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예은 아빠가 겪은 그 날 이후 - 국가 상대 손배소 당사자 신문 ②

1월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0부(이은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2차 기일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등 347명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당사자 신문이 진행됐다. 당사자 신문을 위해 출석한 유족은 '예은 아빠' 유경근(48) 씨였다. 사고 당시 세월호 근처에 있던 둘라에이스호 선장 문예식 씨는 이날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었지만, 외국에 체류 중인 관계로 다음 변론기일에 나오기로 했다.

유경근 씨는 지난해 4월 21일 자신의 SNS를 통해 '현재 416가족협의회 130가정 342명의 피해자들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배·보상을 전면 거부하고 정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정부가 정한 배·보상금보다 더 많이 받아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법조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한다'라며 '이 소송의 목적은 판결문에 정부와 청해진해운의 법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재판정에서 침몰의 원인과 책임, 구조 방기의 이유와 책임, 피해자들에 대한 부당한 탄압의 책임을 따지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래는 이날 3시간 넘게 진행된 당사자 신문 과정에서 예은 아빠가 증언한 참사 직후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 3시간 넘게 진행한 재판을 모두 방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나온 다른 기사들을 통해 유추하건대 기자가 방청한 시간은 앞뒤로 30여 분이 부족합니다. 다만, 맥락상 무리가 없다고 생각해 기록합니다. 수기한 내용이라 혹여 관계자 가운데 수정할 사항에 대해 연락주시면 확인 후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지난해 11월 22일, 첫 변론기일에 촬영한 사진. 법정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재판장은 노란 점퍼를 입은 유족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세월호 유족 제공
원고 측 대리인:
해경 선체 수색작업을 지켜보던 실종자 가족들이 4월 20일 새벽 1시쯤 지지부진한 수색 구조에 항의하기 위해서 청와대로 가는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그 이유와 경위에 대해 말해달라


유경근(예은 아버지):
지금까지도 저희들이 4월 19일 그날 밤 청와대로 걸어가겠다고 나왔던 일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그 내막을 모르고 계신다. 자기 자식도 못 찾았는데 청와대로 가서 싸우겠다고 나오는 유족이 어디 있느냐, 지금도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번 기회에 말씀드리겠다. 당시 실제로 사람을 구하기 위한, 또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그런 구조 작업은 없었다. 특히 진입은 한 차례도 없었다. 4월 18일에도 방송에도 언론 보도에 해경이 진입했다고 했지만 그 현장에 나와 동생이 함께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구조를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잠수를 한 목적은 가이드라인을 설치하거나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 했던 공기 주입이었다. 민간잠수사 한 분이 잠수했다가 나와서 "선체 창문을 통해 시신이 엉켜있는 것을 봤다, 궁금해하실까 봐 아버님에게만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9일 토요일 오후에 들었다. 그때까지 진입을 못 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배 위에서 그 현장을 지켰던 이유는 금요일, 토요일 이틀 동안 선내에 공기 주입하는 작업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고 첫날부터 그날까지 모든 언론이 에어포켓 존재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해경도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 내 생각은 만일 그 안에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다면 그 희박한 공기에 의해 살아있다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어도 좋으니 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기 주입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잠수사로부터 배가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 나와서 팽목항으로 나왔는데 그런데 그때 일이 터졌다.

4월 20일 진도체육관 내 선체 수색과정 알림 /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팽목항 대합실, 지금은 매표소로 쓰는 대합실을 상황실로 쓰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밤 9시경에 해경에서 가족들에게 브리핑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 기억으로는 서해청장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에어포켓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에어포켓을 위해 공기 주입을 하고 있었고,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주입한 공기도 사람이 마실 수 없는 공업용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처음부터 그게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구조를 위해 진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공기만 넣고 있었느냐. 그때 저희 가족들이 또 한 번 느낀 것은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해경이 되었건, 해수부가 되었건, 결국 다 우리들 속이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했지만 결국엔 다 거짓말이었구나.

그래서 팽목항에 있던 가족들이 체육관으로 몰려갔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해봐야 다 거짓말이고, 믿을 수 없으니 이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대통령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한테 부탁을 하자. 대통령이 와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얘기하고 갔는데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혼 좀 내주시고, 일을 좀 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 얘기 하러 청와대에 가자. 그래서 팽목항에 있는 가족들이 먼저 체육관으로 갔고 체육관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그래서 체육관에 있는 가족들도 다 같이 분노해서 청와대로 가자고 뛰쳐나온 것이다.
4월 20일 진도대교로 향하는 실종자 가족들/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처음부터 걸어갈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진도에서 청와대가 어디라고, 그 시간에 저희들이 걸어가겠나. 가족들이 4월 16일 안산시 교육청에서 준비해 준 버스를 타고 내려갔었다. 그래서 현장에 나와 있는 공무원에게 우리 지금 당장 서울 올라가야겠으니 내려온 버스 어디 있느냐 빨리 준비해 달라. 그래서 안산에서 내려온 분들이 버스를 불러오겠다고 해서 버스를 타러 밑으로 내려갔다. 굴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곳 앞에서 체육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경찰들이 갑자기 움직이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타고가려 했던 버스를 경찰이 돌려보냈다. 그 상황에서 해수부장관과 국무총리가 왔다. 그리고 트럭 위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얘기를 했는데, 하는 얘기가 다 똑같았다. "기다려라,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더니 항의를 받자 국무총리는 그 자리에서 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장관도 국무총리도 답을 안 주니 대통령한테 가야겠다. 그때부터 걷기 시작했고 새벽까지 걷다가 진도대교 앞에서 포기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경찰이 카메라로 실종자 가족들의 사진을 찍고 채증활동을 벌였는가
그 당시 경찰이 우리를 강제로 진압하거나 끌고가진 않았으나 가는 길마다 막았고 찻길이 안 되면 산길로라도 가겠다고 산으로 올라갔더니 그것 역시나 막았다. 그 당시 우리는 채증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를 왜 찍는지 사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채증이라는 것이 위험하거나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나중에 크게 화났던 기억이 난다.

경찰은 팽목항과 체육관에 사복 경찰을 대거 배치했는데 사복경찰은 어떤 활동을 했나
사복 경찰이라는 것을 몰랐다. 굉장히 많은 경찰이 형광복 정복을 입고 있었고 여경도 상당히 많았다. 사복 경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틀째까지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났는데 이야기를 한참 가족끼리 모여서 하다 보면 그 당시 상황은 지금이야 가족끼리 서로 잘 알지만 그때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당연히 희생자 가족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영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중간에 끼어 있었다. 결정적으로 체육관에서도 팽목에서도 붙잡혔었는데 이 사람들이 말은 거의 안 하고, 같이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보면 뒤를 돌아서 전화 통화하는 모습이 여러 번 잡혔다. 그러다가 어느 분이 너무 이상해서 가까이 가 봤더니 대화 내용이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는 거다. "동향은 이렇고 특이사항은 없다." 이런 보고하는 전화를 하는 것을 팽목항과 체육관에서 몇 차례 목격해서 실제로 그중에 몇은 아빠들이 붙잡아 신원 확인을 하는 과정도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가운데에는 피해자 가족들만 있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한동안은 가족끼리 서로 의심을 굉장히 많이 했고 나도 초기에는 상당히 의심을 해서 가는 곳마다 촬영했다. 잘 모르는 가족들이 "누군데 계속 얼굴을 찍느냐?"고 하면 그 때마다 설명했다. 서로 며칠 동안 신원 확인을 한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4월 20일 진도대교 방향으로 진행중 국무총리를 만난 가족들/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예은이 시신을 찾은 것은 4월 23일이었나?
네. 오전 8시 3분에 발견했다고 연락이 왔다.

예은이 시신을 본 원고의 심정은 어떠했나?
8시 3분에 발견했다는 안내문이 붙었고 거기에 인상착의나 옷, 키, 머리 길이, 특이점 이런 게 쭉 적혀 있었는데 번호는 137번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아, 예은이 일지도 모르겠다고 감이 왔었다. 물론 8시 3분에는 이름이 아니라 인상착의만 나온 것이었다. 사실 예은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굉장히 마음이 복잡했다. 왜냐하면 137번째로 나온 이 아이가 예은이어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어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이 아이가 예은이라면 죽었다는 이야기이고, 예은이가 아니면 혹시 살아있을 가능성은 있는 건가? 지금이라도 빨리 시신을 찾아서 가는 게 맞는 건가, 남아서 희망을 기다리는 게 맞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팽목항에 도착한 게 12시쯤이었다.

12시 조금 넘어서 같이 있던 동생들이 혹시 예은이가 아닐지도 모르니 임시안치소에 대신 다녀왔는데 그 두 동생 다 예은이를 어렸을 적부터 알아온 작은 아빠들인데 다녀오더니 예은이랑 전혀 다르게 생겼다고, 예은이 아닌 것 같다고. 그래서 그 때는 다행인 건가 아닌 건가, 이렇게 하다가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도 내가 가볼게" "아닌데 뭐하러 들어가, 자꾸?" "아니야, 내가 가 봐야겠어" 하고 들어갔는데. (침묵) 그 다음부터 예은이에게 가장 미안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한데.

나도 들어가서 예은이 아닌 줄 알았다. 전혀 예은이와 다르게 생겨서 ‘아, 예은이 아니다’ 그러고 나오려고 했는데 정말 발이 떨어지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다시 들어가서 그 얼굴을 몇 분 동안 가만히 쳐다봤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쳐다봤는데... 조금 지나니 예은이가 ‘아빠, 나인데 왜 못 알아봐? 나인데 왜 아빠가 날 못 알아봐?’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얼굴을 만져보고 머리를 들춰보고 팔을 들어보고 손을 만져보고. 예은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주차해 놓은 차에 부딪쳐서 왼쪽 눈썹이 크게 찢어진 적 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왼쪽 눈썹을 봤는데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빠가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딸과 다시 만났다.
4월 20일 진도체육관 내 시신 인양 알림 /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예은이 장례는 언제 치렀나?
4월 23일 12시 20분경에 시신을 확인했고, 확인해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거기에서 못 데려간다고 신원 확인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 딸 맞다고 했더니,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DNA 검사를 거쳐서 확실하게 해야만 가실 수 있다고. 왜냐하면 그 전에 벌써 2~3일 동안 시신이 바뀐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심지어 시신이 안산까지 왔다가 아닌 것 확인해서 다시 데리고 온 일이 있을 정도로. 그 정도로 신원 확인도 못 했고 수습 과정도 너무나 엉망이었다. 그렇게 DNA 분석을 해서 비교해서 신원 확인하는 게 실제로 처음 된 게 23일부터였다. 그래서 그럼 얼마나 걸리느냐고 했더니 잘 모르겠고, 지금 수습이 워낙 많이 되고 있어서 최대한 빨리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해서 그 때 예은이를 데리고 관처럼 생긴 곳에 눕혀 팽목에 설치된 냉동고까지 같이 갔다. 거기서 바뀔지도 모르니 예은이 이름을 쓰라고 해서 예은이 이름을 그 위에 쓰고 그리고 냉동고에 넣었다. 신원 확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4월 24일 다음 날 점심 때 쯤, 만 하루가 지나서야 왔다. 그리고 예은이를 데리고 팽목에서 오후 5시쯤 헬기를 태워 안산으로 올라왔고, 그리고 장례식장이 없다고 해 역시 만 하루를 기다려 4월 25일에야 장례 일정에 들어갔다. 

장례 치른 후에도 (진도에) 있었는데 시신 수습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시신 수습 과정은 4월 22일에야 준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그나마 시신 수습의 과정이 체계적으로 된 게 23일부터이다. 그러니까 시신 수습을 위해 이 정부가, 해경이나 해군, 사복 경찰들이 지원했다고 하는데 일주일 동안 그런 걸 한 바 없다. 그런 상황으로 시신 수습이 엉망으로 이뤄졌고. 아까 얘기한 대로 시신이 바뀌고 특히 팽목항으로 시신이 올라오면 거기서 여자 학생 같다고 하면 여학생 가진 부모님들이 죄다 달려가서 그 얼굴을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신원 확인하는 게 일주일 가까이 지속됐다. 그 시신조차도 진도 근방에 목표나 해남의 병원으로까지 옮겨 보관했는데 거기 갔던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을 냉동고 같은 특별한 안치실에 둔 게 아니라 병원 바닥에 그대로 방치한 것을 몇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부패가 더 진행된 경우도 있었고 한마디로 시신 수습을 위한 어떤 과정이 없었다.

4월 20일 일요일 저녁때, 20일부터 본격적으로 실종자 수색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했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찾아갈 방법도 없고, 누가 찾아주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고. 그냥 하얀옷 입은 사람들이 들것에 실어서 시신을 내려놓고 가 버리면 끝이었다. 그래서 이러면 안되겠다. 왜냐하면 팽목항에 있는 가족들은 그래도 부두에 가서 쳐다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체육관에 있는 가족들은 그럴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시신을 체육관까지 가져올 순 없고. 그래서 가족들이 그런 방법을 요구를 했는데도 (정부가) 방법을 주지 않아 가족들끼리 회의했다. 그래서 여기 팽목항에서 우리가 얼굴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을 체육관에 있는 가족한테 보내서 그 사진을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그 일을 제가 하게 됐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미수습자 합동 차례 모습
사고 이후 시신 수습 과정이 장기화됐는데 그 동안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했나?
팽목항이나 체육관이나 어떻게 생활을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저 같은 경우엔 수요일에 가서 일요일 새벽까지 단 한 번도 앉지 못하고 신발도 벗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그 때는 팽목항이나 체육관에 무슨 어떤 도움이 있고, 시설이 있고, 지원이 있고. 이런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없었고, 전혀 그런 것들이 상관없었다. 정말 많은 물품이 와서, 라면이 있고 식사가 지원되고 도와주는 분들도 많았는데. 그 식사를 제대로 일주일 동안 어느 가족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다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다 찾고 체계가 잡히는 상황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팽목항이나 체육관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셨고. 그게 본인의 임무인지 몰라도 정복 입은 경찰들은 경계를 서고, 특히 가족들이 한 두 명이 따로 떨어져서 어딜 가면 따라왔다. 물론 이해는 한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그러더라.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까 봐 따라가는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쨌든 그런 식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이런 일들만 했다.

5월 6일, '4.16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원고는 집행부였다. 결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진도 팽목항에 있을 때엔 정식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도 체육관 쪽에도 피해자 가족들 대표가 있었고 팽목항에도 있었다. 저는 팽목항에 있어서 그런 역할을 많이 했다. 제가 하는 역할은 현장 상황을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동생들과 왔다갔다 하면서... 그때 대표를 뽑은 이유, 5월에 가족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이유는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의논해서 방향을 정해서 함께 대응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속이는 것 같고 거짓말인 게 다 드러났고. 그런 상황에서 안 되겠다, 그러니 우리 피해자들이 모여서 같이 의논하고 뜻을 모으고 함께 단체로 힘을 모아서 행동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 때문에 팽목과 체육관도 마찬가지고 5월에 안산에 올라와서도 그런 가족 대책위원회를 만들게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대국민담화 당시 화면
박근혜 대통령이 희생자 가족들과 만났던 당시 세월호 특별법 필요하다고 본다, 특검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희들은 생각보다 강한 어조로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걸 보고 17명의 가족들이 청와대에 갈 때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끝나고 나올 때엔 희망을 가지고 나왔다.

그 때 가족들은 대통령에게 어떤 기대를 했나?
대통령 면담을 한 게 5월 16일이었고, 사흘 뒤에 담화를 발표했다. 제가 그 때 담화에 담길 내용, 앞으로 대책 같은 내용들을 미리 저희에게 말씀해 달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흘 뒤에 담화 발표를 했는데 그 날까지 가족들은 딱 사흘 동안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저희가 첫 번째로 요구했던 것은 당시 여전히 열한 분의 실종자가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그 분들을 빨리,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찾아낼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담화 내용을 보니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다. 다른 분들은 그 대책이 강력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희들, 특히 아직까지 진도에서 올라오지 못한 가족들은 이 담화를 듣고 다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왜냐하면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을 찾아낼 사람들이 해경이기 때문이다. 그 해경이 없어지고 동요되면 남아있는 가족들은 누가 찾으라는 건지... 그래서 저희들은 주저앉았다.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국민이 거기 있는데 하루빨리 찾겠다는 말씀을 먼저 하실 줄 알았는데. 주체인 해경의 사기를 떨어뜨릴 게 분명한데. 실제로 그것 때문에 진도에 전화해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물어봤다. 무슨 다른 변화 없냐 했더니 자기들도 그게 걱정이 돼서 현장에 있는 해경들한테 말을 해 봤는데 해경이 풀이 죽고 화가 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왜 대통령이 우리에게 이러느냐"고. 가족들이 해경을 붙잡고 제발 사정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는 찾아주고 가셔야죠, 그 일까지는 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담화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것, 실종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