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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화동 벽화마을의 이면(裏面)

[취재파일] 이화동 벽화마을의 이면(裏面)
피의자 55살 박 모 씨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왜 벽화를 지웠냐는 질문에 "관광객들의 소음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주민들이 살기 힘들어서 '지워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해 지운 겁니다. 못살겠다고 종로구청에 민원을 넣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이화마을 벽화 훼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박 씨였지만, 벽화를 지워버린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시끄러워서"…사라진 이화마을 대표 벽화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은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벽화로 알려지기 전까지, 이화마을은 그냥 평범한 동네였습니다. 10년 전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 지역 환경 개선 사업을 한다며 68명의 화가들과 함께 '이화마을 벽화 그리기 프로젝트'에 나섰습니다.

마을 곳곳에 벽화 70여점이 그려졌습니다. 마을은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외부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등의 배경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을 찾는 한류 팬들의 '필수 순례 코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벽화가 마을 중심 계단에 그려진 '해바라기'와 '물고기' 그림이었습니다. 두 작품을 만드는 데 든 돈만 5천만 원이 넘습니다. 특히 해바라기 벽화는 타일 조각을 이어 붙여 거대한 꽃을 만든  특이함에 관광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림이 사라진 건 지난 달 15일입니다. 일부 주민들이 회색 페인트로 그림을 덧칠해버린 겁니다. 옆 골목의 잉어 계단도 사흘 전, 같은 방식으로 지워졌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한 달 여 만에 박 모 씨 등 주민 5명이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해당 벽화가 국가 예산이 투입돼 제작된 공공의 재산이라는 점을 들어 재물손괴 혐의가 성립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박 씨 등은 경찰 조사에서 "벽화가 생긴 이후 소음과 낙서, 쓰레기 투척에 시달려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종로구청 등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별다른 개선책을 제시하지 않아 일부 주민의 동의를 얻어 벽화를 지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이 유명한 관광지가 됐을지는 몰라도, 자신들에겐 점점 더 살기 힘든 동네로 변했을 뿐이라고 토로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일부 주민도 "오죽했으면 벽화까지 지워가며 사실상의 시위를 벌였겠느냐"며 박 씨의 행동을 두둔했습니다.

이화마을은 주거지를 가운데 끼고 동네의 입구와 정상에 상가, 그리고 벽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제 현장을 찾은 지난 13일엔 외국인 관광객과 많은 중·고교생들이 뒤섞여 80 데시벨 수준의 소음을 냈습니다. 지하철이 도착할 때 들리는 수준의 소음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도 귀를 괴롭혔습니다. 일부 주민은 '조용히 해 달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습니다.
● 주민·상인 간  입장 '팽팽'…곳곳에서 갈등

상황이 이렇다보니, 관광객이 많아지면 매출이 오를 상인들과 오롯이 거주 목적으로만 사는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화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상인과 주민은 모두 140여 가구입니다. 이 중 상인을 뺀 거주민들은 전체 가구의 70% 정도로 파악됩니다.

양측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일리 있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복구하자"는 목소리가 높았고, 일부 주민들은 "이제야 겨우 살만해졌다"며, "다른 벽화도 지워야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불씨도 더해졌습니다. 서울시가 추진하겠다고 밝힌 도시 재생 사업입니다. 이화동은 당초 재개발 지역으로 고층 아파트 건립이 추진됐습니다. 하지만 논의 끝에 "사업성이 없다"며 무산됐습니다. 개발 이익을 기대했던 주민들의 실망도 그만큼 컸겠죠.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가 기존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대신 낙후된 환경을 정비하는 재생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띄웠습니다.

상인들은 현재 상태가 보존되는 재생사업을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일부 마을 사람들도 벽화 마을로 동네가 유명해진 뒤 집값이 두 배 정도 올랐고, 가게세도 많이 받게 됐다며 상인들과 같은 입장에 섰습니다.

반면, 또 다른 주민들은 "관광객이 더 많이 올테니 불편함만 더 커질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구'로 지정되면 부동산 가치가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더해졌습니다. 벽화를 지운 박 모 씨도 이런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화마을의 갈등은 결국 개발 이익이 골고루 나눠지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벽화 훼손을 무작정 '몰지각한 일부 주민의 예술작품 파괴 행위'로 단정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그래서 들립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가운데 서 있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종로구청이 적극적으로 조율에 나서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벽화 훼손보다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불만이 표출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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