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비밀스러운 '그 힘'을 공유하는 영혼의 실용서적 - 산책하는 마음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9.07.21 07:1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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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99 : 비밀스러운 '그 힘'을 공유하는 영혼의 실용서적 - <산책하는 마음>

"요컨대, 나는 그냥 즐겁게 산책함으로써 은연중에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집 바깥을 선선히 어슬렁거리는 한 토막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안도감과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의 일부가 된 주위의 동네를 하루에 한두 시간씩 걸으며 얻을 수 있던 평화로운 에너지가 있었으니까."

그냥 조금 걷는 일, 이 삶에 열어놓은 문.

북적북적의 199번째 책은 '그냥 걷는 즐거움'과 '걷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서 성실하고 담담하게 들여다본 참으로 느낌 좋은 책,
<산책하는 마음>입니다. 출판인이자 <아이돌을 인문하다>라는 에세이집을 냈던 박지원 작가의 두 번째 에세이집으로, 올해 1월 출간됐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박 작가의 두 번째 책을 보고 싶어 한 148명의 후원을 받아 세상의 빛을 봤다고 합니다.


"나도 이 지구를 여기저기 누벼봤으면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 결국 여행이야말로 (그 비싼 값어치만큼) 인생 최고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고 믿고 싶다. 우리나라 각지의 수많은 곳을 쏘다녀 보았고 (해외에 자주 나가보진 못했지만) 해외여행을 사랑하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내가 말하는 산책은 그처럼 내 삶의 반경을 일시적으로 '완벽하게' 이동시키는 여행과 대립각을 세우는 경험이 아니다. 산책은 여행을 포괄한다. 여행을 떠나지 못해도 산책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산책하는 일이 생략된 여행은 있을 수 없다. 진정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저 먼 곳에서도 무언가 '미지의 것'을 가슴에 충만히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언제나 그 새로움에 경탄할 수 있는 '익숙함의 리듬'과 '익숙함의 시선'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러니 새로운 풍경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 주위의 익숙한 풍경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도서관을 닮은 산책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이다. 1년 365일 언제든 그다지 새로울 건 없겠지만, 그 안을 조금만 세심하게 뒤적이다 보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저 평온함의 뒤편에 숨어 있는 놀랍고도 놀라운 가능성을."



휴가철이죠. 영화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 같은 일은 그래도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야 일어날 것 같고요. 그런 여행, 그런 휴가... 남들은 다들 누리고 사는 것 같은데, 사실은 쉽지 않지 않습니다. 해외에 나가봤다, 해외를 경험해 봤다, 는 사람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26.5% 정돕니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보면 굉장히 높은 수준입니다.

<산책하는 마음>은 생각처럼 호쾌하고 화려하게 떠날 수 없는 많은 사람들과, 오늘 이곳을 산책하는 시간이 열어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조곤조곤 공유합니다. 이 책에서 박지원 작가가 말하고 있는 대로, 정말이지, 산책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은 진짜 여행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모든 산책은, 당장 떠날 수 있는 미묘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게도 어떤 삶의 청사진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라는.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지금 나는 그런 기대를 접었다. 나는 이제 미래를 믿지 않는다. 나는 그냥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내가 언젠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모두 포기했다는 건 아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완벽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히 내 안에서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다. (덧붙이자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발화 자체가 자신 안에 담긴 욕망을 게슴츠레하게 표출한 것일 뿐이므로. 욕망은 그런 방식으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나의 경우엔, 이제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 일상과 동떨어진 '어떤 청사진'을 믿지 않게 되었을 뿐이라고 적어두고 싶다. 나는 으리으리한 망원경 따위로 나의 인생을 노려보고 재단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언젠간 더욱 뛰어나고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일직선의 모노레일 같은 성찰도 그만두었다. 현실적으로 말하건대 그런 인생론이 나를 더 뛰어나게도 완벽하게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런 '깔끔한 청사진'은 내가 하루하루를 즐겁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데 명백히 방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책하는 마음>은 솔직하게, 멋 부리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서 오늘의 나 자신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극적인 이동, 벼락같은 계기, 꿈 같은 반전... 이 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대부분의 인생에 공통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글을 끄집어냅니다.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하게 들리는지요. 존재하지 않는 환상도 꾸며내서 전시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가 그야말로 '일상'이 돼 있고,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우주의 절반을 소멸시키는 판타지도 그닥 어마어마한 얘기로 보이지 않는 2019년 지금. '그저 걷는 평범한 우리네 일상'에 대해 300페이지에 걸쳐 사유한 책을 내는 일은 그야말로 '힙'하고 '시크'하고 '트렌디'한 무언가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충분히 비밀스럽습니다. 살아가는 비기(秘技)를! 공유하는 책입니다.

평범한 오늘 하루의 힘. 비밀도 아닌데 여전히 비밀인 그 힘에 대해, 마치 성큼 다가서는 것처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산책에 깃든 기적 아닌 기적에 대한 이 책의 고백은 읽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납득시킵니다.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 심각한 폭력의 경험,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상실, 깊이 믿었던 이의 배신 등등. 예컨대, 일각에선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는 프로이트의 '5세 이론'(한 사람의 인격적 무늬는 5세 이전에 모두 결정되어 버린다) 같은 주장들은 우리 연약한 이들을 무시무시하게 겁박하고 있다. 넌 절대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할 거야, 넌 과거의 그림자를 외면할 수 없어, 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여기서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눈에 들어오는 바로 저곳이, 곧 나의 과거다. 그것은 산책하는 마음이 푸근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과거이며, 그 언젠가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자유로워진 내가 되짚고 있는 나의 과거다. 나를 어딘가로 내몰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으며 몇 분 전 혹은 몇 초 전을 지나온 그 발걸음만이, 나의 과거다."



산책은 밍밍해 보이는 오늘을 분명하게 바라보며, 둥둥 뜬 구름 위가 아니라 땅 위에 발을 꼭 붙이고, 그 발을, 몸을 매일 조금씩 움직여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행위죠. 박지원 작가는 사소해 보이는 그 습관을 통해 마음속에 일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해 삶의 물결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졸졸졸 흘러 들어오다가, 벅차게 흘러넘치게 되는 과정을 겸손하면서도 단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냥 목적 없이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그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에 대한 감각을 근면하게 사유하고 전달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는 글들입니다.


"우리는 타인 혹은 이 세계와 '빚'을 주고받을 만큼 그것과 깊이 얽매일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수많은 속박과 규범, 채권채무와 사회적 계약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지만, 알고 보면 누구도 누구를 구속할 수 없고, '너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너는 내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꽤 쓸쓸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거품처럼 흩어지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신기루 같은 세계를 만질 수가 없다. 나는 '너'라는 사람을 알 수 없고 또 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알 수 없다. 나는 신의 자식이거나, 태양의 자식이거나, 아니면 공허함의 자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걷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에 한동안 차 없이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걷는 시간'이 크게 늘어나면서, 걷는 일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현대인은 나 자신 발걸음의 속도보다, 차에, 비행기에 더 익숙하죠. 한잠 자고 일어나면 지구 반대편에 도달해 있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어 마치 술에 취하듯이 늘 속도에 취해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세상을 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3시간이면 ktx로 서울에서 부산에 도착하니까,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풍경과 삶이 숨어있는지 보지 못하고, 체감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게 있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주선으로 화성에 가는 날이 오더라도, 속도에 취하지 않은 사람의 체내 시계는 늘 걷는 속도에 맞춰져 있을 텐데 말이에요.

우리가 대체로 잊어버리고 있는 '걷는 즐거움'은 속도에 무뎌져 있는 내 마음의 태엽 시계에 밥을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절실한 즐거움'을 느긋하고도 성실하게 파헤친 이 책은, 그래서, 어쩌면 실용서적 카테고리에 묶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혼의 실용도서라고 할까요^^

한꺼번에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독파하기보다, 하루에 한두 챕터씩 아끼며 읽어가는 재미가 훨씬 더 쏠쏠한 책입니다. 매일 조금씩 산책하는 것 같은 속도로요. 모두 27개의 챕터를 통해 산책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조금은 형이상학적인 사유로 계속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빨리 읽으려고 하시면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고 하루에 한두 챕터씩 아껴가며 읽어나가다 보면, 종종 함께 산책해 주는 이 친구를 만약 몰랐으면 어땠을까... 오늘도 전화해서 같이 걷자고 해볼까... 같은 마음과 비슷한 애정을, 이 책에 느끼게 되실 겁니다.

*도서출판 사이드웨이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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