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n번방 사건' 한국 법은 누.구.를.위.해. 존재합니까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SBS 뉴스

작성 2020.03.25 11:00 수정 2020.03.25 11:1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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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저 그런 날이었습니다. 약간 즐거웠고 약간 짜증도 났던, 지극히 기억에 남지 않을 그야말로 보통날이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기 전까지 말이지요.
 
저녁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 뉴스를 접했습니다. 마지막 내용까지 읽어 내려갔을 즈음, 저 안쪽 오장육부에서부터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n번방 사건' 이야기입니다.
 
상담이 직업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이상은 성범죄의 피해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나면 다른 내용으로 찾아온 내담자를 만난 날 보다 갑절은 힘이 듭니다. 어떤 트라우마이든 개인에겐 참으로 힘겹고 버거운 상처이지만, 성과 관련된 고통은 유독 피해자에게 그 잔상이 깊습니다. 이미 받았던 고통만으로도 심각하게 피폐해져 있는데, 유독 다른 범죄에 비해 너무나 경한 처벌 때문에 곱절의 상처를 끌어안습니다.


왜 피해자가 더 큰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다수의 내담자가 제게 이런 말을 몇 번이나 토해내었어요.

내 고통이, 내 상처가 이토록 큰데, 나는 도무지 앞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데. 나는 마치 껍데기만 남고 영혼은 살해당한 것만 같은데, 이렇게 큰 내 고통에 대한 처벌은 그토록 깃털같이 가벼운 것을 보면서, 나는 회복될 거라는 희망마저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내 앞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사회가, 이 세상이 미워지곤 했습니다. 나를 스쳐간 그 피해자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너무 답답해서, 또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서, 잠시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26만 명이라는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들 머리 위에 빨간 불이 찍힌다면, 이 거리 위에도 빨간 불빛은 몇 개나 깜빡이지 않을까. 이 나라 어디에서고 빨간 불빛이 도사리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그런 마술 같은 일은 없겠지요. 그래서 더욱 섬뜩했습니다. 저 길 위에 선 사람 중에 그 많은 '조주빈'들이 누구일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으니까요. 


"제가 악마 같습니까?" 박사방 조주빈은 이렇게 물었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여성들이 살아온 삶의 공포를 (물론 감히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습니다. 이 거리 위에도 그 가해자들이 있는데, 나는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 공포를요.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26만은 부풀려진 거라고요. 그래요. 그렇다고 합시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요? 자행된 그 끔찍한 일들이 덜어지나요? 피해자가 받은 지옥 같은 순간이 줄어드나요? 가해자의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범죄의 크기가 덜어지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술김에 한 일이라고 해서, 반성하고 있다고 해서, 탄원서를 냈다고 해서 범죄의 크기가 덜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는 언제나 그것들을 '참작' 해 주었습니다.
 
범죄의 크기를, 그에 따른 단죄의 크기를 가해자의 관점에서 판단해왔으니까요.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가해자가 어리든, 술을 먹었든, 반성하든 피해자의 상처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그들의 '죄의 크기'가 줄어들 이유, 없지 않나요?
 
내 주위를 맴돌 '수많은 조주빈들', 하지만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다.
전 유도 국가대표 선수 신유용 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그 체육지도자, 그는 얼마 전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요. 그와 거의 동일한 범죄를 저지른 미국의 체조선수 국가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는 징역 36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국이 언제나 '한 명의 범죄자라도 개과천선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교정주의를 택할 때, 미국은 처벌에 중점을 둔 엄벌주의의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생각해볼 때입니다. 한국사회는 '모든 종류의 범죄자'에 대해 동일하게 '교정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관점. 언제까지 지향해야 하는 걸까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는 말, 상담이 업인 제가 좋아해서는 안될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범죄는, 또 어떤 사람은 고쳐 쓸 필요가 없을 만큼 추악하지 않던가요? 꼭 모든 범죄에 동일하게 교정주의를 지향해야 할까요? 가해자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시간만큼,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면, 우리의 법은 누구를 향해 있는 걸까요?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법은, 누구를 향해 존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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