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가전제품 전시회의 하나인 CES가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습니다. 올해는 150여 개국 3,800여 업체가 참여해 각자 준비해온 첨단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공식 개막일은 현지시간 지난 5일이었지만 하루나 이틀 전부터 세계 유수의 가전 회사들은 제각각 프레스 컨퍼런스를 열어 야심 차게 준비해온 기술을 언론에 분주하게 알렸습니다.
현지시간 지난 3일, 한국의 삼성전자가 다른 회사보다 일찍 쇼 케이스를 가졌는데 지금껏 보지 못한 화질의 TV 신제품을 공개한다는 소식에 국내외 언론사들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쇼 케이스 장은 하얀 장막들로 쳐 있었는데 신제품을 소개하기 전 신비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였습니다.
삼성전자 김현석 사장이 영어 설명으로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킨 뒤 무대 중앙에 둥그렇게 쳐놓은 하얀 장막 안에서 대형 TV가 내려왔습니다. 삼성전자의 설명으로는 지금까지의 화질 논쟁을 종결할 TV로 LED와 OLED의 단점을 모두 극복한 QLED로 메탈이 첨가된 퀀텀닷 소재를 활용한 차세대 디스플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퀀텀닷 소재로 HDR 1,500~2,000nit 사이의 밝기와 컬러 볼륨 100%를 표현하면서, 깊은 블랙, 최고 수준의 명암 비, 어느 각도에서도 색이 변하지 않는 넓은 시야 각까지 구현 가능하다는 게 삼성전자 측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뒤에 쳐 있던 장막이 거둬지더니 벽 여러 곳에 두 대의 TV 모니터가 대비되게 진열돼 있었습니다. 한쪽은 OLED, 다른 쪽은 QLED였습니다. 아시다시피 OLED는 LG가 주력으로 밀고 있는 TV 기술이고 QLED는 삼성이 새로 내놓은 기술입니다.
한마디로 LG의 OLED보다 삼성의 QLED가 훨씬 화질과 선명도가 뛰어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홍보 전략이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CES 전시관이 마련된 컨벤션 센터 안에서는 다른 상품과 자사 제품을 직접 비교 홍보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성전자 측은 전시관이 아닌 공식 개막에 앞선 사전 쇼 케이스 행사를 통해 ‘LG의 TV는 우리 삼성의 TV와 비교가 안 된다.’며 대놓고 공격한 겁니다.
그러자, 다음날, LG 측의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OLED와 QLED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며 “QLED는 백 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낸다면 비교할 만하지만 경쟁사 제품은 결국 LCD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OLED의 단점은 그대로 갖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한 부회장은 "QLED는 LCD가 가진 색 시야각의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QLED는 퀀텀 시트를 붙여 휘도를 15% 올렸지만, 퀀텀 시트를 붙이면서 20%를 잃을 수밖에 없어 결국 5%의 손해를 안고 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ULED, GLED 등 여러 이름을 혼용해 오히려 소비자에게 혼란만 줄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LG 전시장 안에서는 삼성 QLED에 대한 LG 직원들의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LG는 이날 두께가 2.75mm에 불과한 OLED 신제품을 내놨습니다. 벽에 붙이면 너무 얇아 ‘벽지 형 TV’라는 홍보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삼성의 QLED는 OLED와는 다른 방식으로 뒤에서 빛을 한번 쏘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얇은 TV 패널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자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어떤 회사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사 제품의 장점만 얘기하지 단점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따로 취재할 필요도 없이 두 회사 제품의 단점을 다 알게 된 겁니다. 바로 경쟁사끼리 상대방 깎아 내리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세계 TV 시장 점유율을 보면, 삼성전자가 1위, LG가 2위, 그리고 3, 4위는 중국회사인 TCL과 Hisense이고, 5위는 일본의 Sony라고 합니다. (판매량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판매액을 보면 Sony가 3위이고, 다른 중국회사들이 4, 5위라고 합니다. 중국회사들이 중저가 제품을 팔기 때문에 금액으로 보면 Sony가 앞선다는 겁니다)
기자는 중국 가전회사인 TCL과 Hisense 부스를 찾아가봤습니다. 사실 미리 중국회사라는 것을 모르고 갔더라면 일본 회사로 착각할 만큼 전시된 TV의 화질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전면에는 8K UHD TV 수상기를 배치하고 뒤편에는 초박형 TV 모니터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Hisense 의 담당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이제 중저가 시장을 장악하고 프리미엄 시장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여기 전시된 제품들이 바로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할 제품들이다.” 기자가 ‘프리미엄 시장은 한국의 삼성, LG와 일본의 SONY가 탄탄하게 장악하고 있는데 가능하겠느냐?’라고 물었더니 “우리는 그들 못지 않는 기술을 토대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낼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들 제품보다도 훨씬 가격이 쌀 것이다.”
오만에 가까운 자만이겠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자신감 또한 느껴졌습니다. 중국 회사들은 한국의 두 가전 회사를 뒤쫓기 위해 탁월한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기술 경쟁력까지 넘보고 있었습니다. 베끼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중국은 이제 베껴서 싸게 파는 전략에서 한발 더 나아가 프리미엄 시장을 장악한 세계적인 가전 3사를 무서운 속도로 뒤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전 기술, 특히 TV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끼리 서로 아옹다옹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싼 인건비를 무기로 한 중국과, 과거의 영예를 되찾으려는 일본의 치열한 추격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도 CES에서 우리 업체들끼리 세탁기를 고의로 부쉈느니 아니니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1, 2위끼리의 경쟁만 생각할 게 아니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3, 4, 5위의 추격을 어떻게 따돌릴 것인지 스스로 자각하고 기술 개발에 전념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