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무라카미 하루키, '코로나'에 대해 말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질의응답…하루키가 본 '코로나 시대'는?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20.05.25 11:1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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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FM '무라카미 라디오' 홈페이지 캡처
지난 22일,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이하 하루키)가 라디오 방송국인 '도쿄FM'에서 PD와 DJ를 맡아 진행하는 '무라카미 라디오'가 14번째로 방송됐습니다. 원래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1시간 길이로 편성돼 온 프로그램인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1시간이 연장된 2시간으로 특별 편성됐습니다. 이번 방송의 제목은 <무라카미 라디오 '스테이 홈(stay home) 스페셜 : 밝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음악>이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코로나19 사태로 한 달 넘게 '긴급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특히 도쿄 등 수도권의)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하루키가 직접 고른 음악-대개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을 틀고, 중간중간에는 사전에 청취자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됐습니다.

하루키는 방송 앞부분에 '질척질척 정체돼 있는 코로나의 우울한 기분을 음악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이 방송은 (평소처럼) 도쿄FM의 스튜디오가 아니라 우리 집의 서재에서 전해드리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도쿄FM의 '무라카미 라디오' 홈페이지(링크 : https://www.tfm.co.jp/murakamiradio/)에는 턴테이블과 앰프, 방송용 마이크 스탠드와 함께 LP가 배경에 진열된 그 '서재'의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도쿄FM '무라카미 라디오' 홈페이지 캡처

 

"지금 이런 상황에, 여러분 각자가 이런저런 변칙적이고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괴롭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분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내고,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음악을 나름대로 선곡했습니다. 음악은 제가 평소에 쓰는 플레이어로 틀겠습니다. 그래서 평소와는 소리가 조금 다를 수도 있겠네요. 어서 오세요, 저의 서재에."


널리 알려진 대로 올드 팝과 재즈의 오랜 팬인 하루키는 시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본인이 선곡한 곡을 이어 나갑니다. 취재파일 독자들께 직접 들려드릴 수 없어서 아쉽지만, 몇 곡의 제목을 알려드리면 이렇습니다. 대개 이런 분위기의 음악들입니다.

Look for the silver lining (The Modern Folk Quartet)
Waitin' on a sunny day (Bruce Springsteen)
Here Comes the Sun (Nina Simone)
You've Got A Friend (Carole King)
Sun Is Shining (Bob Marley & The Wailers)
My Favorite Things Featuring Kathleen Battle (Al Jarreau)
Put on a Happy Face (Tony Bennett)
Over the Rainbow (Fred Lowery)

Al Jarreau의 곡을 소개한 뒤 하루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에게도 여러가지 좋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미스테리, 겨울에 먹는 볶음우동, 고양이의 발바닥, 새로운 조깅 슈즈, 콘서트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객실 내의 조명이 몇 초간 꺼지던 시절의 지하철 긴자선 등등… 여러분은 어떤 것을 좋아하시나요? 좋아하는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놓고, 세상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보시죠."

사실 이 방송의 백미는 하루키가 '코로나 외출 자제 특집 방송'을 한다는 예고가 나온 뒤에 방송국이 받은 청취자들의 사연입니다. 각각의 사연을 하루키가 골라서 소개한 뒤 본인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코너가 음악 사이사이에 배치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뒤늦게 코로나가 확산돼 도쿄와 주변 3개 현(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그리고 홋카이도에는 오늘(24일)까지 50일 가까이 이른바 '긴급사태'가 발령돼 있고, 이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들이 주민들에게는 '외출 자제'를, 식당과 술집을 비롯해 많은 영업장에는 '휴업'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봄의 벚꽃놀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이 시기에 일본인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숙, 자제'의 시기를 맞이한 셈입니다. 전례없이 답답한 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일본인들, 특히 하루키의 팬들이 그에게 어떤 사연을 보냈는지, 또 여기에 하루키는 어떤 대답을 했을지 살펴봤습니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40대 여성) 감염 확대 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늘 '스스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과 관계 없이요. 사람과 물건, 취미 같은 '모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무라카미 씨는 어떻습니까?

=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생활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요. 커다란 변화부터 작은 변화까지요. 저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꽤 힘이 드니까, 작은 변화를 말씀드릴게요. 저는 요즘 왜인지, 만년필과 잉크를 써서 글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벌써 20년 정도 쓰지 않았던 만년필을 서랍 속에서 끄집어 내서, 새로 산 잉크를 넣어 글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왠지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 글자라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이런 아련한 기분이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런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변화'를, '리스트 업'해 보시면 어떨까요. 어쩌면 그렇게 해서 '커다란 변화'가 점점 눈에 보이게 될 지도 모릅니다.

(도너츠 가게의 점장을 하고 있다는 50대 남성) 휴업 요청 때문에 2주 동안 쇼핑센터 안에 있는 도너츠 가게의 문을 닫았습니다. (도너츠가) 불요불급하냐고 하면, 그다지 먹지 않아도 자숙생활에 지장은 없는 것이죠. 도너츠의 구멍 만이라도 진열장에 줄을 세운다면, 재미있는 '무無'의 진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시간은 단축했지만 영업을 재개해서, 일이 끝나면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저만의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입니다.

= 도너츠라면,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도너츠 자체도 물론 멋지지만, '도너츠의 구멍'이라는 무無의 비유도 사회에 없어서는 안됩니다. 도너츠는 여러가지 의미로 세계를 위로합니다. 힘을 내서 도너츠를 계속 만들어 주세요. 저는 언제나 도너츠 가게의 편입니다.

(자영업을 하는 60대 여성) 코로나 소동이 일어난 이후, 잘 만들어진 SF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디선가 '포인트'가 전환되어 버린 것일까요? 최근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가 '집 안을 작은 아이들이 달리고 있다'든가, '작은 사람들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동안은 그다지 상대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저도 혹시 어머니가 '리틀 피플'을 말씀하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는 변하려고 하는 걸까요?

= 아, '리틀 피플' 말씀이시군요. 이제 나오고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꽤나 무서운 얘기입니다. 아마 어머님께서는 세계의 변모를 미묘하게나마 먼저 느끼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소설가가 하고 있는 것도 대개 그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상황의 변화에 맞춰,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때로는 그들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을 재빨리 발견해서 그걸 문장으로 만들고, 이야기로 만드는 것. 그런 것이 소설가의 커다란 임무입니다. 어머님께는 안부를 전해 주세요.

(50대 여성, 나나호코 씨) 조깅을 할 때 마스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루키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달리면 꽤 힘들잖아요?

= 저는 대체로 매일 빼놓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만, 가나가와 현의 꽤 한적한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달릴 때 누군가와 스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도쿄 도심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달릴 때에는 기본적으로 마스크는 쓰지 않습니다. 마스크를 하고 달리면 꽤나 숨쉬기가 힘들 것 같네요. 중국에서는 마스크를 하고 운동을 해서 몇 명인가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뭐가 어찌됐든, 하루 빨리 마스크 따위 쓰지 않고 기분좋게 달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네요. 수영장에도 가고 싶고요.


질문을 보낸 청취자들도 하루키의 팬 답게 그동안 하루키가 쓴 작품 속의 표현과 '창작물'을 소재로 나눈 문답이 있는가 하면, 조금은 더 진지하게 '코로나 시대'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 1995년 '옴 진리교 사건' 이후 때때로 사회 참여를 염두에 둔 활동을 해온 하루키에게 '코로나 이후의 하루키'를 묻는 질문도 나옵니다.
 

(30대 여성) '애프터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라는 표현을 종종 봅니다. '세계의 시스템이 변해 버려서,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든가, '이 변화의 파도에 올라타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무라카미 씨는 '애프터 코로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음, 지금 이 시기를 사는 것만으로도 큰일인데 '애프터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라고 하면 갑자기 뭘 알 수 있을까요. 그래도 제가 잠깐 생각한 것은, 지금의 이 '자숙기간'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떤 종류의 커다란 '사회적 실험' 같은 것이 전세계적 규모로 실행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실험의 성과는 지금부터 사회 전체에 아주 조금씩 퍼져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좋든 나쁘든 말이죠. 지금까지의 생활을 다시 한 번 재검토한다는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반대로 무서운 건, 이런저런 의미로 사람들이 폐쇄적이 되어버리는 일이겠죠. 나만 좋으면 된다는 느낌으로요. 좀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면, 앞으로 '글로벌리즘'이 후퇴해서 자기 나라나 지역에만 틀어박힌다든가 하는 겁니다. 그런 건 좀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50대 여성) 지금까지 하루키 씨는 옴 진리교 사건이나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뒤에, 관련된 작품을 발표해 오셨죠. 우리들의 생명관이나 가치관을 바꿔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뒤 하루키 씨의 작품을 읽고 큰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코로나로 고생하는 우리들을 위해 무언가 써 주세요.

= 뭔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설가에게는 몇 가지의 대처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을 직접 취재해서 이야기를 쓴다'고 하는 방법도 물론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옴 진리교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언더그라운드]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 육성을 모은 것인데, 픽션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야기적인 성질'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그것을 전환해 나가는 쪽에 오히려 흥미를 느낍니다. 그런 '이동 작업'이라고 할까 '전환 작업'에서야말로 소설이라고 하는 존재의 특성이 발휘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가 어떤 형태로 앞으로 저의 작품에 반영될지는 스스로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될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런 공기를 마시고, 또 내뱉고 있는 한은요.


하루키가 마지막으로 소개한 질문은 '오사카의 야마나카 신야'가 보낸 겁니다. 아시다시피, 야마나카 씨는 iPS 세포 연구로 2012년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대표적인 과학자죠. 야마나카 교수는 '일생일대의 부탁'이라며 하루키에게 '라디오 네임(청취자 별명)'을 지어달라고 했고, 하루키는 노벨상 수상자가 그런 걸로 '일생일대'를 걸지 말아달라고 하면서도 'AB형의 이세에비(일본 새우)'라는 별명을 지어서 선사(?)합니다. 하루키는 청취자의 마지막 질문을 야마나카 교수의 어찌보면 '시덥지 않은' 내용에 할애하고, 흐름상 피식 웃음이 나오는 답변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야마나카 신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교토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야마나카 교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본인의 블로그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응에 상당히 민감하고, 날카롭게 비판해 온 사람입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지명도'를 확실하게 활용한 셈인데요,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주최한 아베 총리와 네티즌의 '대담'에 출연해 일본 정부의 좌충우돌 코로나 대응과 아베 총리의 근거 없는 '이상론'을 공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본인 말대로 하루키가 아직은 코로나 사태를 스스로 어떻게 작품에 반영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태를 보는 시각이 어느 쪽인지는 프로그램 마지막 야마나카 교수의 '질문 소개'로 사실상 '밝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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