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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2017년 홍준표 vs 2019년 홍준표

연설하는 홍준표 vs 토론하는 홍준표

● 홍준표 vs 홍준표

"홍준표가 집권하면 민주노총 내가 반드시 때려잡겠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일자리 빼앗고 고용세습하고 자기 자식들의 일자리 물려주고, 임금 평균 1억 원 받아도 매년 스트라이크만 일삼는 강성귀족 노조 때문에 대한민국 기업이 해외로 나갔어요. …… 경남지사 할 때 100만평 주겠다, 어느 자동차 회사가 50만대 증산하겠다는 발표 있어서 100만평 주겠다, 여기 와서 자동차 공장해다오, 그렇게 하니까 2~3일 있다가 우리는 귀족 노조 때문에 더 이상 대한민국 투자 안한다고 했어요."
- 2017년 4월 30일 홍준표 당시 대선후보 동두천 유세

"제가 이야기하는 건 노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노조가 부당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용주의 경영권도 인정해주라는 이거예요. 예컨대, 어느 자동차 노조에, 생산 라인을 하나 신설하려고 해도, 노조 동의를 얻어야 되요. …… 이런 식으로 노동조합이 경영권까지 이제는 장악하는 시대가 돼 버렸어요. 경영자들이 노동단체 눈치 보면서 경영해야 하니까, 나라가 투자를 하고 싶겠어요? …… 내 자식 밥 먹이기 어렵다, 학원 보낼 돈이 없다, 나 힘들어 죽겠다, 월급 올려 달라, 근로 환경 너무 나쁘다, 좀 고쳐 달라, 이런 걸로 파업을 해야 국민들이 납득을 하죠."

- 2019년 6월 3일 유튜브 방송 '홍카레오'

내용은 비슷합니다. 둘 다 민주노총이 우리 경제에 해 끼친다는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의 발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결이 좀 다릅니다. 2017년에는 '민주노총을 때려잡겠다.'는 과격한 언어로 이목을 끈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면, 2019년에는 '노조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유사 논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 (사진=연합뉴스)
● 연설 공간 vs 토론 공간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홍준표의 입장'을 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홍준표의 입장은 바뀐 적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민주노총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2017년에 비해, 2019년의 홍준표는 덜 과격해 보입니다.

'공간'을 주목합니다. '대선 유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논리적인 반박을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 '홍카레오'는 유시민 작가와 토론을 하는 공간입니다. 그가 어떤 말로 대응할지 계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토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 소통 공간을 '연설 공간'과 '토론 공간'으로 달리 생각합니다. 연설 공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연설 텍스트는 화자에서 청자,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물론 연설 공간에서도 양방향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청자는 박수나 환호성, 구호, 야유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인 지지나 반박을 하지 않습니다. 화자는 굳이 논리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제약이 덜합니다. 거침없이 말해도 됩니다. 이 때문에 연설 공간은 극단적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선동은 늘 연설 공간에서 시작됐습니다.

토론 공간은 다릅니다. 화자의 발언에 대한 청자의 반응은 논리적 지지 혹은 반박입니다. 그리고 그 청자가 다시 화자가 되고, 화자는 다시 청자가 됩니다. 이걸 지켜보는 불특정 다수는 화자들의 논리적 깜냥을 평가합니다. 거침없이 말하다간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이해관계, 신념, 철학 따위가 조정되고, 운이 좋으면 절충점도 생깁니다. '선동적 연설'이란 말은 있어도, '선동적 토론'이란 말은 없습니다.

'연설 공간'의 홍준표와 '토론 공간'의 홍준표는 그렇게 달랐습니다. 연설 공간에서는 "노조를 때려잡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토론 공간에서는 "노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운을 뗐습니다. 정치 공간의 모양새는 정치인의 화법을 달리할 만큼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 국회 vs 소위원회

자연히 정치 공간의 대푯값인 국회를 연상하게 됩니다. 국회는 말이 차고 넘칩니다. 기자들은 의원 3백 명이 쏟아내는 말들을 받아치고 솎아내기 바쁩니다.

국회의 언론 창구인 정론관은 의원 자신의 의견을 언론 앞에 '연설'하는 공간입니다. 토론 상대가 없습니다. 각 정당별 아침 회의는 정당 수뇌부들이 당의 입장을 '연설'하기 바쁩니다. 정책을 논의하는 상임위원회는 각 정당이 서로 마주하고 있지만, 역시 '연설' 장소에 가깝습니다. 각 의원 별로 발언 시간을 부여하고, 의원들은 이 자리에 출석한 국무위원에게 되묻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연설'합니다. '갑'인 의원과 '을'인 국무위원은 동등한 토론 관계가 못됩니다. 의원끼리의 '토론'은 국무위원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진행됩니다. A의원이 국무위원에게 말한 내용을 B의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B의원은 자신의 발언 시간 때 국무위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식으로 반박합니다. 상임위에서 의원끼리 면 대 면으로 말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시비가 붙을 때입니다. 뉴스에서 의원 간 '토론'처럼 보이는 상임위의 발언들은 사실 이거 떼고, 저거 떼어 붙인 편집의 결과물입니다. '토론'이라고 표현하기도 멋쩍습니다.

국회에서 자주 나오는 거친 화법은 개개인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연설 공간으로 이뤄진 공간적 특성도 한 몫 한다고 진단합니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괘념치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언론 역시 이런 연설 공간이 얘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온건한 말보다는 막말이 기사쓰기 좋습니다. 그렇게 국회는 국회스러워집니다.

하지만, 국회에는 '국회스럽지 않은' 토론 공간이 있습니다. 상임위별 안에 모둠 형태로 꾸려진 소위원회입니다. 법안이 발의되면 그걸 가장 먼저 심의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는 여야 의원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토론을 합니다. 언론이 워낙 센 걸 좋아해서 주목을 받지 않을 뿐, 모든 법안은 각 상임위별 '법안 소위'의 토론 과정을 거칩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회의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소위원회는 보통 비공개입니다. 며칠 뒤 회의록으로 공개되는 게 전부이고, 의원들이 민감한 내용이라고 요청하면 회의록마저 공개되지 않습니다. 지켜볼 수 없으니 언론의 주목을 덜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위원회 실적이 국회의 질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믿습니다. 국회를 출입했을 때 드문드문 공개되는 소위원회를 보면서 의원 개개인의 자질과 역량을 평가하곤 했습니다. 발언의 세기보다 논리를 판독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소위원회가 잘만 돌아가고, 주목 받을 수 있다면, 국회가 덜 국회스러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홍준표 (사진=연합뉴스)
● '아는 사람' vs '모르는 사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 내보낸 기사 때문입니다.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국회에서 열린 회의 시간을 전수조사 했습니다. 그 결과, 의원 1인당 44시간 16분이 나왔습니다. 5개월이 그렇다는 소리니, 이걸 한 달로 계산하면 8시간 51분입니다. 나인 투 식스 일하는 일반 직장인과 비교하면 한 달에 딱 하루 회의 했다는 결론입니다. 기사가 나간 뒤 몇몇 국회 사람들에게 받은 메시지입니다. 

"'아는 사람'이 더 하네!"

국회 출입 경험이 있는 기자가, 그 속사정을 뻔히 '아는 사람'이, 단순히 회의 시간 통계를 내서, 한 달에 한 번 회의했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속사정 '모르는 사람'을 향해, 국회 혐오를 조장하는 기사를 쓸 수 있느냐는 서운함이었습니다. 

그 서운함 이해합니다. 법안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료도 많이 훑어야 하고, 준비할 게 많습니다. 개별 의원과 보좌진들의 집단 지성이 동원돼야 합니다. 아쉽게도 이런 노력은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회의 시간을 측정하는 시도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여성가족위원회는 같은 기간 119건, 58건의 법률안이 발의됐습니다. 나름의 준비를 해서 내놓은 법안일 겁니다. 하지만 단 한 건의 법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했습니다. 소위원회를 단 한 번도 열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없으니 토론이 없었고, 그렇게 국회의 질도 낮아졌습니다. 회의 시간을 측정한 것은 토론 공간에서 벌어지는 논의가 가장 중요한 '국회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국회의 질이 '회의'를 통해, 그리고 그 회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위원회'를 통해, 더 정확히는 '토론 공간'을 통해 담보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법안을 만드는 데 기울인 노력과는 별개로, 그 법안을 심의하고 토론하는 것, 그렇게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국회의 진정한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국회는 지금도 파행입니다. 여든 야든 각자의 자리에서 거친 연설을 내뱉습니다. 얼굴 맞댈 일이 거의 없습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이런 모습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국회가 '연설'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토론'으로 경쟁하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달 가기 전에 그 '존재의 이유'가 성취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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