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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1987년 화성, '괴담의 추억'

가짜뉴스를 통해 본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실은] 1987년 화성, '괴담의 추억'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확인됐습니다. 첫 번째 살인 사건 이후 33년, 공소시효 만료 13년 만입니다.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잔혹했던 그 사건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꺼내들고, 또 누구는 옛날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찾습니다. 흥미 위주의 소비 방식 때문일까요. 여성들이 잔혹하게 살해된 건 '추억'이 아니라는 자성론도 나왔습니다.

사건 당시 괴담도 재소환 됐습니다. 역시 흥미 때문일 겁니다. 시대를 강타한 사건 뒤에는 늘 가짜뉴스가 있었습니다. 잔혹했던 사건과 괴담을 다시 연결 짓는 게 부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과거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서, 괴담의 역사는 시대의 어떤 함축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서슬 퍼랬던 대한민국 80년대, 한편으로는 뜨겁고 한편으로는 냉혹했던 시대의 민낯이 오롯이 담겨있었습니다.

팩트 체크입니다. 당시 괴담은 크게 2가지였습니다.

① 범인은 빨간 옷 입을 사람을 노렸다.
② 범인은 비 오는 날 범행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도 이런 내용이 담겼습니다. 형사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과거의 괴담이 현재의 괴담으로 이어지는 데 역할을 했을 겁니다.

신동철 반장 (송재호 분) : 죽은 두 여자 말이야, 뭐 공통점 같은 거 없나?
박두만 형사 (송강호 분) : 공통점. 뭐 일단, 둘 다 미혼이라는 점.
신동철 : 또?
서태윤 형사 (김상경 분) : 사건 날 전부 비가 왔어요.
신동철 : 비?
서태윤 : 다들 비 오는 밤에 살해됐다고요.
신동철 : 그래?
서태윤 : 빨간 옷. 죽은 여자가 빨간 옷을 입고 있었어요.
- 영화 '살인의 추억' 中

영화 '살인의 추억' 한 장면(왼쪽)과 봉준호 영화감독
이런 괴담이 영화적 장치에 그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아실 것 같습니다. 정색하고 팩트 체크한다는 게 민망하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 '거짓'입니다.

범인이 검거된 8차 사건(1988년 9월 16일 발생)을 제외한 9번의 범행 가운데,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희생된 건 4차 사건 한번 뿐이었습니다. 당시 날씨를 보면, 범행 당시 비오는 날은 4차, 6차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괴담이 돌았을까요.
사진
표를 보시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5차 사건 피해자가 발견된 1987년 1월 11일 이후, 중앙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자료를 보면 중앙 언론에는 1987년 1월 14일부터 검색이 됩니다.

화성군 태안읍과 이웃 정남면 일대 논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3건의 강간살인사건이 잇따라 발생했으나 경찰은 범인의 유류품은 물론 발자취, 목격자 등 단서 조차 확보하지 못해 수사는 원점을 맴돌고 있다. 지난11일 오후 1시쯤 태안 지서에서 2km 가량 떨어진 태안읍 논볏짚 속에 이 마을 홍 모양이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목도리로 목이 졸려 숨져 있는 것을 볏단을 옮기던 이 마을 최 모 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 연합통신, 1987년 1월 14일 <화성서 강간 살인 석달 새 3건. 폭행 피해자도 6명>


보도에는 피해자가 3명으로 돼 있습니다. 1차 사건 피해자는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보도 당시 3차 사건 피해자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건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달인 2월부터는 보도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차 사건 피해자가 실종 4개월 만인 4월에 발견되면서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다음 달인 5월, 6차 사건 발생 직후 보도량은 정점을 찍습니다. 당시 보도를 보면, '빨간 옷', '비오는 날'이 여러 차례 언급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태안읍내에서 피살된 5명의 부녀자 중 지난해 12월 21일 숨진 채 발견된 이모 양(21)이 빨간 상의를 입고 있었다는 것.
- 동아일보, 1987년 5월 12일 <화성 부녀자연쇄피살사건 40대 용의자 연행>


경찰은 특히 심양이 피해를 당할 뻔 한 날 밤도 비가 왔었고 지난 2일 5번째 피해자인 박 모 씨(29)가 살해됐을 때도 비가 왔었다는 점을 중시, 이 씨를 상대로 박 씨 살해 당일의 알리바이 등을 캐고 있다.
- 경향신문, 1987년 5월 29일 <화성살인 새 용의자 연행>


아무래도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한 1월, 그리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된 4월 사이 괴담이 돌기 시작했고, 언론 보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언론이 '빨간 옷', '비오는 날씨'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괴담을 더욱 증폭시켰을 겁니다.

특히, 4차 사건의 경우, 범행이 비오는 날 이뤄졌고, 피해자가 빨간 옷을 입고 있었던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최근 사건이었던 4차 사건의 임팩트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사건 발생 당시 비가 내렸고 피해자가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항간에는 '비오는 날 빨간 옷 입은 여자만 노리는 살인마가'가 있다는 괴소문이 퍼지고 여성들이 빨간 옷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비가 온 것은 총 10건의 사건 중 이 사건을 포함해 두 번밖에 없고, 빨간 옷을 입은 피해자도 한 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어두운 밤길에서는 빨간색이 검게 보이기 때문에 살인 사건과 빨간 옷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표창원 <한국의 연쇄살인>, 랜덤하우스, 2007년, 158쪽

화성 연쇄살인사건 현장도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런 괴담들,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흥미와 가십에 그치는 것일까요.

당시 보도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6차 살인 사건이 있었던 1987년 5월, 한창 언론 보도가 많이 나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30대 남성 홍 모 씨가 용의자로 특정됩니다. 이유는 터무니없었습니다. 화성 태안읍의 한 술집에서 여성 종업원에게 "2~3일 내로 한 명이 죽을 것이다. 너도 빨간 옷을 입으면 이틀 내에 죽는다. 너도 빨간 옷은 입지 말라"고 말한 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홍 씨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주민들이 모두 당신을 범인으로 꼽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는 경찰의 말을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일일이 부인하기가 귀찮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범인으로 떠오를 경우 가출한 부인(35)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범행을 시인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경찰이 홍씨를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 부분들에 대해 홍씨는 "빨간 옷은 입지 말라"는 얘기는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것으로 단지 농담 삼아 한 얘기이며
- 경향신문, 1987년 5월 18일 <화성 살인사건 수사 원점에>


하나의 해프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빨간 옷'에 대한 주민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면에는 열악한 치안 환경이 있었습니다. 시골 한적한 마을이었던 화성은 파출소 몇 군데 있었을 뿐 경찰서도 없었습니다. 수사 기법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한계보다도 치안당국의 무능함이 주민의 불안을 자초했습니다.

화성군 태안읍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은 재래형 범죄인데도 수사본부는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해 오리무중인 채 희생자만 늘고 있다. 5번째 살인은 수사본부에서 불과 6백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니 범인의 대담성과 수사진의 무능력이 대조를 이룬다. 서장 인책만으로는 사건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수사가 날고 기게 되어 시민이 단잠을 이룰 수 있는 때는 진정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 경향신문, 1987년 5월 12일 <오리무중>


치안당국의 책임이 컸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처럼, 당시 경찰 수사는 우왕좌왕이었습니다. 초동수사는 실패했습니다. 현장 보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중앙 언론을 통해 공론화된 게 1986년 1차 사건 4개월이 지난 이듬해 1월이었습니다. 그 사이 공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사건 커지는 걸 원치 않아 의도적으로 숨긴 건지, 워낙 한적한 시골 마을 사건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그 속내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빨간 옷을 입으면 죽는다'는 말만으로도 홍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괴담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홍 씨의 치기는 공권력의 무능과 안일함으로 만들어진 주민들 공포와 불안의 약한 고리를 건드렸던 겁니다.

당시 기사에서 이런 대목도 눈에 띕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9일까지 7개월 사이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내에 5건의 강간살인사건이 발생,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으나 수사는 오리무중이다. …… 다섯 번째 사건 직후 경기도경의 한 간부는 "사실상 그동안 각종 경비업무 등에 수사요원을 차출해내는 일이 많아 수사가 알차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 동아일보, 1987년 5월 12일 <잇단 여인 피살, 주민들은 겁난다>


'각종 경비업무'에 차출됐다는 말. 여러 시위 현장에 동원됐음을 뜻합니다. 연합통신이 화성 연쇄살인 소식을 보도한 게 1987년 1월 14일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최초 기사인 중앙일보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가 보도된 게 바로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1987년은 민주주의를 성취했던 뜨거운 역사로 기록돼 있지만, 화성의 1987년은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한 역사로 남았습니다.

1987년, 군사독재 정권의 막바지. 민주화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거셌습니다. 공권력은 그 열기를 잠재우는 데 힘을 낭비했습니다. 기사에서도 말하고 있듯, 그렇게 수사 인력이 '경비업무'에 동원됐고, 또 그렇게 치안 공백이 만들어졌습니다. 권력의 마지막 몸부림 속, 화성의 시골 마을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틈을 타고 사악한 범인은 더욱 활개를 쳤습니다. 주민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누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그렇게 '괴담'을 통해 스스로를 단속해야만 했습니다. 빨간 옷을 입지 말 것, 비오는 날 집밖을 나가지 말 것. 우리가 두렵고 힘들 때 미신을 찾는 것처럼, 괴담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 터무니없던 괴담들은 보호 받지 못한 주민들, 사실상 방치됐던 주민들이, 스스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규범'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경찰은 범인이 현장에 남긴 단서가 거의 없는데다 초동수사 미숙으로 그나마 단서라 할 수 있는 몇 개의 체모와 피해자 소지품에서 나온 지문을 채취하는데 실패하는 등 결정적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 이와 함께 잦은 수사 인력의 교체, 초동수사 실패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만한 첨단과학 장비의 부족도 수사를 장기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 한겨레, 1991년 9월 18일 <'화성 연쇄살인' 헛 수사 5년째>

지난 19일 오전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관련 브리핑 하는 반기수 수사본부장 (사진=연합뉴스)
결국, 진정 괴담을 만든 건 누구일까요. 잔혹한 사건에서 흥미를 찾는 사람들, 공감 능력 없는 이들의 삐뚤어진 인성 때문일까요. 물론 1차적 책임은 잔혹했던 '그놈'과 가짜뉴스 '유포자'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 괴담이 주민들에게 먹혀들었다는 사실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초동수사 실패, 수사 공조 실패, 잦은 수사 인력 교체, 공권력의 안일함, 군부의 마지막 몸부림에 생겨난 치안의 공백. 터무니없던 괴담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잉태됐고, 기민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되묻게 됩니다. '정말로' 괴담을 만든 건 누구일까요.

공권력이 제 역할을 못할 때 가짜뉴스도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것, 이런 상황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은 결국 괴담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 결국, 가짜뉴스는 공포와 불안의 상형문자이며, 권력의 무능과 안일함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 80년대 '괴담의 추억'은 어쩌면,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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