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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신의 속마음 아는 사람, 몇 명이나 되나요?

김지미 | 영화평론가

[인-잇] 당신의 속마음 아는 사람, 몇 명이나 되나요?
우리는 사회 안에 살면서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교류한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 앞에 있는 이가 나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그저 그가 수행하는 '기능'으로 그를 인식하는 것이다. '상사', '계산원', '운전기사', '선생님', '손님'처럼.

누군가를 인간이 아닌 기능으로 인지할 때 무자비한 악플이 가능해진다.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이를, 연기를 보여주는 이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를 사람이 아닌 그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노래를 구입했고, 그 영화를 관람했고, 책을 샀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 구매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출연한 문화 상품의 잠재적 소비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가혹하게 비난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았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타인의 존재를 무게감 없이 다루는 피상적인 교류와 자본이 만들어낸 플랫폼 안에서 감정의 배설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배설물이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오염시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까운 선택을 한다. 젊고 아름다운 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사건을 들을 때마다, 그들이 타인의 존재를 너무 가벼이 다루는 요즘의 관계들에 희생된 것 같아 가슴 아파진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 그렇게 접근한다. 이 작품에서 그것은 단순히 경악할 만한 사건이 아니다. 영화는 그 사고를 통해 우리가 잃게 된 어떤 삶들에 대한 절절한 애도를 요구한다. 죽음은 그저 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다. 그의 자취가 생전에 그와 연결되었던 모든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벌새>의 주인공 은희(박지후)의 삶은 딱 중학교 2학년만큼 무겁고, 자기만의 색깔로 익어가고 있다. 모범생도 심각한 날라리도 아닌 은희의 삶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은희의 마음은 늘 외롭다. 부모님은 삶에 지쳐 무력하고, 입시에 지친 오빠는 작은 트집을 잡아 은희를 때린다. 학교에는 친구가 없고, 좋아한다며 다가왔던 남자 친구나 후배도 제멋대로 오락가락한다.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도 자기 마음을 몰라주고,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지 않아 속상했던 은희는 한자 교실 선생님 영지(김새벽)가 칠판에 적은 명심보감 '交友篇(교우편)'에서 발췌한 저 글귀를 보고 울컥해진다. 영지는 저 글귀를 일러줄 뿐 아니라 은희의 한숨에 귀 기울여주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주기도 한다. 하지만 1994년의 뉴스를 가득 채웠던 사건은 은희가 누리던 작은 위안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벌새'는 새지만 벌처럼 난다. 잠시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지나치게 빠른 심장 박동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들이 그 에너지원이 된다. 누군가는 나의 날갯짓이 오래 갈 수 있는 묵직한 에너지를 주고, 누군가는 단 한 번이지만 달콤함 기억을 선사한다. 또 어떤 관계는 한동안 날갯짓을 할 힘을 앗아가 버린다. 어떤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게 한다.

<벌새>를 보는 동안 내 마음은, 어른들은 부당하고, 친구들은 무심하고, 나 자신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되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되돌아갔다. 과거가 현재화되고, 사건이 감각이 되었다.

우리 곁을 가득 메운, 나와는 얼핏 상관없어 보이는 현재의 모든 사건들은 그것과 연관된 이들에게는 지독한 감각으로 경험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곁을 떠나간 이들도 온기 가득한 사람이었으리라.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그들을 잃고 남겨진 이 세계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은희는 감자전을 야무지게 뜯어 먹고,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해 소리 지르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고, 박자를 놓칠까 두근거리며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수저 위에 고기반찬 올려주는 엄마의 작은 관심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런 보통의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런 보통의 삶이 선사하는 감각을 잠시 마비시킨다.

삶은 다시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차가운 모니터로 분리된 우리의 관계라고 해도,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삶은 언젠가 당신의 손을 잡았던 누군가의 것만큼 따듯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또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다.

(사진=영화 <벌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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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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