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작침] ② 3.1운동에 '내란죄' 적용하려던 일제 - 100년 전 판결문을 통해 본 3.1운동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19.03.02 08:00 수정 2019.03.03 11:3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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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마부작침] ② 3.1운동에 내란죄 적용하려던 일제 - 100년 전 판결문을 통해 본 3.1운동
마부작침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함으로 조선인은 그 독립을 위하여 분기(奮起)하고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여 매진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조선독립운동을 선동하여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글을 저작하여....
- 손병희 외 47인 판결문에서

꼭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강압적인 일제의 주권 강탈 이후 9년 만에, 한민족은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외치는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은 당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한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인이 참가했으며, 이후 현 대한민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관련 형사사건의 당시 판결문을 분석했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수집·번역해 온라인에 원문과 함께 공개하고 있지만, 그 분량이 방대한데다 일제 당시 법률 용어와 개념이 낯설어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또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면 판결문 자체가 없다. 이를테면 시위 과정에서 일제에 살해됐거나 즉결심판 처분을 받은 경우엔 판결문이 아예 없는 것이다. 3.1운동 참가자 상당수가 누락됐을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주로 남한 지역 법원의 판결문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북한 자료들은 빠졌을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 일제 재판소의 판결인만큼 독립운동에 대해 일제의 불온한 시선과, 일제의 법 체계에 따른 불법-위법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라는 점은 이번 분석의 분명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3.1운동 참가자들의 신상 정보와 참가 일시·장소 같은 사건 정보는 물론, 구체적인 활동상이 상당히 담겨 있다는 점이 [마부작침]이 이번 분석에 뛰어든 이유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시각에 따른 자료라는 점을 엄중히 전제한 뒤, 본 분석을 활용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한국독립운동사략> 등 우리 측 기록이 역사적 의의가 크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일제의 기록을 통해서 드러나는 3.1운동의 단면들도 의미가 적지 않다. 3.1운동 판결문에서 담긴, 조선의 숱한 필남필부들의 3.1운동 모습은 어떠했을까. 일제는 그들에게 어떤 죄목을 적용해, 얼마의 형량을 부과했을까. 재판은 얼마나 불공정하게 진행됐을까. [마부작침]의 이번 분석은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은 지난 2014년, 3.1운동 판결문이 포함된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판결문을 통하여 3.1운동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며 "일제 측의 기록이지만 3.1운동 연구와 3.1운동사에 중요한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마부작침]이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을 일제의 판결문 1,699개라는 프리즘을 통해 탐색해본다.

▶1편 보기: ① 또다른 '유관순들' 715명 – 100년 전 판결문을 통해 본 3.1운동

● 3.1운동에 '내란죄' 적용하려던 일제

"전 조선인에게 그 평화의 교란을 선동하고 연이어 조헌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개시케 하고, 게다가 해당 독립운동이야말로, 마침내 감화되어 폭동을 하기에 이른 자가 있음을 예지하면서…"
-손병희 외 47인 판결문에서

일제는 3.1운동 참가자들에게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중형을 가해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시위를 억제하려 했다. 위에 언급한 '손병희 외 47인'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3.1운동 참가자를 일제가 어떻게 처벌하려 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은 이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한다며 최상급심 법원인 고등법원에서 관할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내란죄는 '정부를 전복하거나 방토를 참절하고 기타 조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범죄'로 고등법원 단심으로 판결했다. 주도자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현재 대한민국 형법에서도 내란죄에 대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를 대상으로 수괴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하고 있다.

하지만 8개월 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해당 사건 관할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다시 지정했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보안법과 출판법 등을 적용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마부작침]이 분석한 3.1운동 관련 판결문 1,699개 가운데 일제가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던 판결문은 모두 7건에 피고인 298명이다. 사건만으로 보면 '손병희 등 48인 사건'을 포함해 '경기도 수원군', '경기도 안성군', '평안북도 강계군', '황해도 수안군' 사건 등 모두 5건으로 확인됐다. 고등법원은 이들 사건 모두 내란죄는 아니라며 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일제 입장에서는 3.1운동을 내란죄로 강하게 처벌해 진정시키고 싶어도 당시 시위가 독립선언서 들고 다니고 만세를 외치면서 평화적으로 행진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란죄 적용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3.1운동 참가자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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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관련 판결문에 등장하는 죄명은 40개가 넘는다. 죄명 여러 개를 동시에 적용받는 경우도 많았는데, 가장 많은 죄명은 '보안법 위반'이다. 피고인 7,965명(3심제 따라 중복 포함) 가운데 89.4%, 7,117명이 보안법을 적용 받았다. 형법의 소요죄가 24.6%(1,960명), 출판법 위반이 16.2%(1,291명)로 그 뒤를 이었다. 일제는 내란죄 적용 시도와 별도로 3.1운동 대응을 위한 법도 만들었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제7호). 3.1 독립선언 이후 한 달 반이 지난 4월 15일 공포됐다.

보안법은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하거나 타인을 선동하는 행위 등을 규제했는데, 최고 형량이 2년에 불과했다. 반면 '제령 제7호'는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로 대상을 규정해 다수에 해당하기는 하나 구체적인 행위와 결과 없이 의도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최고 형량도 10년으로 대폭 늘렸다.

소요죄는 다중이 모여 폭행 또는 협박한 행위를 대상으로 했다. 출판법 위반은 허가를 얻지 않고 출판한 저작자와 발행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단순히 독립만세를 부르거나 시위에 참여하면 보안법 위반, 폭력 시위로 이어졌다면 소요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거나 배포한 행위는 출판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3.1운동 참가자들에겐 대부분 이 세 가지 죄명 가운데 하나 이상이 적용됐다.

앞서 설명한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받은 피고인은 343명(4.3%)으로 분석됐다. 이외 살인이나 방화 등 나머지 죄명은 대부분 시위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들이 많았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만으로는 예심에서 고등법원 판결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 지역에 위치한 법원의 판결문이 빠져 있고 심급별로도 누락된 판결문이 있기 때문이다. 3.1운동 참가자의 죄명과 형량을 살펴보는 데는 조선총독부 법무국이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사건처분표' 자료를 참고할 만하다. 1919년 3월 1일부터 12월말까지 각 재판소에서 처리한 사건 가운데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것을 정리한 이 자료에 따르면 3.1운동 관련 전체 유죄 판결의 71.7%가 보안법 위반, 21.8%는 소요죄, 출판법과 제령 제7호 위반은 각각 3.5%와 2.1% 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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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형사사건 피고인 7,965명(3심제에 따라 중복 포함) 가운데 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4,259명이다. 1심 지방법원에서 평균 징역 1년이 선고됐고, 2심 복심법원에서는 평균 1년 4개월, 3심 고등법원에서는 평균 1년 7개월의 형이 선고됐다. 징역형 다음으로는 태형이 많았다. 태형은 십자형 형틀에 눕혀 태로 볼기를 치는 방법으로 16세 이상 60세 이하 남자에게만 하루 1회, 30대까지만 집행하도록 규정돼 있었는데, 3.1운동 관련 피고인들에겐 평균 87대의 태형이 선고된 것으로 분석됐다. 벌금형과 구류, 금고 등이 뒤를 이었다.

최다 적용 죄명인 보안법 위반(7,117명)의 경우 3,903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형량은 평균 1년 1개월이었다. 최고령 피고인인 천선재(당시 78세)는 동네 사람 3명에게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한 것만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3.1운동 참가를 여러 사람에게 권했다는 이유로, 장날에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도 1년 넘게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출판법 위반은 징역 1년 3개월, 소요죄는 1년 11개월이 평균 형량으로 분석됐다.

장 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007년 발표한 논문 <삼일운동과 조선총둑부의 사법 대응>에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형량은 시위의 폭력성 여부, 독립선언서의 제작·반포 유무에 크게 좌우되었다"며 "이 때문에 3.1운동을 기획한 33인을 포함한 48인보다, 위력을 과시한 시위에 참가한 다수의 민중이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 [마부작침]은 왜 3.1운동 판결문을 집중 분석했나

3.1운동은 당시 전체 인구 2천만 명의 10%가 넘게 참가한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조선총독부 집계만 봐도 50만 명이 참여하고 7,500명 넘게 사망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재판소 기록이긴 하나 판결문은 숫자 이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이며, 판결문이 공개돼 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해 좀 더 보기 쉽게 하는 노력은 아주 활발하진 않았다. [마부작침]은 이제까지 3.1운동에 대한 숱한 연구와 보도에 '판결문 분석'이라는 작은 노력 하나를 더 얹고자 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3.1운동의 기초자료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과 연동해 제공하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공개했다.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참여한 이홍구 국사편찬위 사료연구위원은 "소요사건 관계서류나 외무성 기록은 간단하게 1차 보고하는 문건인데 판결문은 해당 시위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자료"라면서 "일제의 시각에 의해 사건을 규정한 것으로 이번 데이터베이스에도 판결문 자료를 사건개요 정리 등에 많이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일제가 그래도 두드러진 인물이라 생각해 체포한 사람들이 판결문에 담긴 것이니 전체 참가자 규모를 파악하기에는 좋은 자료가 아니고 고문을 당했다든가 하는 실제 겪었던 고초는 담겨 있지 않다"고 자료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당대에 다른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판결문은 최후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고 보훈처도 판결문이 없으면 보훈처 심사를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1906년부터 1945년까지 형사사건 피고인 19,167명에 대한 것이다. [마부작침]은 판결일 기준 1919년 3월 1일~1920년 12월 31일, 사건 개요에 '만세', '독립' 중 1개 이상을 포함한 판결문을 추려냈다. 또 개별 판결문을 일일이 읽어 3.1운동과 직접 관련 없는 건 제외했다. 그렇게 선정한 '3.1운동 판결문'은 1,699개, 여기에 등장하는 피고인은 5,922명이다.

[좀더갈자]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태형령]을 선포했다. 즉결 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일본인에게는 구류나 과태료형을 부과하고 조선인에게는 태형을 실시한다는 차별적인 법령이었는데 비용 절약과 신속한 처벌이 법령을 만든 주된 이유였다. 판결문을 보면 3.1운동 참가자 중에도 353명은 태형에 처해졌다.
-정식 재판 외에 헌병경찰에 의한 즉결심판이 있었다. 즉결심판은 경찰서장이나 경찰분서장을 맡은 일본 헌병분대장이 피고인 진술을 듣고 조사한 뒤 즉시 판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판결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형에 처해진 상당수는 즉결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1912년부터는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 3급 3심제가 적용됐다. 그러나 3.1운동 사건 피고인이 2심 결과에 불복해 상고 신청한 건 거의 전부가 기각됐다.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김학휘 기자 (hwi@sbs.co.kr)
안혜민 기자·분석가 (hyemin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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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