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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고시엔이 뭐길래

-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시엔

[월드리포트] 고시엔이 뭐길래
8월 21일 100회 전일본고교야구선구권대회 결승
● 일본 고교야구 열풍

일본의 고교야구 열기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흔히 고시엔이라고 부르는 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 무더운 일본 여름철 최대 볼거리다. 올해는 8월 5일 시작해 21일에 끝났다. 3,781개 고등학교가 참가한 예선을 통과한 56개 고등학교가 각 지역을 대표해 열전을 치렀다. 우승은 전통 명문 오사카 토인고등학교. 대회가 끝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기저기서 고시엔 관련 뉴스가 이어진다.

숫자 따지기를 좋아하는 일본이라 올해 고시엔은 더 각별했다. 햇수로는 103년이지만 전쟁 등으로 빼먹은 해가 있어 이번이 100회. 살아 전에 다시 100으로 끝나는 고시엔을 볼 수 없으니 너도나도 열광했다. NHK는 전 경기를 다 중계했고 TV 아사히를 포함한 주요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대회 전부터 연일 특집 프로그램과 기사를 쏟아냈다. 과거 대회의 명장면은 물론이고, 고시엔을 빛냈던 스타들이 거의 모두 소환됐다.
고시엔 결승전을 응원하는 아키타 시민들
고시엔 본선이 시작되자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사상 최대라는 올여름 폭염도 고시엔 열풍을 막지 못했다. 올해 고시엔 관중 숫자는 92만 7천 명.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340명 넘는 관중이 온열 질환으로 쓰러졌지만 프로야구 한신타이거스의 본고장인 고시엔 구장은 연일 만원이었다. 그런 만큼 날마다 승리의 환호성과 패배의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본선에 진출한 56개 고등학교 하나하나가 다 구구절절한 뒷이야기의 주인공들이었다.

시골학교의 반란. 그 많은 사연들 가운데 단연 압권은 아키타현 대표로 출전한 공립 가나아시 농업고등학교. 일본 혼슈 최북단 아키타라는 시골 학교, 재정적으로 가난한 공립학교에다 일종의 특수학교인 농업학교라는 점이 맞물리면서 스토리를 좋아하는 일본인들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전교생 500명의 작은 학교. 이 정도만 해도 흥행요소를 이미 갖춘 학교다. 이 시골 공립 농업학교가 일을 크게 내버렸다.
잡초군단 가나아시 농업고등학교를 응원하는 현수막
아키타, 103년 만에 다시 준우승. 1915년 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아키타 고등학교가 결승에 오른 뒤 103년 만에 다시 아키타 출신 고등학교가 결승에 올랐다. 물론 가나아시 농고는 본선에서 우승 후보로 전혀 꼽히지 못했다. 그런데 극적인 승리를 연달아 거둬 대망의 결승에 올랐다. 평균 전력이 일본 최고라는 야구 명문 오사카 토인고등학교에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8강부터 고시엔 뉴스의 주인공은 가나아시 농고였다. 전국에 있는 농고 학생들에게 꿈을 줬다. 자부심을 심어줬다라는 말부터 아키타 현 전체에 엄청난 선물을 안겨줬다는 찬사를 다 들었다. 농사 실습을 하는 학교답게 '잡초혼'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결승전을 앞두고 곳곳에서 '잡초혼으로 우승을'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물론 우승은 최강호라고 불리던 오사카 토인고교의 높은 벽에 가로막혔다. 오사카 토인은 고시엔 역사상 최초의 봄, 여름 대회 동시제패를 두 번째로 기록한 사상 최초의 학교가 됐다. 오사카 토인고교는 전국 각지에서 야구 유망주를 스카우트하는 전통의 명문 사립고등학교다. 주전 타선은 웬만한 대학교 중심 타선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초절정 강호다. 그런데도 일본 언론은 가나아시 농고의 준우승에 더 무게를 실었다. 센 학교가 우승한 것보다 약체로 분류되던 시골 고등학교의 분투를 더 높이 샀다. 아키타현은 눈이 많이 오는 북쪽 지역이다. 11월부터 3월까지는 눈 때문에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이겨낸 잡초들이라서다.
눈 덮인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가나아시 농고팀
선수층도 얕아 요시다 코세이라는 3학년생 주전투수가 예선 5경기를 혼자 완투하고 본선에 올라온 게 가나아시 농고다. 요시다는 본선에서 결승에 오를 때까지 다시 5경기를 홀로 완투했다. 투구 수만 749구. 8월 17일과 18일에는 연 이틀 164구, 140구를 던지면서 혹사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결승에서는 결국 피로누적으로 상대팀 토인 고등학교 강타선에 난타당한 다음 6회에 마운드를 넘겨줬다. 그래도 요시다가 2주일 동안 던진 투구 수는 무려 881구. 고시엔 역사상 번째를 기록했다. 요시다 코세이는 웃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결승에서 패한 다음에야 눈물을 쏟아냈다. 혼자서 예선 포함 본선 결승까지 11경기 가운데 10과 1/2경기를 혼자 감당한 것이다.
가나아시 농고 주전투수  요시다 코세이
당연히 아직 미성년인 고교생을 이렇게 혹사시켜도 되냐는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본 스포츠 전문지인 일간스포츠가 여론조사를 한 결과 문제 없다가 49%, 문제 있다가 51%로 나타났다. 96년 봄에는 다카츠카 노부유키라는 선수가 다섯 경기를 선발 등판했다 어깨 부상을 입어 큰 논란이 일었고 이번에도 이른바 주전투수 혹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요시다는 백 년 사상 유례없는 혼자던지기를 시전 했다. 그럼에도 늘 웃는 얼굴로 피로를 감춘 요시타 코세이는 전국적인 유명 스타가 됐다. 요시타는 주니어 일본대표로 선발된 뒤에도 아직 어깨 관리를 받고 있다.
가나아시 농고 야구팀에 성금을 보내기 위해 줄을 선 아키타 시민들
16강만 가도 다행이라는 가나아시 농고의 고향 아키타현 분위기는 8강, 4강을 거치면서 거의 광분 수준으로 달아올랐다. 예상보다 야구팀이 선전하면서 먼 거리를 (아키타현에서 고시엔 구장 까지는 902킬로미터 거리, 정말 멀다. 비행기를 타도 꼬박 반나절이 걸린다.) 달려간 응원단과 선수들이 써야 할 경비가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동문들과 지역주민들이 바로 모금에 나섰고 무려 1억 9천만 엔(우리 돈 19억 원가량)이 순식간에 걷혔다. 농업이 주력 산업인 아키타현의 사정을 감안하면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죽하면 대회가 끝난 뒤에도 쏟아지는 후원금을 놓고 가나아시 농고 교장이 "우리는 공립학교라 더 이상 많은 돈을 보내주시면 곤란하다. 지금 걷힌 돈을 잘 쓰겠다." 며 답지하는 성금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혼연일체가 된 지역 주민들의 성원과 보라색 모자를 상징으로 내세운 가나아시 농고 응원단의 진심 어린 응원은 일본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후원에 용기백배한 가나아시 농고는 3회전과 준준결승에서 짜릿한 역전승으로 고향 주민들의 얼을 빼놓았다. 22일 가나아시 농고 선수단이 비행기 편으로 아키타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이 문을 연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 이들의 자랑스러운 귀향을 뜨겁게 환영했다.

고시엔이 남긴 것 가나아시 농고와 오사카 토인고교의 결승전을 끝으로 100회 고시엔은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 고시엔의 여운은 유달리 길게 이어지고 있다.
라이벌에서 국가대표로 다시 만난 고시엔의 주역들
우선 고시엔에서 대결했던 각 학교 선수들 가운데 주전들이 U-18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돼 다시 만났다. 이들은 최근 대학생 대표들과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언론은 100회 고시엔 영웅들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함께 입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훈련하는 모습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앞서 언급한 투수 혹사 논란이다. 고시엔에서는 요시다처럼 철완 소리를 들으며 혼자 엄청난 투구를 하는 경우가 가끔씩 나온다. 이번에도 최고시속 150킬로미터의 직구를 자랑하던 요시다가 결승에서 무기력하게 얻어 맞은 건 결국 어깨 혹사에 따른 피로가 누적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아무리 청춘이고 학교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고 해도 이제는 어른들이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선 고교 특히 공립학교들은 선수 부족을 호소하면서 반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선수 보호를 위해 투구 수 제한 같은 제도가 도입되면 선수층에 여유가 있는 사립 명문학교들만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투혼을 강조하는 고시엔 전통은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세 번째는 무더위와의 싸움이다. 이번 고시엔 대회 기간 중 구장 곳곳에 주의문이 나붙었다. 전례 없는 무더위에 경기장 내 의무실을 찾는 온열질환 환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면서 열사병,일사병 예방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대회가 끝난 뒤 앞으로 지구 온난화 때문에 폭염이 더 심해질게 자명한데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네 번째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고교 야구를 유지하려면 지금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일본 특유의 호들갑이 시작됐다. 아직 3천7백개가 넘는 고교 야구팀을 갖고 있고 프로야구 인기가 모든 스포츠를 압도하는 일본이다. 그런데도 벌써 100년 뒤를 고민하자는 거다. 200회 고시엔이 제대로 열릴지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어떤 전문가의 기고문을 보고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물론 고시엔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다. 대회를 진행하는 분위기에서 군국주의의 암영이 느껴진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청소년인 선수들이 마치 군인처럼 교가를 부르고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게 과연 최선이냐는 물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여름 고시엔에 빠져든다.

도대체 고시엔이 뭐길래 이렇게 열광하는지 40대 초반 일본 지인에게 물어봤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젊은 고등학생들이 최선을 다하다 때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 모습을 보면 스스로의 청춘과 꿈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철학적인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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