턱을 낮추는 좋은 마케팅 수단이 되지만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제공하는 일 역시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프로그램에 나온 카페'로 화제가 될 만한 촬영 장소를 찾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적당한 현실감을 제공하면서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연애'가 우습게 보여선 안 되니까요. 출연진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이 점차 '아련'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환상을 소비할 주 타깃 시청자들은 통상, 관계자 말에 따르면 "연애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는 20-30대" 특히 여성들입니다. 그러나 현실 삶에서의 연애는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25~29세 성인남녀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혼 싱글 중 78.1%는 지난 1년간 '새로운 이성을 만나거나 소개받은 경험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결혼이 더 하기 싫어졌다'고 답한 남성은 10.9%, 여성은 20.7%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미혼남녀 중 지난해 한 해간 연애를 하지 않은 이들이 41.8%로 나타났습니다.

미혼 청년들의 이성교제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도 하나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만 25세에서 39세 이하 미혼 남녀 3002명을 대상으로 2018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교제와 결혼을 위해 상대에게 기대하는 희망소득, 직업과 학력 등 이른바 '조건'들은 과거엔 남성들에게 더 유의하게 적용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추세입니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높을수록 결혼의향이나 이성교제확률이 감소하는 경향도 흥미롭습니다. 연구진은 "여성은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결혼은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본 연구 결과가 그 일부를 반영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현실의 나는 야근을 마치고 치솟는 집값을 걱정하며 씻지도 못한 채 쓰러져 잠들더라도, 매력을 두고 핑퐁 게임을 벌이는 '연애'는 여전히 가치 있고, 또 아름다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TV를, 태블릿PC를, 휴대전화를 켜고 리얼리티를 시청합니다. '연애 없는 연애 시대'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 참고자료
<코로나19 시기의 연애, 결혼, 출산 변동>, 최슬기‧계봉오,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인구학회 공동주최 인구포럼 코로나19 시기 인구 변동과 정책적 함의, 2021.
<미혼인구의 이성교제와 결혼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분석>, 조성호‧변수정, 2020.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의 포맷 서사 및 담론과 함축 의미>, 김동훈‧백선기, 2017.


** 이해하기 힘든 '요즘 것들'에 대한 당신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어쩌다> 뉴스에서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풀어드립니다. choice@sbs.co.kr




어쩌다 뉴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