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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부서진 문 물어내"…손해배상 소송에 사비 터는 소방관들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7.09.18 17:06 조회 재생수7,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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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리포트+] "부서진 문 물어내"…손해배상 소송에 사비 터는 소방관들
강원도 강릉 석란정에서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 2명이 안타깝게 순직하는 사고가 어제(17일) 일어났습니다. 강릉소방서 경포 119안전센터 소속 59살 이영욱 소방위와 27살 이호현 소방사는 석란정 화재 현장에서 잔불을 정리하던 중 정자 지붕이 무너져 내리면서 매몰됐습니다. 동료 대원들이 급히 구조에 나섰지만 두 소방대원은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소방청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 동안 임무 중에 현장에서 숨진 소방관은 49명에 이릅니다. 이렇게 목숨이 오가는 진화 작업도 힘들지만 소방관들이 물건을 파손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화재 진압이나 구조 활동 중에 일어난 일로, 손해 배상 등 각종 소송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장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문이나 깨진 유리창을 직접 사비로 보상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우리 집 문 부쉈으니 돈 줘요"…각종 소송에 시달리는 소방관들

소방관들은 아파트 화재 등이 발생했을 때 구조 업무 지침에 따라 화재 진압과 인명 대피라는 두 가지 임무를 가장 먼저 수행합니다. 안전을 위해 화재가 발생한 가구뿐만 아니라 이웃 주민도 대피시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는 집은 소방대원들이 문을 강제로 열고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이나 사유재산이 파손됐다는 이유로 변상 요구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이 수십 명에 달합니다.
"우리 집 문 부쉈으니 돈 줘요"…각종 소송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화재 진압 등으로 발생한 기물 파손을 변상하라"는 요구가 54건 접수됐습니다. 부서진 문을 변상하라는 민원이 43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차량 3건, 에어컨 실외기 2건, 간판·차양막·모기장이 각 1건씩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 "벌집 없애다 나무 태웠으니 물어내라"…몇백만 원까지 사비로 충당

변상해달라는 항의를 받으면 소방관들은 집주인을 찾아가 "불 끄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니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약식 소송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소송이 시작되면 판결까지 최대 6개월이 걸립니다. 이 과정에 부담을 느낀 일부 소방대원들은 사비로 변상하기도 합니다.

정은애 전북 익산소방서 팔봉 119안전센터장은 지난 15일 SBS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김성준의 시사전망대'에서 소방관들이 사비를 모아 변상했던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정은애 / 전북 익산소방서 팔봉 119안전센터장]
"벌집을 제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토치램프 등으로 소각을 하는 겁니다. 그때도 나무에 벌집이 있어서 제거하다가 나무를 좀 태웠거든요. 그런데 그 나무가 몇천만 원짜리 나무니까 보상을 하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당시 저희가 사정하고 부탁해서 몇백만 원 정도로 합의했고 돈을 걷어서 보상했습니다."
"벌집 없애다 나무 태웠으니 물어내라"…몇백만 원까지 사비로 충당정 센터장은 "구조활동을 위해 베란다 문을 부수거나 유리창을 깬 소방대원들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일은 종종 있다"며 "합의가 안되면 다시 민원이 들어오고, 민원이 들어오면 소방관들도 힘들기 때문에 개인 돈을 모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 구급차에서 뛰어내린 만취 여성…소방대원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민·형사 소송에 시달리는 소방관들도 있습니다. 국민안전처 산하 중앙소방본부가 파악하고 있는 민사·행정소송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34건에 달합니다. 이는 중앙소방본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으로 전국 현황은 파악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도 7건의 소송이 있었는데 대부분 소방대원 출동 중 교통사고 문제였습니다.

지난 2014년 인천에서는 만취 상태인 40대 여성을 구급차로 이송하던 중 여성이 구급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뒤에서 오는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유족은 당시 출동했던 구급대원 A 씨의 부주의로 여성이 숨졌다며 대원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냈습니다. A 대원은 소송에서 이겼지만 모든 비용을 홀로 부담해야 했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지금까지도 구조 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충남에서 소방차와 택시가 충돌하면서 택시 기사가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운전자인 소방대원 김 모 씨는 수년간 민사소송에 드는 돈을 모두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구급차에서 뛰어내린 만취 여성…소방대원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구조 활동에 위축되는 소방관…법적인 제도 마련 시급하다

화재 진압이나 구조 활동 중에 발생한 사유재산 파손, 사고에 대한 책임은 모두 소방관들에게 있는 걸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소방기본법에 따라 소방 활동 중 소방관이 일으킨 물적 손실은 모두 국가가 보상해야 합니다. 구조나 구급 활동으로 인한 손실은 시·도가 가입한 배상책임보험으로 바로 보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화재는 배상책임보험에 가입이 안 돼 있기 때문에 국가가 보상할 수 있는지를 법정에서 가려야 합니다. 민·형사 소송에 휘말릴 경우 소방관들의 부담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등에서 법률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소송 비용은 대부분 소방관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급차와 소방차 등이 긴급 출동을 하다 사고를 내도 정상참작만 가능할 뿐 면책 규정은 없습니다. 지난해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면책 내용을 담은 소방법 개정을 발의했지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 소위에 계류 중입니다.

[정은애 / 전북 익산소방서 팔봉 119안전센터장]
"소방 활동을 하다 보면 상충되는 원칙들이 있습니다. 긴급 출동을 해야 하는데 빨리 가다 보면 안전이 상충되고, 불을 끄다 보면 재산권과 충돌이 됩니다. 그런데 민·형사상 면책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안 돼 있기 때문에 전부 현장 대원들의 몫이 되고 그러다 보면 소화 활동이 위축됩니다. 단순히 소화 활동뿐만 아니라 인명 구조 활동의 위축이죠."
전부 현장 대원들의 몫이 되고 그러다 보면 소화 활동이 위축됩니다. 단순히 소화 활동뿐만 아니라 인명 구조 활동의 위축이죠.(기획·구성: 정윤식,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