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광마을·야동리·대가리·고도리…"소중한 마을이름 안 바꾼다"

이정국 기자 jungkook@sbs.co.kr

작성 2016.08.31 07:5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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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리, 죽이리, 하품리, 고사리, 야동리' 한때 웃긴 이름으로 놀림감이 된 전국의 특이지명들입니다.

각자의 사연과 유래를 품고 있는 소중한 이름들이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재·주민불만 등을 이유로 행정명 개명에 나선 마을들이 꾸준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행정명칭 개명은 절차가 까다로운 법정동 변경과 달리 주민 동의를 받아 조례를 변경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특히 이름 마을 중에는 "웃긴 이름 덕분에 오히려 마을을 알려졌다"거나 "소중한 마을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는 등을 이유로 마을 이름을 고수 하는 곳도 많습니다.

경기 여주시 산북면 '하품(下品)리'는 지역 주민들이 마을명칭 개명을 추진해 2013년 '명품(名品)리'로 고쳤습니다.

산북면에는 원래 상품(上品)리와 하품리가 있었으나, 하품리 주민들이 "우리가 품질이 낮은 동네 사는 사람들이냐"며 마을명칭을 바꾸자는 여론을 형성해 여주시 승격에 맞춰 개명에 성공했습니다.

방영철 산북면장은 "아무래도 마을 이름이 하품이다 보니 주민들이 기분 나쁘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을 이름을 명품으로 바꾸고 나니까 주민들이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통산'은 올해 3월 옛 한자 지명을 되찾았습니다.

충청북도 지명위원회는 지난 3월 23일 회의를 열어 원통산의 한자 지명을 현재의 '怨慟山'에서 발음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圓通山'으로 변경했습니다.

개명 전의 '원통산(怨慟山)' 한자 지명은 원망한다는 뜻의 '원(怨)'과 서럽게 운다는 의미의 '통(慟)'입니다.

1865년 조선 고종 때 발간된 '대동지지'와 1934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도 이 산의 명칭은 '圓通山'으로 기록돼 있는 등 원래는 둥글다는 '원(圓)'과 통한다는 뜻 '통(通)'의 의미였으나, 일제강점기 '怨慟山' 바뀐 것을 최근에서야 바로 잡은 것입니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죽리는 행정구역상 '죽1리'와 '죽2리'로 나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 동네에 대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죽리로 작명됐고, 죽2리는 '죽이리'라는 발음 탓에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죽2리 마을 주민들은 수십년을 고민한 끝에 개명을 요청해 2006년 마을 이름을 '원평리'로 바꿨습니다.

충주시 이류면(利柳面)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지며 이안면과 유등면의 앞글자를 따 만들어졌습니다.

이류가 '두 번째(二流·이류)'라는 오해를 산다는 마을 주민들의 개명 요구가 잇따라 2012년 조선 시대 지방을 돌아다니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 등을 제공했던 역원이 생기면서 불리던 옛 지명인 '대소원면'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대구에서는 지난 2005년 달서구 파산동(巴山洞) 명칭이 호산동(虎山洞)으로 바뀌었습니다.

파산동은 인접한 와룡산에 뱀이 많아 큰 뱀을 뜻하는 '파(巴)'자가 들어간 파산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이 명칭이 기업인들이 꺼리는 단어인 '파산(破産)'을 연상시킨다며 민원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현재 조리읍) '죽원리'는 '죽었니'로 읽혀 거북하다는 이유로 2000년 '대원리'로 지명을 바꿨습니다.

이곳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대원' 또는 '대원리'라 불렸으나 흥선대원군의 군호(君號)와 같다고 해 '대(大)'자를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으로 고쳐 부르게 됐습니다.

경북 영주시는 2012년 주민들의 청원으로 '단산면' 행정명칭을 '소백산면'으로 바꾸려다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주민 사이의 갈등을 끝에 포기했습니다.

애초 단산(丹山)이란 이름이 단양군(충북)의 옛 이름인 데다 '붉은 산'이란 이미지도 좋지 않았고, 소백산 국립공원의 17%가 단산면에 속해 있어 '소백산면'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소백산 국립공원의 47.7%를 차지하는 충북 단양군이 "소백산은 단산면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크게 반발하면서 법적 다툼까지 일어났습니다.

대법원은 결국 지난달 "영주시가 일방적으로 소백산 명칭을 선점해 사용하면 다른 지자체와 주민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어 합리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못 박으면서 개명 시도는 좌절됐습니다.

이와는 달리 마을 이름을 고수하는 곳도 많습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放光)마을은 1798년까지 둔전리 훈포로 불리다가 '방광'으로 개칭됐는데 구전에 따르면 판관이 살았다 해서 판관 마을로 불리다가 표현이 변형돼 '판팽→방광' 마을로 개칭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가끔 타지인의 웃음거리가 되긴 하지만 소중한 마을 이름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강태수(62) 방광마을 이장은 "지리산에서 도를 닦고 하산하던 사미승들이 들판의 조를 먹어 소로 변했다고 한다. 소들은 주인을 위해 일을 해 빚을 갚았고 어느 날 소똥에서 빛이 나더니 다시 도사가 돼 돌아갔다는 전설 때문에 방광마을이 유래했다"며 유래를 알고 보면 전혀 기분 나쁠 이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전북 순창군 풍산면 '대가(大佳)리'는 크게(大) 아름답다(佳)는 의미이나, 머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발음돼 마을 주민들이 여러 차례 명칭 변경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불러온 마을의 고유한 이름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며 현재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충주 소태면 '야동(冶洞)리'는 '야한 동영상'이라는 신조어가 나돌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마을 이름이었습니다.

대장간 야(冶)에 고을 동(洞)으로, 대장간이 있는 마을의 특징을 알려주는 명칭이나 '야한 동영상'의 줄임말처럼 들려 뜻밖의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 마을 이름을 개명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야동리는 여전히 이 명칭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야동동'도 주민들은 크게 개의치 않고 현재의 지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대변리'는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동네 이름이 창피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 젊은층을 중심으로 지역 명칭을 바꾸자는 여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변항이라는 지역 명칭이 널리 알려져 개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어 마을 개명이 정식 의제로 오른 적은 없습니다.

지역 명칭 변경을 두고 논란이 있을 정도는 아니고 주민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일도 없어 이를 공식의제로 설정해 논의할 계획은 없습니다.

충북 증평군 '연탄(連灘)리'는 '여울(灘)이 이어지는(連)' 마을이라는 뜻인 마을 이름을 연탄(煉炭)이라고 오해해도 상관없다며 개명은 고려조차 안 하고 있습니다.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고사리'도 마을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古道里)'도 "'고스톱'의 일본말과 같아 외지인이나 주민들은 오히려 재미있게 생각한다"며 "웃음거리는 될지라도 부정적인 의미도 아닌데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