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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있지도 않은 남편 숨겼다고 매질"…제주 4·3, 그날의 기억

송욱 기자 songxu@sbs.co.kr

작성 2018.04.03 14:59 수정 2018.04.05 11:0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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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리포트+] "있지도 않은 남편 숨겼다고 매질"…제주 4·3, 그날의 기억
관련 사진오늘(3일) 오전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있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라는 주제로 열린 추념식에는 4·3 생존자와 유족 등 1만5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추도사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문 대통령은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리포트+에서는 제주 4·3에 대해 짚어보고 당시의 끔찍한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 제주도 인구 10분의 1 목숨 잃어…4·3, 그날의 기억

정부 기구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지난 2003년 12월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으로 인해 생긴 희생자는 약 3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입니다. 도대체 '그날'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제주 4·3에는 1948년 4월 3일을 반영해 '4·3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간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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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1945년 광복 이후, 일본군이 떠난 제주도는 미군정 하에 놓인 상황이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있었던 3·1절 기념행사 직후 있었던 집회였습니다. 당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있었는데 경찰이 이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에 집회에 참석 중이던 군중은 돌멩이를 던지며 경찰을 쫓아갔습니다.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한 경찰은 군중들에게 발포를 시작했고 이 일로 6명이 사망, 8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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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경찰의 민간인 발포) - > 전개1(민관 총파업)당시 제주도민들 사이에는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제주도를 떠난 6만 명이 돌아오면서 일자리가 부족해진 데다가 극심한 흉년과 식량난으로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발포 사건이 터지자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반발의 움직임이 거세졌습니다.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에 있는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외치며 경찰서와 우익단체 등 12곳을 습격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1월 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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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2(무장대 토벌대 무력충돌) -> 전개3(마을 주민 학살)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계속됐고 이를 진압하려는 토벌대와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됐습니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무장대를 돕는다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고 무장대도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주민들을 살해했습니다.

■ 진상조사보고서 나왔지만…'잃어버린 9년'에 눈물 흘린 유족들

1954년 9월 21일, 4·3은 마무리됐지만 가족 잃은 고통은 연좌제로 돌아왔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고도 감시를 당했고 군인이나 공무원 등 각종 시험에서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주 4·3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됐습니다. 김대중 정권이었던 1999년 12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완성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 권력의 잘못"이라며 현역 대통령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습니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여간 제주 4·3은 다시 잊혀 갔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은 4·3 희생자 추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 전 대통령은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이렇다 보니, 4·3 희생자와 유족들은 두 전직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잃어버린 9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총 맞고 죽창에 찔렸는데"…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제주 4·3으로 숨진 주민만 해도 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도 적절한 배상이나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기억하는 희생자들은 여전히 상처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고순호 할머니는 올해 93살이지만 70년 전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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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호 할머니] (할머니 사진)
"결혼을 안 했는데도 남편을 내놓으라고 하고, 내가 있지도 않은 남편을 폭도로 산에 보냈다고 하면서 경찰이 때렸어요. 난 이미 매를 맞아서 잘 움직이질 못했는데 밤에는 남로당 무장대가 죽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어요" /낮에는 군경 토벌대가 들이닥쳐 있지도 않은 남편을 숨겨뒀다며 사정없이 매질했습니다. 날이 저물면 또 다른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산에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마을로 내려와 할머니를 괴롭힌 겁니다.

고 할머니는 총에 맞고 죽창에 찔린 상처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누가 가해자인지 밝히지 않는 역사의 침묵 속에 보복이 두려워 수십 년을 침묵했습니다. 게다가 고 할머니는 당시 병원기록이 없어 4·3사건 희생자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몰랐던 산마을 주민들이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된 겁니다. 제주한라대학교 방송영상센터 김동만 교수는 SBS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희생자에 대한 배상, 보상의 문제를 이번에 특별법에 담아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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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안상우 기자]
"4·3의 희생자는 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1만 4천여 명. 이들은 매달 50만 원의 지원금이라도 받지만, 나머지 희생자는 홀로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희생자들의 한과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 이후 진척이 없는 4·3 진상 규명이 계속돼야 합니다" //(취재: 안상우 /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안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