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증강현실의 시대, 여행의 의미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SBS 뉴스

작성 2019.11.30 11:03 수정 2019.11.30 22:1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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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2억 5천만여 명의 이용자를 거느린 서바이벌 슈팅게임 게임 포트나이트(Forrtnite)는 최대 100명이 동시 접속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을 제공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접속한 이용자들은 같은 풍경을 공유하고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할 수 있다. 아직은 조이스틱과 모니터의 힘을 빌린 간접 접촉이 전부지만, 이러한 동시접속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증강현실 기술과 맞물리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처럼 가상공간 속 상대방과 직접 대화하고 접촉하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대신 VR 헬멧을 쓰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서바이벌 게임의 무대가 현실의 산과 들에서 모니터 속 왕국으로 옮겨갔듯, 안방에 앉아서 진짜 백화점과 공연장에 있는 것처럼 쇼핑을 하고 콘서트를 즐기는 상상은 머지않아 현실화될 전망이다. 이미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착용해볼 수 있는 가상 피팅 앱은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2019년 2월에는 시범적으로 기획된 사이버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게임도 쇼핑도 콘서트도 깊게 즐기지 않는 내게 이러한 진보는 아직 피부로 와닿는 변화가 아니다. 하지만 가상현실이니 증강현실이니, 이름만 들어도 SF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과학 기술들이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관련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증강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가 극도로 정교해진다면 여행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뉴욕에 가지 않고도 브로드웨이의 거대한 전광판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면, 파리에 가지 않고도 에펠탑의 저릿한 금속성 감촉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될까?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이코노미석의 좁은 틈새로 다리를 구겨 넣고, 서툰 외국어로 택시비를 흥정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전부 생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행에 따르던 수고가 사라졌음에 감사하며 이국적인 체험을 편안히 누리는 환경에 만족하게 될까?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고,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 의견 또한 분분하지만, 나는 실제와 구분할 수 없고 오감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극사실주의적 증강현실이 구축된다 해도 인류가 귀찮고 고생스러운 여행의 그 모든 과정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유전체에 새겨진 어떤 DNA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간은 다른 모든 일에서는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면서도 여행에서만큼은 희한하리만치 비효율을 즐기는 이상한 생물이기 때문이다. 발바닥 물집이 마를 날 없는 순례길 완주도, 눈 뜨고 바가지 쓰는 야시장 쇼핑도, 인파에 떠밀리다 끝날 관광지 투어도 우리에겐 큰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 누리고픈 행복한 비효율이다.
[인-잇] 증강현실의 시대, 여행의 의미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한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인터넷이 보급될 무렵 미래학자들은 여행 수요 감소를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떠났다. 인터넷은 이국적인 풍경 속에 직접 존재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만 빼면 실제보다 훨씬 편리하고 쾌적한 감상을 즐길 수 있음에도, 우리는 모니터 너머의 모나리자 대신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기꺼이 먼 길을 떠난다.

자신의 발로 금강산을 오르는 대신 하인을 시켜 정상의 풍경을 확인했다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일화는 부러움 대신 측은함을 자아낸다. 그까짓 체면 때문에 그 즐거운 고생을 직접 겪지 못하다니. 이러한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라면, 《여행의 이유》에 담긴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한 공감을 느낄 것이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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