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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기한 얼음골의 가치는?

조재근 기자 jkcho@sbs.co.kr

작성 2017.08.10 11:15 조회 재생수4,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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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신기한 얼음골의 가치는?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같은 날씨에도 일체의 기계적 장치나 인위적 간섭 없이 자연 상태에서도 영하의 차가운 기온을 유지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존재하는 곳, 바로 얼음골입니다. 얼음골로 가장 유명한 곳은 경남 밀양의 얼음골인데 우리나라에는 밀양 외에도 아주 많은 곳에 얼음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얼음골은 차가운 바람이 바위나 돌 틈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풍혈지(風穴地)로도 불리는데 전국에 대략 50여 곳의 풍혈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장열리 마을 뒤산의 얼음골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에어컨과 선풍기, 냉장고가 없던 이미 오래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한여름 이곳에 올라 더위를 식히기도 했습니다. 이곳의 얼음골은 주민들에게는 피서지, 또는 놀이터였고 또 한편으로는 외지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할 만한 마을의 보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얼음골을 찾아가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바위틈의 온도를 재 봤더니 영하 3~4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외부 기온이 영상 35도 안팎임을 감안하면 불과 몇 미터, 바위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안팎의 온도 차가 무려 40도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얼음골은 왜 자연 상태에서도 이처럼 차가운 공기가 유지되는 걸까요?
얼음골얼음골
● 얼음골의 원리
얼음골전국의 얼음골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유지되는 비결이 단순히 1~2가지가 아니라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얼음골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1. 너덜 지대…넓은 지하 공간

지금까지 확인된 상당수 얼음골은 돌 너덜지대에 존재합니다. 너덜이란 비슷한 크기로 쪼개진 바위나 돌덩이가 넓게 흩어져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인데 생각보다 내부에 아주 넓은 공간이 존재해서 한겨울 동안 이곳에 차가운 냉기가 차곡차곡 쌓인다고 합니다.

2. 경사진 북향(北向)

많은 얼음골이 북쪽을 향해 있는 산기슭 경사진 곳에서 발견됩니다. 북향이기 때문에 겨울철 일조량이 적고 경사진 비탈에 있기 때문에 돌너덜이 쌓여서 그 안에서 냉기와 온기가 분리될 수 있다고 합니다.

3. 열전도율 낮은 바위…안산암

안산암은 화산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화성암의 일종인데 열전도율이 아주 낮다고 합니다. 열전도율이 낮은 만큼 열 차단 효과가 뛰어나 겨울에 축적된 내부의 냉기가 한여름의 뙤약볕에도 쉽게 달아오르지 않고 오랫동안 차가운 상태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4. 열 분리 현상

돌너덜 내부에서는 겨울 동안 미기상학(微氣象學)적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너덜 내부의 공기가 상승하면서 수증기가 응결하고 잠열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온기와 냉기가 분리되는데 분리된 온기는 너덜의 위쪽으로 배출되고 냉기는 아래쪽에 쌓이는 겁니다. 실제로 풍혈 대부분 지역에는 돌너덜 위쪽에 온혈이라고 하는 곳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한겨울에도 따뜻한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정선군 장열리의 얼음골 마을 주민들도 이 온혈 주변에는 겨울철 눈이 내려도 많은 눈이 아니면 잘 쌓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5. 얼음은 늦봄부터 얼어

이렇게 겨울 동안 축적된 냉기는 봄을 지나 여름까지 남아 있습니다. 겨울에 내린 눈은 너덜 깊은 내부까지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데 봄철이 되면서 비가 내리면서 유입된 물이 얼기 시작해 늦봄까지 얼음의 크기가 더 커진다고 합니다.

● 희귀식물의 피난처
얼음골얼음골이 과거에는 지역 주민들의 한여름 휴식 공간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단순히 마을의 신기한 장소 정도로밖에 의미가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행스럽게도 이 얼음골의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 연구원들이 전국의 얼음골 주변을 조사한 결과 고산지대에서나 서식하는 희귀식물이 풍혈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정선군 장열리 얼음골의 경우 주변에는 설악산 일대에서 서식하는 개병풍이 군락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개병풍은 북방계 식물로 잎이 아주 큰 식물인데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하지만 해발 450m 정도인 정선군 장열리 얼음골 주변에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인가목이라는 나무도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 역시 고산지대에서 주로 발견되는 식물입니다. 모두 풍혈에서 나오는 냉기 덕에 서식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산림청이 전국의 25개 풍혈 주변을 조사한 결과 월귤과 뚝지치, 등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희귀식물이 풍혈 주변에서 관찰됐습니다. 최근 기후 변화로 인해서 고산 식물의 서식 한계선이 점점 고위도로, 고지대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풍혈 주변에 이러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 측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현상입니다. 현재 풍혈 주변의 기온과 습도 변화 등에 대해 기본적인 데이터를 수집하며 기초적인 연구 단계이지만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면 풍혈의 숨겨져 있는 새로운 가치를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 도움 주신 분

김동갑 산림청 국립수목원 박사
변희룡 부경대 명예교수
공우석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
김도우 국립재난안전연구원 박사
최봉천 정선군 장열리 마을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