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을 뿐"…일제 강점기 치욕의 시작

권영인 기자, 김승환 인턴 기자 k022@sbs.co.kr

작성 2015.11.18 07:5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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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겁니다.”  - 고종실록 1905년 12월 16일

이완용 등 5명이 찾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바로 110년 전 오늘,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습니다. 어린 소녀들이 짓밟히고, 나라의 얼을 빼앗기고, 소중한 유산이 수탈됐던 일제 강점기 36년, 그 치욕적인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수십 인의 군중이 학부대신 이완용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 - 1905년 11월 18일 <황성신문>

외교권 강탈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거센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임금과 법을 멸시한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 고종실록 1905년 11월 23일 

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상소도 잇따라 제기되었습니다. 민영환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의 자결 항쟁도 잇따랐습니다. 수천 명의 군중이 경운궁 앞에 나와 반대와 무효를 주장했고, 종로 상인들은 철시 투쟁을 벌였습니다.

시내 곳곳에는 일제를 규탄하는 글도 붙었습니다.

의병들의 항쟁도 잇따랐습니다. 당시 식사마저 못할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던 이설 선생 역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선말 문신이었던 이설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해 이설 선생은 체포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르고 곤장 8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중병을 치르고 있던 이설 선생은 목숨을 걸고 상소 투쟁을 전개합니다. 그는 매국노를 처벌하고, 무력 항전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왜적을 토벌함이 불가함을 알지 못하며, 상소를 올리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체포돼 경무청 감옥에 구금되고 맙니다. 상소 운동은 와병 중에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선의 저항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을사늑약 후 일어난 의병 중 가장 컸던 홍주 의병 결성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5백 년 예의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홍주 의병이 기세를 떨치고 있던 1906년 5월. 안타깝게도 그는 병이 악화되어 순국하고 맙니다. 구한 말의 유학자이며, 목숨으로 일본과 맞선 이설 선생은 2015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습니다. 을사늑약에 저항한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함입니다. 을사늑약 당시 나라를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싸웠던 최익현, 민영환 등은 그나마 사료가 남아서 그들의 업적을 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설과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초상화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정이야 다양하겠지만, 아직 후손들이 역사를 더 바르게 연구해야 할 이유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SBS 스브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