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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연만 날려도 조선인이면 처벌…日 사법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

[리포트+] 연만 날려도 조선인이면 처벌…日 사법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
오늘(1일)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새기는 삼일절입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전 국민이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어느덧 99번째 삼일절을 맞이했는데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3·1운동 99주년을 맞아 '근대 사법제도와 일제강점기 형사재판'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근대적 사법체계가 자리 잡은 과정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법적으로도 핍박받은 우리 민족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3·1운동 등 독립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끔찍한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 "곤장으로 벌하라"…'조선태형령' 일제강점기 악법인 이유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처벌하는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홍종현, 조병진, 조재복 등 세 명은 경북 영천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운동을 하던 중 체포됐습니다. 홍종현은 대구지방법원 1심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조병진과 조재복은 방조죄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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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현 등 3인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
태형(笞刑)이란 작은 곤장이나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악법 중 하나입니다. 일본은 1912년 3월 18일 '조선태형령'을 공포했습니다. 태형은 식민지 질서에 대항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만 적용됐습니다. 교정(矯正)에 드는 비용을 아끼는 동시에 조선인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담긴 겁니다. 당시 같은 죄를 저질러도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에게는 구류 또는 과료형이 내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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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제6조 태형은 태로 엉덩이를 때려 이를 집행한다
제13조 본령은 조선인에 한해 이를 적용한다
즉결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당시 상황: 일본인은 구류 또는 과료형 - 조선인은 태형 //
■ '연날리기', '돌 던지기'만 해도 처벌…독립운동 뿌리 뽑으려 했던 일본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에게 적용된 차별적 사법제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태형뿐만이 아닙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은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려는 조선인들을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1912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가 만든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르면, 대중을 모아 관공서에 청원을 하거나 불온한 책 등을 배포하는 사람은 처벌받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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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범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에 따른 처벌 대상><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 함부로 대중을 모아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을 하는 자 -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한 문서, 도서, 시를 게시·반포·낭독을 하는 자 - 전선에 근접해 연을 날리거나 기타 전선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자 - 돌 던지기 등 위험한 놀이 또는 공기총 등을 가지고 노는 자 // " data-captionyn="N" id="i201156114"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80228/201156114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처벌 대상의 범위는 생각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명확하게 일본에 저항하는 조직적 행위가 아니더라도 전선 근처에서 연을 날리거나 돌 던지기, 공기총 등을 가지고 놀면 처벌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이면 모두 불법 행위로 규정한 겁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퍼지자 여기에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일본은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따로 제정해 2년이던 형량을 10년까지 늘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본령은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죄를 범한 제국 신민에게도 역시 적용'한다고 명시하며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 "내일도 독립만세를 외치겠다"…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

이 같은 일제의 차별적 사법 제도와 탄압에도 우리 민족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은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끌려가 재판받을 당시에서도 이들이 독립에 대한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쌀을 파는 미곡상(米穀商)이었던 30살 이도상 씨는 시장에서 학생들을 선동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요. 그의 판결문에는 독립운동을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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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조선의 독립을 계획하였는데 내일 조선독립을 부르며 만세를 외칠 작정이다…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그만둘 수 없다."
-미곡상 이도상의 판결문 中(경성지방법원, 1919년 4월 11일) //
99년이 흘러 일제의 끔찍한 탄압은 기록으로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힘썼던 독립투사들의 정신은 기록뿐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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