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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차라리 잠가놔야 하는 비상구라니…

[취재파일] 차라리 잠가놔야 하는 비상구라니…

민경호 기자

작성 2015.06.18 09:1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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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차라리 잠가놔야 하는 비상구라니…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뒷골목을 접하고 있는 건물 외벽에 철제 계단이 나 있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미국 뒷골목' 하면 떠오르는 장면인데, 주변 경관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건물마다 철제 계단들이 설치된 건, 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외부 비상구에 지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항상 설치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비상구 캡쳐_640

지난 15일 새벽, 경기도 안산의 한 4층 노래방에서 두 남성이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친구와 노래방을 찾은 남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화장실에 다녀오던 다른 남성이 방을 잘못 찾으면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의 방에 왜 들어오느냐, 내 여자친구와는 왜 다투느냐며 시작된 다툼은 갑자기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달리던 사람은 비상구의 문을 열고 뛰어나갔습니다. 하지만 비상구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뒤엉켜 쫓고 쫓기던 두 남성은 그렇게 15m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비상구 캡쳐_640

이 사고로 한 명이 숨지고 다른 한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의식은 회복했지만 말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그 문을 열고 나섰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정황상 경찰은 그들이 이 비상구를 '계단이 있는 비상구'로 착각하고 문을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면 당연히 계단이, 하다못해 어떤 공간이라도 나오겠거니 했을 테지만, 내디딘 발이 머무를 곳은 없었습니다.

이런 비상구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달 24일 자정이 가까워져 올 무렵, 경기도 분당의 한 라이브 카페를 찾은 54살 동갑내기 둘이 비상구 밖에 설치된 발코니 모양의 대피시설에서 담배를 피우다 대피시설과 함께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이들은 병원 치료 끝에 간신히 의식은 되찾았지만, 아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재작년 경기도 화성에서는 40대 남자가 4층에서 건물 밖으로 떨어져 숨졌습니다. 모두 '비상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와 관련된 안전시설들은 모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비상구 문을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어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대피시설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 남자 두 명이 올라갔다고 대피시설 자체가 떨어져 추락해 두 명이 크게 다쳤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관한 규정은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나와 있습니다. 시행규칙의 별표를 보면, 비상구는 '엽업장 주된 출입구의 반대방향에 설치하되, 주된 출입구로부터 영업장의 긴 변 길이의 2분의 1 이상 떨어진 위치에 설치할 것'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후에는 이 비상구가 어떤 재질과 크기로 설치돼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입니다. 비상구 너머 무엇이 어떻게 설치돼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비상'구(口)'만 설치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위의 설치 규정은 건물이 아니라 개별 업종에 적용되는 조항이기 때문에, 비상구를 설치해야 하는 것은 건물주가 아니라 업자들입니다. 최소비용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자연스레 법이 요구하는 최소 요건을 갖추는데 급급할 뿐입니다.

창문을 조금 크게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완강기만 놓아둔 후 비상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게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 언급했듯, 법은 '비상구만 갖추라'고 했지 그 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1층이든 4층이든 구멍만 뚫어놓고 그만이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난간이라도 설치해놓는 건 그나마 양반입니다.
비상구 범인_640

2층 이상에 비상구를 설치할 때, 비상구 밖으로 탈출한 사람이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할 것도 의무화해야 합니다. 비상계단을 만들든, 튼튼한 발코니와 함께 비상 사다리를 설치하든 규정하고, 그 시설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도록 규격까지 명문화해야 합니다. 건물 외벽에 달린 대피 시설이 미관을 얼마를 헤치건 간에, 비상구 문 열었다가 목숨을 잃는 이런 어이없는 일은 벌어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비상구의 개념을 '위험한 곳에서 덜 위험한 곳으로 이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비상구 문을 열었는데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더는 비상구라고 볼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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