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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마음이 지옥인 그대에게, 공지영이 전하는 글

[인-잇] 마음이 지옥인 그대에게, 공지영이 전하는 글

공지영 │ 작가.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저자

SBS 뉴스

작성 2020.10.29 11:00 수정 2020.10.29 11:5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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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벚꽃이 지고 있었다. 섬진강 백리길 벚꽃들이었다. 말이 없는 그녀 H에게 내가 말했다.

"잘 봐둬. 우리 생애 이걸 몇 번 더 볼지 아무도 몰라. 설사 오래오래 산다 해도 꽃이 이렇게 지는 건 1년에 단 하루뿐이야. 우리는 지금 엄청난 축복 속을 달리고 있는 거야."

그녀는 "그러네 언니" 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얼마간 안다고 할 수 있다. 열네 살 때 엄마가 가출하고 아버지마저 떠난 집에서 혼자 밥해서 자기 도시락 싸고 동생 밥 먹여가며 공부했다. 그녀는 외고를 거쳐 유수의 대학에 입학했고 곧바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이제 고생은 끝나는 게 맞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전 동생까지 독립시키고 이제 좀 편하게 살려던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남녀 간의 만남은 아니었다. 이제 얼마간 "먹고살게 된" 그녀가 대학 시절 자기 먹고사는 것이 바빠 돕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해고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참 착해서 내가 이뻐하는 H. 거기서 한 해고자 남자를 만났고 그의 아이들과 부인이 곧 나앉게 되었다는 말에, 그리고 처가에서 돈이 곧 나온다는 말에 모았던 돈을 다 빌려주었다. 너무 상투적인가. 그는 현재 사기죄로 감옥에 있다. 그녀는 심지어 빚을 받아내기 위해 그에게 조금 더 조금 더 빌려주는 바람에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언니 병원에 갔는데 나 우울증이 심하대. 이제 약을 먹어야 한대. 요새 계속 시간 맞춰 약 먹고 있어. 인생이, 인생이 너무 억울해."

뒷산에서 따온 두릅을 놓고 이웃집 뒷산에서 딴 가시오가피 순을 살짝 데쳐 들기름과 멸치액젓에 무친 것을 놓고 우리는 막걸리를 따랐다.

"회사에서—정말이지 하루에 13시간 넘게 휴일도 없이 일했는데—여자라고 승진에서 계속 밀리고 일도 못하는 것들이 승진했어. 게다가 얼마 전 한직으로 쫓겨나다시피 했어. 이젠 노골적으로 나가라는 분위기야. 너무 치사하고 더러워서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 인간이 사기치고 간 빚을 갚으려면 아직도 멀어서……."

H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언니 집 참 좋다. 나도 언니처럼 여기 와서 살고 싶지만."

"그래도 네겐 집이 있잖아."

"집?"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래 서울과 경기도가 접한 지역의 10평짜리 주공 아파트. 그것도 아빠가 대출 받아다 써서 거의 깡통이야. 대출이자 연체되었다고 은행에서 날 찾아왔기에 내가 조금씩 이자를 갚고 있어 언제 압류 당할지 모르는 집……."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뭐라 말을 하기가 어려웠고 애꿎게 막걸리를 따르다가 넘쳐버린 잔을 호들갑스레 닦았다. 강물은 오후가 되면서 쉴 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많은 윤슬이 반짝이며 강물 위에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공지영 섬진산책 관련 사진 공지영 섬진산책 관련 사진
나도 막걸리를 한잔 마셨다.

"H야 내가 전혀 다른 말을 해볼게."

H는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열네 살 소녀가 가장이 되어 부잣집 아이들 틈에서 과외 한 번 못 받고 제 손으로 밥해먹고 다녀도 기죽지 않았던 그녀였다. 회사에 취직해서 겨우 돈을 벌려고 할 때 난데없는 택시 강도를 당해 산속으로 끌려가서도 침착하게 눈을 감고 "아저씨, 열네 살 때부터 제 동생 밥해주던 소녀 가장이에요. 겨우 공부 마치고 좋은 데 취직한 지 이제 한 달 지났어요. 제가 여기서 죽으면 제 동생은 진짜 고아가 돼요. 아저씨, 가진 거 다 드릴테니 절 살려주세요. 저 계속 눈 감고 있잖아요. 신고도 안 할 거예요" 하고 위기를 벗어난 침착한 처녀였다.

그런데 이제 세월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랑 띠동갑인데 많이 상해 있어서 늙고 힘겨워 보였다. 우울증 걸릴 만했다. 억울할 만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가 아니라 나는 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그 말을.

"내가 열네 살 때였던 것 같아. 우리 엄마가 울고 있더라구. '엄마 왜 그래?' 물으니 '병원에 갔는데 본태성 고혈압이라고 하더라구. 이제 평생 약을 먹어야 한대. 내 나이 이제 마흔 좀 넘었는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니' 그래서 내가 그랬어. '엄마 세상에는 약도 쓸 수 없는 수많은 병이 있어. 그런데 엄마 병은 약이 있잖아. 그런데 왜 울어?' 엄마가 열네 살인 나를 놀란 듯이 쳐다보더니. '니 말을 들으니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지영아 평생 먹으래' 하고 다시 우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평생 먹으면 되잖아. 뭐가 문제지?' 그러자 엄마가 다시 물었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대.' '엄마 그 부작용 아직 없잖아. 부작용이 생기면 그때 생각하면 되지.' 그러자 엄마가 웃었어. '그러네……. 그러면 되네.' 나는 가끔 생각해. 나는 대체 어쩌자고 어린 것이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강물을 바라보며 멍해 있는 H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깔깔 웃었다. 나는 함께 웃다가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H야, 약 먹어. 약이 있다잖아."

"그러네, 정말 그러네 언니."

이번에 그녀의 '그러네'는 얼마간 진심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말했다. "너네 회사 좋은 회사야?"

H가 눈을 깜빡였다.

"너네 회사 얼마 전에 보니까 오너 가족들이 온갖 나쁜 짓 했더라. 그런 사람에게 충성할 필요가 있을까?"

후배가 갸우뚱하는 듯했다.

"그 사람들이 널 승진시켜 준다고 네 자긍심이 정말 충족될까? 그냥 다녀. 치사? 치사하지. 그러나 그 정도도 안 치사하게 무슨 돈을 벌겠니? 나가랄 때까지 있어. 일은 열심히 해 줘. 그러나 충성하지 마. 그 정도로 의미 있는 사람들 아니잖아!"

H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채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나를 신뢰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집 말이야. 그래 네 말대로 깡통이 되어버린 코딱지만 한 낡은 아파트. 그거 엄청 고마운 거 아니니? 만일 그거라도 없었으면 대체 어쩔 뻔했어."

"응 언니. 그거 엄마가 집 나가기 전에 시내 큰 빌딩에서 화장실 청소하며 모은 돈으로 마련하신 거야. 그건 정말 감사해."

"H야,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어느 날 내가 네게 H야, 언니에게 작은 아파트가 있는데 너 동생이랑 거기 와서 살래? 월세는 안 받을게. 대신 대출이 많아서 그거 네가 약간씩만 갚아주면 좋겠다. 30년 동안 이사 가라는 말은 안 할게, 이랬다면 어땠을까?"

H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자신할 수 있어. 그랬다면 너는 명절마다 내게 갈비를 사 가지고 왔을 거야. 감사하다면서. 그리고 내가 그 집을 도로 가져간 다음에도 내게 감사했을 거야, 네 성격에."

"그건 그래."

H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왜 아빠에게 감사하지 않니?"

잠시 눈동자를 깔고 생각에 잠겼다가 H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언니. 정말 그러네."

나는 그녀에게 막걸리를 따랐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섬진강으로부터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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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그녀가 말했다.

"신기했어.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데 모든 것이 바뀌었어."

내가 대답했다.

"살아보니까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어. 어차피 100퍼센트 좋은 일은 없어. 100퍼센트 좋기만 하다면 거짓일 확률이 많아. 모든 일에 있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마치 하루 동안 밤과 낮이 있듯 있는 거야. 하지만 결국엔 말이야 둘 다 나쁘지는 않아, 다만 생각을 조금 바꾸면 좋지."

그날 오후 나는 내 2층 침실,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내가 배치해놓은 욕조에 물을 받아주었다. 모차르트 CD를 틀어주고 욕조에 허브 입욕제를 띄워주었다. 하동산 녹차를 한 주전자 우려서 반신욕 탁자에 놓아주고 내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만큼 즐겨. 이 순간 언니가 하녀 너는 공주."

나는 다시 데크로 나와 혼자 모차르트를 들었다. 설사 우리 집을 방문해서 며칠을 붙어 있어야 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에게는 서로 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하루의 단 한 시간일지라도.
인잇 공지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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