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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거란 담판' 서희, 외교로 '사드' 풀 수 있을까?

남승모 기자 smnam@sbs.co.kr

작성 2017.03.16 15:51 조회 재생수6,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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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거란 담판 서희, 외교로 사드 풀 수 있을까?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쳐들어왔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은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인 봉산군을 격파하고 우리 선봉에 섰던 윤서안을 포로로 잡는 등 위세를 올렸습니다.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당도했으니, 만약 강으로 나와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섬멸할 것이니 군신 모두가 속히 아군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이는 항복하자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서경,그러니까 지금의 평양 이북 지역을 넘겨주자고 했습니다. 성군으로 꼽혔던 성종이었지만 뾰족한 묘안이 없는 데다 신하들도 그렇게 청하니 그 뜻에 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서희가 나섰습니다. 서희는 국서를 받들고 소손녕의 군영으로 들어가 담판을 벌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적진에 머물며 소손녕을 돌려 세운 것은 물론 강동 6주의 땅까지 얻어 냈습니다. 외교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80만 대군을 물리친 것은 물론 국토까지 넓혔으니 외교도 이런 외교가 없는 셈입니다. 

● 사드 빌미 中 전방위 압박…"서희가 필요해"

1000여 년이 지난 요즘, 중국의 압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경제와 외교 전방위로 한국을 몰아세우는 분위기입니다. 이유는 잘 아시다시피 사드 배치 문제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부 외교 참사의 결과라면서 섣불리 결론 내기보다 차기 정부에서 외교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드 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미국과 사드가 자신들의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요구 받고 있는 일종의 ‘외통수’ 같은 상황이다 보니 서희 같은 탁월한 외교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중국의 ‘사드 보복'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 차세대 외교 인재 양성 프로그램 '21세기 서희 양성 프로젝트'를 가동한다고 발표한 걸 보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꿈 같은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봅니다. 정말 서희가 지금 담판에 나선다면 이 난국을 풀어갈 수 있을까요?

● 후손들의 '굴욕 외교', 서희의 '자주 외교'

요즘 많이 듣는 말이 ‘굴욕 외교’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살아가다 보니 뜻하지 않게 이런 일들을 겪게 됩니다. 서희는 어땠을까요? 확실한 결과물을 얻어냈으니 방법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사실 그 과정과 방법이 더 드라마틱합니다. 한 번 볼까요?

서희는 소손녕의 군영에 도착하자 통역을 시켜 상견례의 절차를 묻게 합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서희는 “신하가 마루 아래에서 군왕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은 예에 맞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며 거부합니다.

외교는 기싸움이 중요하다죠? 서희가 이겼습니다. 두 세 번 옥신각신한 끝에 소손녕은 내심 서희가 기이한 사람이라 여기고 마침내 마루로 올라와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허락했습니다. 소손녕은 서희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을 잘 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 권94, 열전7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서희가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고려사 권94, 열전7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어떻습니까? 어디 하나 꿀리는 게 없습니다. 이만하면 자주외교라 할만 하지 않을까요?

● 서희, 사드 문제도 풀 수 있을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과연 서희가 환생한다면 지금의 사드 문제도 손쉽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지금과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993년 당시로 가보겠습니다. 당시 서희는 거란의 침공 이유가 과거 생여진 땅에 광종이 설치한 가주와 송성, 2개 성을 빼앗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고려와 송나라의 단교입니다. 소손녕도 “(고려가)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출병하게 된 것”이라고 직접 거론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지역을 차지한 거란, 즉 요나라에게 송나라와 고려의 동맹은 최대 안보 위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요나라를 사이에 두고 각각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위치한 두 나라가 손을 잡을 경우, 자칫 협공을 당할 위험이 컸습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송나라 역시 요나라 후방을 위협해줄 잠재적 우군으로 고려를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소손녕의 목적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고려를 토벌하는 것 그 자체보다는 송나라와 고려의 단교였습니다. 실제로 소손녕이 물러간 뒤 고려는 그 동안 써오던 송나라 연호 대신 요나라의 ‘통화(統和)를 사용합니다. 거란에 당한 게 분하기도 하고 또 오랑캐라고 생각한 요보다는 송과의 국교를 유지하는 게 낫겠다 싶어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해보기도 했습니다. 송은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고 고려는 결국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합니다.

복기해 보자면 고려는 80만 대군을 돌려세우고 땅을 넓힌 대신 요나라는 고려와 송을 단교시켜 잠재적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성과를 챙긴 겁니다. 요가 땅을 내준 것이요? 강동 6주는 원래 생여진의 땅으로 요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남의 땅으로 생색만 낸 셈입니다.

● 1000년 전 '거란 침공' 보다 복잡한 '사드'

양 측에 주고 받을 게 있으면 복잡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1000년 전 거란 침공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드 문제의 경우, 우리가 갖고 있는 카드가 뭔지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저 ‘배치하냐’, ‘철회하냐’ 양자택일입니다.

미국은 우리 안보의 근간을 이루는 동맹입니다. 미국은 북핵 방어를 명분으로 우리 땅에 사드를 두고 싶어 합니다. 어찌보면 사드가 북핵 방어에 직접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미국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영토 안에 배치하는 문제이니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마찰이라는 대가는 감수해야 합니다. 특히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행정부와 말입니다.

반면 중국은 우리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습니다. 중국이 재채기만 해도 우리는 앓아 눕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은 한반도 사드 배치가 자국의 안보 이익을 심대하게 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을 겨냥한 게 아니다. 북핵 때문이다. 북핵 해결해주면 우리도 배치 안 한다.”라고 주장해보지만 중국 반응은 “북핵 문제를 왜 우리가 해결해야 하냐. 한미일이 북한을 몰아붙여 핵 무장까지 하게 만든 거 아니냐.”는 반응입니다. 역시 우리 주권에 관한 문제라고 무시해도 되지만 경제적, 외교적 보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뭔가 우리가 내줄 카드가 있어야 협상이 되는데 우리에게는 가진 게 별로 없어 보입니다. 1000년 전 거란 침공보다 사드 배치 문제 해결이 더욱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서희 태사(太師)께서 담판에 나서주신다면 뭔가 다른 묘안이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가정은 공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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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7&categoryId=49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