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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바람 속의 먼지 같은 존재, 유시민

[그사람] 바람 속의 먼지 같은 존재, 유시민
1. 이 사람은 말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말이 주는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새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재주는 타고나는 것이다. <토지>를 다섯 번 읽고 <성경>을 열 번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 말에 막힘이 없고 빈구석이 없다. 찌를 때 날카롭고 막을 때 틈을 보이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에 쉼표가 거의 없다.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지 않고 어려운 단어는 쓰지 않는다. 거기에 잘 들리는 또렷한 목소리까지 갖췄다. 그러니 그의 말은 두 번 세 번 들을 필요가 없다. 한 번 들으면 그대로 이해가 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타고난 선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듣는 사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목소리가 명료한 것 이상으로 논리가 또렷하고 각이 선명하다. 모호하거나 둥글둥글한 구석이 없다. 거기에 장관과 국회의원으로 국정을 다룬 경륜이 더해지니 그를 능가하는 논객은 찾기 어렵다. 그가 진행한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 구독자는 1백만 명을 넘어섰다. 그럴 만했다. 괜히 수십만 명이 동시에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2000년 6월부터 1년 반가량 MBC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았다. 그의 나이 41살, 경력 이래야 국회의원 보좌관 1년, 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 6개월이 전부였다. 몇 권의 책을 내긴 했지만 지금 같은 작가는 아니었다. 그의 토론 프로그램 출연을 눈여겨 본 MBC 경영진의 결단이었다.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환경이 파격적 발탁을 가능하게 한 배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정치적 줄을 앞세워 그 자리를 꿰찬 것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런 파격은 불가능했다.

들을 줄 아는 귀도 가지고 있다. 토론회 때 보면 그는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 말이 되는 소리든 안 되는 소리든 귀 기울여 듣는다. 그가 분노에 더딘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분노에 자신을 맡기지도 않는다. 잘 들으니 상대방의 허점이 보일 테고 그래서 상대방을 찌를 때 예리하다.

말과 글이 따로 놀지 않는다. 그의 말을 옮겨 적으면 글이 되고, 글을 소리 내 읽으면 그의 말이 된다. 그의 말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지 않는다. 말 같지 않은 말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의 말은 보기 드물게 실체가 있다. 말과 행동이 같이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가볍지 않다. 그를 경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볼 일이다. 그의 말이 행동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문제가 되고 그의 말이 논란이 된다.

2.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 사건'**과 관련해 그의 이름이 수시로 거명되었다. 그의 이름이 강제 소환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뭔가 한마디쯤 할 법한데 그는 반응을 내지 않았다. 민감한 현안에 엮이고 싶지 않은 건가, 아니면 지금은 침묵을 유지할 때라고 판단한 건가? 그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 '검언유착 의혹 사건'이란 말보다는 '이동재 전 기자 강요 미수 사건'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이렇게 쓰기로 한다.

7월 22일 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당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연락 부탁한다는 취지였다. 답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도 필자의 문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는 세상에 대한 자발적 고립과 단절을 선언한 상태 아닌가. 당연히 답변이 없으려니 했는데 문자를 보내고 한 시간이 안 돼 핸드폰에 그의 이름이 떴다.

"뭐 하러 저에 대해 쓰려고 하세요. 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쓰는 사람 자유인데 저 자신이 저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저 자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건 완곡한 거절인가 싶었는데 일단 전화로 이야기하잔다. 인터뷰를 하겠다는 건가.

-자발적 고립을 택하셨는데…
" 고립은 아니고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죠. 꾸준히 제 의견을 말해온 건데 받아들여지는 맥락이 그렇지 않아서, 내 비평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책임질 수가 없어요. 내가 말을 하면 유시민이 저런 말을 했다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권의 스피커, 정권 실세의 발언인 양 받아들이고 이용하잖아요. 유튜브 통해 시민들이 참고할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하는 게 목적인데 제가 책임을 못 지잖아요. 책임 못 지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죠."

-그럼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생활하는 것은 똑같아요. 일주일에 한 번 노무현 재단에 나가 이사장으로서 일을 처리하고 나머지는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게 전부예요. 요즘은 유럽 도시 기행 관련 책 정리 작업을 주로 하고 있어요"

-'검언유착 의혹 사건'과 관련해 이름이 강제 소환되는 것에 대한 기분은?
"기분은 안 좋죠. 나는 한 일이 없는데 이름이 불려 나오는 것이니까. 그냥 보고 있는 거죠. 제 일은 아니니까요."

애매한 태도였다.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인터뷰 요청을 묵살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사양하는 이유를 설명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제대로 묻기만 했다면 그가 답을 피할 거 같지 않았는데 사실 그때는 묻는 사람이 무엇을 물어야 할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전화 인터뷰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통화를 마친 다음 날 그가 MBC 라디오에 출연할 것이라는 기사를 봤다. 아니 이게 뭔가 싶었다. 불과 하루 전 자기 일 아니니 그냥 지켜볼 뿐이라던 사람 아니던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던 사람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나 싶었다. MBC에 출연해서 그는 검언유착 의혹을 거듭 제기했고 윤석열 검찰총장 개입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모처럼의 방송 출연이었는데 크게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그렇게 예리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그가 왜 나왔나 싶었다. 그날 열리는 검찰 수사심의위에 영향을 주고 싶었던 건가. 그날은 그의 말발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수사심의위는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불기소와 수사 중단을 제안했다. 어쨌든 평론을 그만둔다고 했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엉덩이가 계속 들썩거렸던 모양이다.

3. 이 사람은 장관이었고 국회의원이었고 정당의 대표였다. 노무현 재단의 현직 이사장이기도 하다. 그러면 장관님, 의원님이라고 불릴 법한데 자신을 작가라고 불러 달란다. 삶의 미니멀리즘을 제대로 구현하고 사는 사람이다. 장관이란 직함과 국회의원 경력은 실제 삶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경력이 있다고 존경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구차해지기 십상이다. 유시민은 그런 경력을 깔끔히 덜어내고 산다. 재활용할 생각도 전혀 없는 듯하다. 그런 거 다 빼고 작가라는 두 글자 직업인으로 산다. 현명하고 영악하다.

어용이라는 말은 수치와 모멸의 뜻을 담고 있었다. 어용 교수, 어용 지식인, 어용 기자라고 불릴 때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스스로를 어용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감히 장담컨대 없었다. 유시민 이전에는 말이다. 그가 스스로를 어용 지식인이라고 부를 때 그 말은 수치나 모멸의 단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당한 자부심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렇게 말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안다.

스스로 지식 소매상이란다. 자기는 지식을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지식을 다량으로 거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다루는 상품이 고품질도 아니란다. 나는 이렇게 조그만 가게 운영하면서 겨우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니 내게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다. 지식의 창조자나 지식의 도매상이 아니라 지식의 소매상이기에 누릴 수 있는 무책임의 자유, 아마추어의 자유를 그는 만끽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상점으로 달려가 그의 상품을 구입한다. 그의 상품을 마치 명품 다루듯 다룬다.

4. 2013년 정치권을 떠날 때 그는 만신창이였다. 2002년 개혁당 창당으로 시작된 그의 정치 인생 10년은 짧은 성공과 긴 패배의 시간이었다. 국회의원, 장관을 지내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들마저 불행한 시절로 기억할 정도다. 선거에서 세 번이나 실패했고 그가 추구한 정당 개혁은 모양 사납게 좌초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타계, 그다음 해 경기도 지사 낙선, 2012년 통진당 사태를 겪으면서 그는 피폐해졌다. 계속 정치권에 있겠다고 해도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어찌 보면 그는 정치권을 자의로 떠난 것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추방당했다.


"정치적 좌절과 공격으로 시민이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옆에서 지켜보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친한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에게 한 번 심리 상담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혜신 박사를 만났습니까?) 그런 걸로 압니다. 누군들 상처가 없겠습니까마는 굉장히 아프게 5~6년을 보낸 거 같아요. 조금씩 극복해서 지금은 그때보다는 많이 극복한 거죠." <유시춘 EBS 이사장, 유시민 누나>

좌절의 시간을 그는 허비하지 않았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살아온 삶과 내면을 들여다봤다. 지난 55년의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감추거나 꾸미는 습관도 버리기로 했다. 그런 사색과 다짐의 기록이 2013년에 나온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내게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떳떳하게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살고 싶다." <어떻게 살 것인가> 中

2013년 이후 유시민은 그의 말처럼 살았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다. 때만 되면 그를 부르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쿨하게 거절했다. 대권후보로 거론될 때는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책을 펴내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해서 지식 엔터테이너라는 새로운 말까지 만들어냈다. 그의 얼굴이 편했고 보는 사람들은 즐거웠다. 유시민이 말을 하면 쟁점이 분명해졌고 그의 대안은 설득력이 있었다. 한 발 떨어져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나 보다. 훈수꾼의 자리가 그에겐 제격이었고 그 일을 그는 즐겼다.

2013년 이후 그의 모습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도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고, 우리 편이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유시민의 모습은 진보의 유연성을 보여줬다. 그때 그는 진보의 희망이었다.

6. 그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조국 대전에 끼어든 것은 아니다. 조국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수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단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찰 권력의 횡포를 그는 두고 볼 수 없었다. 2017년 대선에서도 특정 캠프에 속하기를 거부했던 그가 조국 지킴이로 나섰다.

"집안 어르신들이 전화해서 지금까지 얻은 점수 한꺼번에 다 까먹는다고, 뭐 하러 조국을 옹호하느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조국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일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거라고 설명 드리면, 마 그만둬라…너도 똑같다 그러시곤 했죠" <유시춘 EBS 이사장, 유시민 누나>

진보라고 쓰면 정의라고 읽던 시절이 있었다. 조국 사태를 통해 진보라고 쓰고 위선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었지만 진보를 정의로 여기던 사람들 안에서 더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진보의 핵분열이 일어난 셈인데 유시민과 진중권의 대결이 단적인 예이다.

그가 나서 조국 대전은 더욱 뜨거워졌고 싸움이 더 볼만해진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가 원래 참전하려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가 나서 조국을 살렸는가?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조국은 지금보다 더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아니면 그의 참전으로 진보의 대의가 한층 더 선명해졌는가?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싸움꾼이다. 그의 동지이자 누나인 유시춘은 그가 절대로 싸움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만한 싸움꾼 찾기 쉽지 않다. 그가 백전백승 전적의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패전의 기록이 더 많다. 패배한 싸움을 통해서 그는 패배는 수치이자 죽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 그것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치열하고 비정하고 때로 비겁하다. 싸울 때는 이겨야 된다는 것, 싸움에 약속 대련 따위는 없다는 것, 영광스러운 패배 같은 말은 개나 줘버려야 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벨트 라인 아래도 가격하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찌르기도 한다.

조국 사태에서 그는 싸움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기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다. 고결한 단어로 상대방의 입장까지 배려하던 정치 평론가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탁월한 전략가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지만 무책임한 선동가의 모습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국 전쟁에서 그가 행복했을 리 없다. 원하지 않는 전쟁에 의무감으로 참전한 그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와 촛불 정국에서 그랬듯 조국 사태에서도 지향은 뚜렷하되 진영에 속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가. 유시민이라면 그런 공간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었던 거 아닌가. 그랬다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진보는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들으면 유시민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나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 마세요. 왜 내가 당신들의 그런 기대까지 만족시켜야 돼요. 도대체 당신들이 나에 대해서 알면 뭘 안다고.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생각이 전혀 없어요. 나는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테니 당신들이나 잘하세요. 지금의 내가 유시민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요."

7. 그가 자주 어울리는 사람 가운데 김어준이 있다. 2000년대 이후 두 사람의 동선은 자주 겹치고 교집합을 이룬다. 결이 확실히 다른데 묘하게 어울린다.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한다.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은 명분과 이익의 공유인데 어떨 때는 서로 만나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는 것만으로 만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김어준을 만나면 유시민이 발랄 유쾌해진다. 유시민의 인터뷰 가운데 최고의 인터뷰는 2005년 김어준과 가진 딴지일보 인터뷰다. 답변하는 사람의 허를 찌르고 답변자도 모르는 답변자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데 김어준은 발군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그의 인터뷰 실력만큼은 최고다. 유시민을 만나 김어준의 재주는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그가 유시민에게 좋은 친구인지는 의문이다. 유시민의 가벼운 이미지가 김어준을 만나면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김어준을 만났을 때와 손석희를 만났을 때를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유시민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가끔 김어준을 본다는데 유시민의 본디 기질이 손석희보다는 김어준과의 만남을 더 좋아하는 쪽인지도 모르겠다.

진중권 유시민

진중권은 그에게 이복동생 같은 존재다. 핏줄을 나누었고 집안 행사에서 얼굴을 맞대기도 하고 때로는 밥도 같이 먹고 하는 데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이들의 또 다른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조국 전 법무장관의 진퇴를 두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내재되었던 갈등이 조국 사태라는 도화선을 만나 밖으로 터진 것이다.

올 1월 JTBC 신년토론회에서 진중권의 행동은 거의 난동 수준이었다. 유시민과 그와의 신뢰는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산산조각이 난 믿음의 유리 조각을 피 흐르는 손으로 움켜쥐고 진중권은 유시민을 거칠게 공격했다. 냉정을 잃은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고 핵심을 찌르지 못했다. 우리가 알던 논객 진중권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논리가 아니라 절규처럼 들렸다. 진중권에게 유시민은 음모와 거짓으로 대중을 기만하고 자신의 진영 이익을 보호하려는 선동가였고 지식인이 보일 수 있는 최악의 타락을 보인 자였다.

그런 진중권을 바라보는 유시민의 눈빛을 해석하기 쉽지 않다. 적개심의 눈빛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애처로움과 미안함, 안쓰러움이 뒤섞인 듯했는데 이 부분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토론이 끝난 뒤 유시민은 알릴레오에서 진중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두 사람이 가족을 포함해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이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 조국 사태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견해가 다를 뿐이다, 진중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인물이고 나는 진중권의 그런 기질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이 살다 보면 의견이 달라 헤어질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상대방을 최대한 존중하며 작별해야 하고, 지금이 그때다. 나 역시 망상과 확증 편향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진중권도 자기 생각과 감정에 대해 거리를 두고 조용히 성찰해 보기 바란다."

유시민이라고 자신에게 온갖 험악한 말을 배설하듯 쏟아내는 진중권에게 분노와 적의가 없을 리 없었다. 대거리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을 텐데 그는 애써 자신을 달래고 달래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시민의 이 말이 진중권을 두 번 죽이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지만 그리 볼 일은 아니다. 안간힘을 쓰며 자신과 진중권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는 진중권의 모습에서 어느 한때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8. 탐욕스럽지 않고 고집스럽지 않고 아둔하지 않다.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이유다. 사람을 챙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명절이면 후배, 지인들에게 선물 상자 보내는 인정도 있다. 뭐 하러 이런 거 보내냐고 하면 '나 요즘 돈 벌잖아'라며 멋쩍게 웃는 사람이다. 인생 좌우명이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 인데 그래서 그런지 엉뚱한 지시로 공무원들이 헛힘 쓰는 일이 없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역대 명장관을 꼽을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장관 쓰라고 나오는 판공비를 비서들이 쓰게 한 사람이다. 탐욕스럽지 않다는 증거다.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득하게 기다릴 줄 모른다. 판단이 빠르고 행동 역시 잽싸다. 굳이 많은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 천재 특유의 경박함이 있다. 판단이 너무 빨라 따라오는 사람이 놓치기 일쑤다. 그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거의 없는 것은 그가 따라올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금수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역사 교사셨으니 궁핍한 기억이 없고 공부 잘했으니 그것 때문에 차별받고 설움 받은 적이 없지요. 큰 좌절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엘리트가 갖기 쉬운 자기 확신이 너무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요. 1등만 하는 모범생이 성적 안 좋은 아이를 보면서 왜 쟤는 공부를 못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듯할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시민이가 좀 바뀌었어요. 책 쓰고 썰전 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유시춘 EBS 이사장, 유시민 누나>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지만 남에게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다. 자기편에게, 적어도 자기를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오래간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 여당 의원들이 맹렬히 반대했다. 심지어 그를 보좌관으로 두고 일했던 이해찬 총리도 반대했다. 그 때의 아픔을 그는 잊지 못했다.

올해 총선에서 그의 180석 발언이 아니었다면 부산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아깝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민주당에서 나왔다. 유시민은 이 말에 깊이 상처를 입었다. 적이 아니라 아군에게 다시 칼을 맞는 심정이었다. 그가 정치 평론을 그만두겠다고 한 직접적인 이유다.

그는 경제학도지만 역사를 더 좋아한다. 그가 쓴 책을 보면 경제학 보다 역사 관련 책이 더 많다.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고 비틀어 본다. 좁게도 보고 넓게도 보고 때로는 흔들어도 본다. 역사적 소재를 구부리고 펴고 늘리는 게 자유자재다. 큰 주제는 크게, 작은 소재는 극사실화로 그려 낸다. 말 그대로 능소능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 사람의 취미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다 보니 공룡 뼛조각 하나로 공룡을 열 마리쯤 그려내기도 한다. 천재가 아니면 절대 이런 솜씨 발휘하지 못하는데 뼛조각 하나로 열 마리의 공룡을 창작해내는 것이야 천재의 자유지만 문제는 천재의 그 상상력을 철석같이 믿는, 그가 그린 상상의 공룡이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믿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유시민

9. 그가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고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가 정치 평론을 하지 않는다고 정치가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박원순 시장 논란에 대해 유시민이라면 뭐라고 할지 조금 궁금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상황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지나고 보니 유시민은 핵심 변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유시민 없는 세상은 재미없다. 그가 자발적 고립을 택한 지 불과 100여 일도 안 됐는데 그가 없는 세상은 재미없다. 진중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널까지 뛴다. 진중권 세상인 듯 보이나 진중권의 독무대를 보는 게 이제 좀 지루하다. 아니 안쓰럽다.

이 눈 큰 남자가 오래 침묵을 지킬 거 같지는 않다. 산사에 처박혀 고독을 즐길 스타일도 아니고 계속 침묵을 지키기엔 그를 기다리는 그의 팬들이 너무 많기도 하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이다. 돌아오면 신선함이야 예전보다 떨어지겠지만 그는 자신의 영역과 무대를 금방 확보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차지할 영역의 크기와 그가 서는 무대의 성격일 텐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2013년 그의 책에서 찾아보자.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에필로그는 유시민의 유언장 같은 글이다. 일부러 소리를 내 읽어봐도 좋을 만큼 잘 쓴 글이다. 이 글에서 유시민은 사전(死前)장례식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죽기 전에 의식이 있고 어느 정도 건강할 때 가족, 친척, 친구, 지인들을 불러 추억과 사랑과 용서를 나누는 장례식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파티의 초청 대상자, 장소는 물론 여기에 사용될 음식과 술까지 세세하게 언급한 것을 보면 꽤 진지하게 사전 장례식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파티에서 연주할 음악도 다 정해 두었다. 그가 평소 자주 듣거나 좋아하는 음악일 텐데 그중에 <Dust in the wind>라는 노래가 있다.

"잠시 동안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립니다.
내 모든 꿈이 눈앞에서 지나가 버립니다.
호기심도 바람 속의 먼지, 모든 것이 바람에 날리는 먼지입니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자신 역시 바람 속의 먼지 같은 존재,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그는 늘 의식하며 사는 모양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더 행복하고 싶은 거다. 아직 62살, 나이를 이유로 들어 뒷방 늙은이 행세하긴 이른 나이다. 행복해지고 싶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은 그에게 절규 같은 말이다.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그에겐 절규인데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 같다. 침묵만 빼고 말이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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