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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선시대의 패딩, 누비 솜옷의 가격은?

[취재파일] 조선시대의 패딩, 누비 솜옷의 가격은?
한껏 멋을 낸 양반이 길거리에서 기생들과 수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앙상하고 차림새를 보면 한겨울입니다. 남성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남바위라는 방한모입니다. 정수리 부분을 둥글게 트고, 좌우로 길게 늘어뜨려 귀와 목을 따뜻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겉감은 밤색 비단, 안으로는 짐승 가죽을 덧댄 고급품입니다.

기생들이 입은 저고리는 짧게 올라오고 소매 폭이 좁습니다. 18세기 복장입니다. 가운데 여성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도 남바위입니다. 그림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여성들은 산호 구슬과 분홍색 술로 장식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 (작가 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영국 화가인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정월 초하루 풍경을 묘사한 목판화에도 남바위가 등장합니다. 어머니가 두 자녀와 함께 고궁 나들이에 나섰는데 모두 남바위를 썼습니다. 금박으로 수를 놓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습니다. 해태상 근처 인물들도 한결같이 남바위를 착용한 걸 보면 당시 대유행이었나 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목판화 '정월 초하루'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풍속화가나 서양인 눈에 비친 조선의 겨울은 이렇게 평화롭고 따스해 보입니다. 유명 박물관이나 복식 전시회에 가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 남성들은 갖옷이나 중치막, 누비솜옷, 풍치, 여성은 무명 저고리와 치마, 솜버선, 아얌, 조바위니 하는 각종 방한 의류를 착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갖옷
풍차
아얌
솜버선
휘항
명주겹솜누비직령포 (사진=충북대박물관 소장)
이건 어떤가요? 앞서 본 풍속화에서 엑스트라로 나오는 보부상과 여종의 차림입니다. 엄동설한에 짚신을 신었고, 외투 대신 옷을 껴입고 발목에는 행전을 쳤습니다. 같은 남바위인데 천 조각만을 이어 붙였거나 대충 머리에 둘둘 말았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안보연 학예사는 "조선 초기만 해도 털모자는 양반들만 쓸 수 있었는데 점차 귀천에 상관없이 확대됐다"면서 "양반의 털모자는 수입산 담비나 붉은 여우 털을 썼고, 서민들은 개나 고양이, 토끼털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풍속화 중 '여종'과 '보부상'
당시 서민들의 겨울나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솜옷과 솜버선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솜옷의 원료인 목화는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3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재배에 성공했습니다. 각종 민속학 관련 사전이나 자료들은 이 목화 덕분에 조선 팔도의 서민들이 추위에서 해방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목화는 삼베와는 달리 따뜻한 삼남 지방에서만 재배되는 까다로운 작물이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과 성종이 목화를 이북 지방에까지 재배하도록 장려했지만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11월 19일 기록을 보면 대사간 박안성 등이 "평안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솜옷을 입은 이가 없는 실정"이라며 "병졸들을 강제로 내보내어 눈을 무릅쓰고 정벌케 나가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왕에게 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중종 20년(1525년)에는 함경북도 병사 이기가 "길주 명천 경성 등 지역에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4~5자씩이나 쌓이는 큰 눈이 내려 경성에서만 얼어 죽은 사람이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북쪽 지방에 국한된 이야기였을까요? 동사하는 일은 수도인 한양에서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연산군 4년(1498년) 기록을 보면 "숭례문 밖에서 얼어 죽은 사람이 있사오니 산판을 오르내리면 어찌 얼어 죽은 자가 없사오리까"라면서 밤 사냥을 중단해달라고 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170여 년 후인 현종 11년에도 관리들이 "한양 성 안에 도로에서 얼어 죽은 자가 많다"며 왕에게 고하니 "의지할 데가 없어 얼어 죽게 된 자에게는 유의나 옷감을 지급하라"고 지시하기도 합니다. 실록 곳곳에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나오듯이 "수직하는 병사나 죄수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빈 가마니를 지급하라"는 왕의 지시가 실려 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래도 조선 후기엔 사정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무엇보다 1608년 광해군 때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 이뤄진 대동법 시행으로 면제품이 상품으로 유통됐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특산물 대신 쌀을 내도록 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무명, 삼베로도 낼 수 있도록 했던 겁니다. 당시 무명 1필(폭 32cm X 길이 16m)은 쌀 5~8말 정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쌀이 워낙 귀했던 시절이라 남부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베틀을 들여놓고 무명 옷감을 짜는 일이 아낙들의 일상이었습니다.
▲ 나주 샛골나이 (무형문화재 제28호)
 
다시 의문이 듭니다. 당시 솜옷 가격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평민들도 감당할 만한 가격이었을까요?

풍속화가 그렇듯이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 기록들도 관리나 양반들 시각에서 쓴 것이어서 서민들의 삶을 직접 묘사한 부분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겨우 찾아낸 자료를 통해 추론해 보죠.

전북 고창 출신의 18세기 학자 황윤석(1729~1791)은 자신이 10살부터 63살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이재난고>라는 일기로 남겼는데요. 여기에 무명 옷감 사이에 솜을 넣어서 누빈, 오늘날 패딩에 해당하는 '누비 솜옷' 가격이 나옵니다. 양반이 입던 고급 누비솜옷은 상평통보 4냥, 평민이 입던 속칭 'B급 누비솜옷'은 2냥을 주고 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B급 누비 솜옷 2냥'의 가치는 오늘날 원화로 얼마나 될까요? 쌀값을 매개로 추정해 봅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정한 쌀 가격은 1섬(약 144kg)에 5냥이었습니다. 지난해 3월 우리 통계청이 발표한 20kg짜리 쌀 현지 가격은 3만 2천 원입니다. 1섬 가격으로 환산하면 23만 400원인 거죠. 당시와 오늘날 쌀 가치가 같다고 가정할 경우, 쌀 1섬=5냥=23만 400원인 셈입니다. 즉 상평통보 1냥은 원화로 4만 6천 80원 정도인 겁니다.

이렇듯 서민들이 'B급 누비 솜옷' 1벌을 사려면 2냥, 오늘날 원화로 9만 2천 16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재난고>에서 머슴의 한달 월급이 7냥 정도라 했으니, 8일 하고도 반나절을 죽어라 일해야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평민들로선 막사서 입기에는 많이 비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찌 어찌해서 솜옷 한 벌을 구해도 다 해질 때까지 기워가며 버티거나 자식, 형제들에게 물려 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뭔가 낭만스러워 보이던 조선 시대의 겨울 환상이 깨지나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입니다. 속옷에 티셔츠 몇 겹, 다시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롱패딩으로 무장해도 매서운 바람을 막아 내기가 어렵습니다. "배 부르고 등 따시면 최고"라고 했던 조선 서민들의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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