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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삼성그룹은 왜 '제일기획'을 매각하려고 할까?

[취재파일] 삼성그룹은 왜 '제일기획'을 매각하려고 할까?
두 달 전쯤이었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취재원을 통해 ‘삼성그룹이 광고 계열사인 제일기획 매각에 나섰다.’라는 얘길 처음 접했습니다. 상대는 프랑스의 ‘퍼블리시스’였습니다. (실제로 지난 1월, 블룸버그통신은 퍼블리시스가 아시아 진출을 위해 제일기획 지분 30% 매수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제일기획 관계자에게 사실인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사실이 아니란 취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프랑스어를 배우면 그때 기사를 써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각 소식은 증권가를 중심으로 더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일기획 사내 직원들이 주고받던 ‘SNS 메시지'를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엔 회사직원들만 쓰는 전문용어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이해를 돕기 위해 사내 직원들 도움을 받아 내용을 풀어써 봤습니다.
 
[제일기획 사내에서 돌았던 SNS 메시지]
“매각과 함께 임직원 30%를 감원한다. 삼성전자의 광고물량을 3년간 보장 받았다. 현 대표이사인 임대기 사장의 임기는 3년간 보장한다. 선배 동기가 상무랑 면담했는데, 희망퇴직금 줄 테니 나가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태원 본사 아닌 다른 곳에서 근무하던 KT와 CJ 광고 담당자는 본사로 불러들일 예정이다. 삼성전자 광고 담당자는 삼성전자가 있는 서울 서초동 사옥이나 수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희망퇴직 위로금은 ‘C1’(사원~대리)은 4천만 원, ‘C2’(과장 이상)는 6천만 원 지급할 거라고 한다. 경영지원실(인사팀)에서 인건비 대비 수익 못 내는 직원을 선별하고 있다.”

 
이 내용인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일기획 직원들은 매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 제일기획은 "주요 주주가 글로벌 에이전시들과 다각적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화한 바가 없다"라고 공시했습니다. 한마디로 지분 매각을 비롯한 협력 방안을 모색한다고 인정한 겁니다.
 
● 삼성 "영업망 확대" - 퍼블리시스 "돌파구 마련"

삼성은 왜 제일기획 매각에 나섰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해외 영업망 확대’입니다. 제일기획은 2014년 매출이 2조 6,700억 원인 국내 광고업계 1위 업체입니다. 하지만, 세계 순위는 15위에 불과합니다.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영업망이 취약한 게 약점입니다.

반면, 프랑스 회사인 퍼블리시스는 유럽은 물론 북미에서 탄탄한 영업망을 갖고 있습니다. 삼성이 지분 일부를 매각해 퍼블리시스와 제일기획을 ‘공동 경영’한다면, 삼성은 퍼플리시스가 가진 유럽과 북미 해외영업망을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퍼플리시스 입장에선 제일기획이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퍼블리시스는 WPP, 옴니콤에 이어 세계 3위 광고사입니다. 레오버넷, 사치앤드사치 등 다국적 광고 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으며, 삼성전자의 북미지역 광고구매도 대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퍼블리시스의 최근 실적이 부진하단 점입니다. ‘P&G’와 ‘로레알’ 등과 같은 거물급 광고주를 경쟁사에 뺏기며 체면을 구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특히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제일기획에 관심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제일기획 매각, 그룹 재편을 위한 자금 마련 방안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자금 마련’입니다. 삼성그룹은 그룹 재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핵심은 삼성물산이 지주회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삼성물산이 지주회사가 되려면 자회사 지분 30%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분을 사들일 자금이 필요하고, 그 자금 확보를 위해서 제일기획을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제일기획 지분은 지난해 9월 공시 기준으로 삼성물산(12.64%), 삼성전자(12.60%), 삼성카드(3.04%), 삼성생명(0.16%) 등 삼성그룹 계열사가 28.44%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 안팎에선 이 지분을 모두 매각해, 경영권을 넘기는 방안이 유력하게 보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보유 지분 전부를 판다고 가정하면, 삼성은 약 5,900억 원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제일기획 지분 가치인 6,400억 원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이런 점을 토대로, 일부 전문가들은 삼성이 그룹 재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주력 계열사 매각에 나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매각의 가장 큰 걸림돌, ‘퇴직·이직 임직원’

하지만, 매각작업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들어가고, 그로 말미암은 무형의 정무적 판단까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매각 협상이 그렇듯, 제일기획 매각에서도 가장 중요한 논의사항은 ‘임·직원 정리문제’입니다. 쉽게 말해, 누가 회사를 떠나고 누가 퍼블리시스로 이직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제일기획은 직원들을 상대로 한 인사평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사평가 못지않게 중요한 건 ‘직원들에게 지급할 돈’입니다. 제일기획은 희망퇴직 직원들에게 지급할 ‘퇴직금’과 별도로 퍼블리시스로 옮겨갈 직원들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방침인 것 알려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제일기획이 서울 용산구 본사 별관을 삼성물산에 매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삼성물산은 사들인 별관에 통합 패션매장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거래 금액은 약 256억 원입니다.
 
매각 이유에 대해 제일기획은 무수익 자산을 처분해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선 이직할 직원들에게 줄 ‘위로금’을 마련하기 위해 건물을 매각했단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일기획의 모 부장은 “이직할 직원들에게 위로금을 4~5천만씩 준다고 계산하면, 얼추 건물을 매각한 그 금액이 나온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제일기획 '스포츠단'도 중요한 논의 사항

‘스포츠단’도 제일기획 매각협상에서 중요한 논의사항입니다. 제일기획은 현재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남녀 농구, 남자배구 등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회사인 퍼블리시스 입장에서 보면, ‘국내 스포츠단’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홍보 효과가 미미할 뿐 아니라 구단 운영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 경영에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포츠단이 중요한 건 스포츠단을 이끄는 대표가 김재열 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졌다시피, 김 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둘째 딸인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사업부문장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룹 안팎에선 총수 일가가 운영하는 스포츠단을 쉽게 매각하긴 어려울 거란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은 스포츠단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현재로선 아직 결정된 게 없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룹 내부에서도 ‘매각하자’라는 의견과 ‘그룹으로 다시 가져오자’라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또, 퍼블리시스에 스포츠단을 넘기되, 일정 기간 삼성그룹을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그룹 고위관계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룹이 스포츠단은 다시 가져오자는 의견이 조금 더 우세하다. 하지만, 삼성이 스포츠단을 운영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회사는 아니라 스포츠단 때문에 매각 협상이 결렬될 일은 없을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마지막 관건은 '국내 부동산'

매각 협상에서 마지막 관건은 제일기획이 가진 국내 부동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입니다. 퍼블리시는 제일기획이 가진 국내 부동산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일기획이 가진 건물까지 사들일 마음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힌 겁니다. 건물을 사들이는 것 보다는 사무실을 임대하는 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 건물을 넘겨받아 다시 활용하거나 혹은 차익을 남기고 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내야 하는 막대한 세금과 복잡한 절차 등을 고려할 때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제일기획이 보유한 국내 부동산도 매각협상에서 중요한 숙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 현실로 다가오는 '매각설'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제일기획 매각의 성사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습니다. 제일기획 광고 물량의 70~80%에 이르는 삼성전자 광고를 앞으로 몇 년 동안 보장할지를 두고 삼성그룹과 퍼블리시스는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해도, 광고시장이 전체적으로 불황이라 해외업체가 수천억 원을 들여 회사를 인수할지 낙관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취재과정에 만난 상당수의 삼성 관계자들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볼 때 어떤 식으로든 매각작업은 계속될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그동안 이 부회장이 보여준 경영 스타일이 ‘인수’보다는 ‘매각’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회장은 2013년 하반기부터 전자와 금융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며 화학·방산 사업 등을 정리했습니다. 화학과 방산 계열사를 한화에 2조 원대에 매각했고, 나머지 화학 계열사는 롯데에 3조 원대에 팔았습니다. 삼성은 부인하고 있지만, 보안업체인 에스원과 삼성물산 건설 부문 등의 매각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 차원에서 비주력 사업으로 분류되는 제일기획을 판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는 겁니다. 
● 삼성그룹의 새로운 도전 그리고 ‘불안감’

제너럴일렉트릭(GE)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이끈 잭 웰치. 그는 1983년 1월, 한 식당에서 부인과 식사하던 중 만년필을 꺼내 들고 냅킨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동그라미 세 개를 그리고 "Core(핵심사업), High Tech(첨단 기술), Service(서비스)"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세 개의 원'은 직원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이며, 간단명료한 메시지로 전달됐습니다. 그 메시지는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최근 행보도 언뜻 보면, 핵심 사업에 집중한다는 잭 웰치의 경영철학과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직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GE 직원들과 달리, 제일기획을 포함한 삼성그룹 임·직원들은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저성과자로 평가돼 회사를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삼성이 아닌 이름도 낯선 외국 회사로 이직해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제일기획 직원들은 매각 전 삼성의 다른 계열사로 옮겨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삼성그룹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 경영학 교수는 지금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과거 이건희 회장 때는, 이성복 시인이 말한 것처럼 ‘모두 병 들었지만 아프지 않았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무라카미 하쿠키의 ‘상실의 시대’에 가깝다. 기업이 나가야 할 구체적인 지향점을 조직원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재용 시대의 삼성그룹’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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