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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성한 재판'에 의한, '신성한 재판'을 위한 무죄 선고?

판사
우리 헌법은 재판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사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의 압력이나 청탁을 배제하기 위한 이 선언적인 규정은 '재판은 신성한 것'이라는 테제의 가장 중요한 준거입니다.

그런데 신성한 재판에 대한 개입이 이뤄졌습니다. 개입의 결과 판결문 내용이 바뀌고, 재판 방식이 변경됐습니다.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시'가 없었다면 발생되지 않았을 일입니다. 원인 된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 우리는 이를 인과 관계라고 부릅니다.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재판장 송인권 부장판사, 김택성 판사, 김선역 판사)는 여러 건의 재판 개입 혐의를 받는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재판에서 '재판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 개입은 위헌적 행위'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임성근 부장판사
하지만, 형법상 죄는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신성한 재판'엔 누구도 개입할 권한이 없고, 설사 개입을 했더라도 '신성한 재판'은 담당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론 내렸을 뿐이라는 겁니다. 신성한 재판에 개입이 이뤄졌는데, 재판은 신성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의 보호를 위해서 '신성한 재판'을 무죄 판단의 논거로 가져온 아이러니한 결과입니다.

● 불법 행위를 할 권한이 없으니 죄가 안 된다?

재판부는 누구도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으니, 권한 남용 유무를 따지는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죄'는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의도적으로 혼동한 결과로 보입니다.

물론, 재판이라는 '과정과 결과'에 개입할 권한은 담당 법관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재판은 판사라는 사람에 의해 이뤄집니다. 재판부가 인정한 '재판 개입'은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입니다.

임성근 판사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수석부장판사'였기 때문일 겁니다. 판사는 개개인이 헌법 기관이자 사법부이지만, 사법부라는 조직 내에서는 한 명의 직장인과 같은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이 과・부장을 거쳐 임원이 되고 싶어 하듯, 판사들 대부분도 부장판사와 차관급 예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의 승진을 꿈꿉니다. 직장인들이 원하는 부서에서 원하는 업무를 하고 싶어 하듯, 판사들도 원하는 재판 업무를 맡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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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상급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에 대한 감독 권한과 인사 평가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아무래도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죠. 법원에서는 '수석부장판사'가 판사들 평가에 관여하고, '사무분담'이라는 이름의 부서 배치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석부장판사'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 유무와 별개로 실제 운영이 그렇게 되어 왔습니다. 판사 사회의 불문율인 셈입니다.

● 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인 재판 개입

임성근 판사가 개별 판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결과적으로 '재판 개입'을 하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수석부장판사에게 부여된 인사 평가권 등이 권한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런 권한이 있기 때문에 신성한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마음도 먹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재판 개입'은 이런 수석부장판사로서의 권한이 남용된 '결과'인 겁니다.

그런데 재판부는 발생된 결과에서 그 결과에 대한 권한 유무를 찾았습니다. '재판 개입'은 다른 권한이 남용된 결과인데, '재판 개입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며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겁니다. '재판 개입'이라는 불법과 반헌법적 행위를 할 권한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없는데, 발생된 결과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판단한 셈입니다.

이런 식의 판단이라면 '재판 개입'은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재판부가 밝혔 듯 징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수사라는 강제력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 이상 판사 스스로가 이를 '드러낼'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합니다. 훗날 드러나더라도 이미 징계시효는 훌쩍 지나버릴 가능성이 다분하죠. '재판 개입'이 벌어지더라도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일각에서 재판부의 판단은 '재판 개입은 치외 법권 대상이라는 선언'이라거나 '무죄 선고를 위한 의도적 논리 짜 맞추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 현실과는 다른 '수석부장판사'의 권한 유무 판단

권한의 유무를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재판 개입 권한'이 아닌 '수석부장판사의 사법행정권한'에 집중해 판단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대로라면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재판부는 무죄를 위한 2,3중의 방어막을 쳐 놓은 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살펴본 것처럼, 수석부장판사는 판사 개개인에 대한 인사평가 권한, 사무분담 관여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판사 사회의 통설입니다. 실제로 수석부장판사는 그런 권한을 행사해 왔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실과 별개로 수석부장판사에게 이런 권한을 줘야 한다는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법원 재판-법정, 판사
재판부는 명문화된 규정이 없다는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법원 예규 등에 개별 판사의 인사평정권은 소속 법원장에 있다고 되어 있을 뿐. 수석부장판사에 대한 구체적인 권한 규정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수석부장판사가 그런 권한을 행사해 왔더라도, 그것은 관행일 뿐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라며 또 한 번 방어막을 쳤습니다. 이런 판단대로라면 권한 유무를 '재판 개입 권한'이 아닌 '수석부장판사의 권한'에 맞춰 평가했더라도 무죄가 선고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재판부의 판단은 기존 판례와 부딪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명문의 규정이 없더라도 법령과 제도를 종합적, 실질적으로 살펴보아 그것이 해당 공무원의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해석되고 이것이 남용된 경우 상대방으로 하여금 권리를 방해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정되면 일반적 직무권한에 포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단순히 법령에 규정에 있는지 여부와 함께 실제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판부가 인정했듯 수석부장판사에게 사법행정권이 있는 것이 '관행'이었다면, 그 관행이 현실이었던 '실질'을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 원인 된 행동과 결과는 있지만 '인과관계'는 없다?

재판부가 무죄 선고를 위해 친 또 다른 방어막은 '재판은 법관의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뤄진다'는 당위론적 명제입니다. 임성근 판사가 재판 개입은 했지만, 그 결과는 개별 판사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했다는 겁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근거로 재판 개입의 상대방인 판사들의 진술을 들었습니다. '조언 정도로만 받아들였고, 독자적으로 판단했다'는 취지의 진술들입니다. 이 결과 재판부는 재판 개입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의 독립'이라는 지켜야 할 가치가 무죄 선고를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고 오염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이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판단했다'는 판사들은 진술을 양심에 따른 진정 어린 고백일까요? 외부인의 압력('조언')에 의해 판단에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은 판사 사회에 있어 자살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재판부는 진술이 아닌 발생된 결과에서 인과관계를 찾았어야 합니다. 임성근 판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판결문 내용이 바뀌었을지, 재판 방식이 바뀌었을지를 따져봤어야 합니다. 원인을 지웠을 때도 동일한 결과가 발생했을지를 살펴봤어야 합니다. 임성근 판사의 개입이 없었어도, 판결문 내용이 바뀌고 재판 방식이 바뀌었을까요?

● '재판 개입'에 대한 형법적 처벌 가능성

이런 비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개입한 한 판사에 대한 처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에 대해 법원이 최근 처벌 범위를 좁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권(직무권한)', '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범죄 성립 요건별로 처벌 범위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개별의견(박상옥 대법관)과 다수의견의 보충의견(안철상 대법관, 노정희 대법관) 모두 범죄 성립 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봐야 한다는 방향성은 동일했습니다. '사법방해죄' 등의 입법이 없는 상황에서 '법관 탄핵' 만이 답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죠.

하지만, 국정농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함께 문화계 블랙리스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종합했을 때 재판 개입이라는 위헌적 행위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법령에 의해 독립성이 보장된 영진위 등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특정 성향의 단체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전원합의체의 다수 의견은 위헌적 행위는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는 취지로 판단했습니다.

다수 의견의 취지는 임성근 판사 사건 재판부가 인용하기도 했던 박상옥 대법관의 별개 의견을 통해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박 대법관은 별개 의견에서 '피고인의 행위가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형사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피고인들에게 불리하게 범죄구성요건을 확장 해석하는 것이어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고 밝혔습니다.

바꿔 말하면, 다수 의견은 '위헌적인 행위'가 인정된다면 직권남용 혐의 적용은 용이하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해당 사건 하급심 재판부는 특정 단체에 대한 배제 지시는 비서실장 등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구체적 판단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법원의 다수 의견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재판 개입'이 위헌적 행위임은 임성근 판사 사건 재판부도 인정한 만큼, 처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법리적인 해석과 논쟁과는 별개로, '재판 개입'은 초유의 반헌법적 행위라는 건 변함없을 겁니다. 1심 판결 결과에 따른 논쟁이 이어졌고, '처벌 가능성'에 대한 이렇게 길게 논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증명합니다. '처벌할 법이 없다'는 일각의 푸념과 자조는 입법자가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도저히 상정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등 남은 사건들이 어떻게 처리될지, 무죄가 난 사건들의 항소심 재판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더욱더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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