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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28년 기다린 피해자, 2달 못 기다린 법원

상고법원 설치는 시기상조…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취재파일] 28년 기다린 피해자, 2달 못 기다린 법원
“모두 일어나세요”

법정 경위의 말에 방청객은 기립했다. 방청석보다 높은 법대 위에 있는 법관, 그의 목은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어울릴 만큼이나 꼿꼿했고, 방청객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법관이 자리에 앉고서야 방청객도 착석했다. 2008년 7월, 처음 법정을 갔을 때 본 장면이다. 원고도, 피고인도 아닌 방청객은 왜 법관에게 인사해야 하는 걸까. 공보판사의 설명은 이랬다. “법관에 대한 인사가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입니다.”

헌법상 법관 개개인이 독립된 재판부로 그들의 독립성을 지키고, 그들의 권위를 존중할 필요가 있는데, 기립과 인사는 이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공보판사의 해설에 공감이 갔고 이해도 됐다. 하지만, 지난 7년 간 수 백 번 법정에 들어갔지만, 방청객 중 진심을 담아 기립과 인사를 한 이들이 10명이 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 유서대필로 드러난 법원 검찰의 한계

권위에서 오는 설득력은 강력하다. 사법부가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다. 판결엔 승복해야 하고, 법관의 권위가 바탕이 된 판결은 확정적이어야 한다는 인식도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3심제 안에서 불복은 2번만 가능하고, 그 외 불복은 소용없는 행동으로 국민이 인식해주길 원하고 있기도 하다.

‘강기훈 유서대필 재심’은 이런 인식 체계을 벗어난 사건이다. 재심 사건은 기본적으로 오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지고지순’과 ‘완벽’을 추구하는 법원과 검찰 입장에서 재심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검찰의 기소에 오류가 있고, 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 법원이 역할을 다하지 못해 재심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권위자는 잘못을 인정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강기훈 씨 재심에서 보여준 법원, 검찰은 권위자가 아니었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위는 번졌다. 태생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약한 노태우 정권은 극도로 불안했다. 며칠 뒤인 5월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하면서, 위기감이 극에 달한 노태우 정권은 강경책을 택한다. 21세기에도 반복돼 왔던 ‘배후세력 규명’, 즉 공안몰이였다. 없는 배후를 만들어 본질을 호도하는 것만이 정권 유지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김기설 씨의 양복 상의에서 발견된 유서 2장은 배후세력이 작성해준 것으로 기정사실화됐다. 일부 언론과 수사기관은 자연스럽게 이런 움직임에 동반했다.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운동권을 향해 일갈했고,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통상 ‘학원 집회 사건’을 전담하는 공안부가 아닌 조직폭력배를 수사하는 서울지검 강력부는 배후세력 규명을 위해 나섰다.

범죄와의 전쟁을 성공리에 끝낸 강력부는 조폭 수사하듯 ‘유서대필자’로 강기훈 씨를 지목했고, 그를 자살방조죄로 기소했다. 그 단서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를 제시했다. “망자인 김기설 씨 필적과 유서 필적이 다르고, 유서 필적과 강기훈의 필적이 같다”는 결과였다. 강 씨는 물론 운동권은 동료의 죽음까지 이용하는 패륜적 단체로 낙인찍혔고, “유서대필은 조작된 것”이라는 재야단체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1년 재판 시작 전까지 상황이다.

● 남용된 공소권과 오판…작동되지 않은 사법체계
그래픽_유서대필강기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재판의 결과는 어땠을까. 우선 당시 공소장을 살펴보자.

<1991년 7월21일 강기훈 씨 자살방조 공소장>

“강기훈은 1991년 4.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 사이의 일자불상경(어느 때) 서울 이하 불상지(어느 곳)에서 한국신학대학 리포트 용지에 검정색 사인펜으로 김기설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했다.”


이 공소장을 바탕으로 재판은 시작됐다. 재판은 법원이 강조, 강요한 법정의 권위 아래서 정치상황과 운동권에 대한 선입견이 배제된 채 순수하게 법리다툼으로 진행 됐을까. 아니었다. ‘일자불상경(어느 때)’, ‘불상지(어느 곳)’로 범죄사실을 특정조차 못한 공소장을 토대로 법원은 유죄를 인정했다.

방어권 보장을 위해 범죄시점과 장소를 특정 못하면, 기소를 하면 안 되고 기소를 하더라도 공소기각을 하는 게 원칙이다. 국가의 행위엔 항상 오류 가능성이 있어, 견제장치로 법이 존재한다. 검찰의 기소도 마찬가지다. 공소권 남용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검찰의 입증책임은 무겁고 엄격하다. 때문에 범죄사실의 특정을 요구하고, 심증만 전제된 기소는 법원이 제어한다.

유서 자체를 쓴 적이 없는 강기훈 씨 입장에선 이런 법정다툼 자체가 억울할 테지만, 검찰권의 오남용은 불행하지만 반복된 역사다. 법원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는 것도 이를 막기 위해서다, 결국 강 씨도 법정에서 ‘법’으로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방어의 기본조차 차단했다. 

비교적 쉽게 접하는 절도사건을 생각해보자. A씨가 B씨의 지갑에 든 돈을 훔쳤다고 검찰은 의심하고 있다. A씨는 실제 절도범은 아니다. 심증을 굳힌 검찰은 A씨가 언제, 어디서 B씨 지갑에 든 돈을 훔친 것을 특정하지 못 한 채 기소했다. A씨는 어떻게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억울한 A씨 입장에선 검찰이 범죄시점과 장소를 특정해주면 그 시간, 그 장소에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알리바이)을 입증해 억울함을 풀 수 있다. A씨는 그런 기본적인 방어권마저 박탈된 것이다. 이럴 경우 법원은 검찰의 소 제기에 흠결이 있다고 공소기각을 해야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원님 재판은 막아야 하기 때문인데, 유서대필 사건에선 이런 절차가 작동되지 않았다.

물론 1991년 법원이 강기훈씨의 유죄를 인정하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1991년 7월21일 강기훈씨 자살방조 공소장>
“김기설(망자)은 1982년경 경기 파주 광탄 소재 00종합고등학교 1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강기훈)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

<1991년 5월8일 김기설씨 유서 내용>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은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중략)”


검찰은 대학도 입학 못한 김기설 씨가 이런 문체의 유서는 작성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사람이 ‘변혁운동의 도화선’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바탕에 깔려있었던 모양이다. 또 다른 핵심 증거는 앞서 말한 국과수 필적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재판과정에서 신빙성은 계속 탄핵됐다. 강 씨의 항소심 진행 중에 유서 필적 감정을 한 국과수 김형영 실장이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허위로 감정을 해준 것이 드러나 구속됐다. 또, 유서 필체와 강 씨 필체가 확연하게 차이나는 부분이 지속적으로 변호인을 통해 제기됐지만, 법원은 징역 3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그리고 1994년 8월 17일, 강기훈 씨는 징역 3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만기 출소했다.

● 24년 걸린 4장짜리 무죄 판결문...‘하세월(何歲月)’의 공포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 발생 24년이 지난 2015년 5월14일 대법원.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찰의 상고를 기각한다”

이상훈 대법관은 주문을 읽었다. 무죄 효력의 주문은 10초도 걸리지 않아 끝이 났고, 24년 만에 강기훈 씨는 이렇게 누명을 벗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무죄 이유도 간단했다. 1991년 이뤄진 국과수 감정 결과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24년 전 변호인들이 주장했던 걸 이제 인정해줬다. 필적 감정인인 김형영 실장이 91년 감정 당시 4명의 감정인이 참여해 공동감정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허위증언이었다는 사실도 판결문에 추가했다. 법관의 자유심증주의(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 판단)는 이렇듯 사법부에겐 간단하고 편리한 도구였지만, 피고인에겐 ‘하세월(何歲月)의 공포’였다.

대법원이 총 A4용지 4장(판결 이유는 2장)분량의 강기훈 무죄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24년이 걸렸다. 하루에 글자 한 자씩만 작성했어도 5년 안에 완성됐을 분량이다. 법원이 이렇게까지 하세월일 수 있었던 건, 그동안 강요된 권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사법부를 향하는 진심어린 신뢰보다는, 사법부가 국민에게 강요해 얻은 권위에 만족했던 탓이다. 이런 태도는 반성없고 독선적인 사법부를 만들었고, 사법부의 오만함을 고착화했다.

재심 진행 과정에서 사법부의 오만함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강기훈 씨는 지난 2008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1년 4개월만인 이듬해 9월 서울고법은 “재심을 진행해서 다시 무죄인지 아닌지를 따져보자”는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항고했다. 대법원은 3년이나 지난 2012년 10월에서야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고 재심개시 결정을 확정했다. 재심청구에서 개시결정까지 4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건 지난 14일로, 재심 청구 7년 만이다.

법원은 기왕 17년 기다렸는데, 7년 정도 더 기다리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사법부는 법관의 시간은 일반인의 시간과 다르다고 여기고 있다. 사기사건 법정에서 피고인이 “합의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법관에게 애걸복걸해도, 법관은 “이미 한 달 넘게 시간을 줬는데, 합의를 못했으니 항소심에 가서 다시 합의하라”고 징역형을 선고한다. 피고인의 1달과 사법부의 7년, 사법부의 시간은 고귀한 숙고의 세월이지만, 피고인의 시간은 책임 회피를 위한 수단인 걸까. 사법부가 말하는 “지연된 정의는 부정의”라는 법언이 공허할 뿐이다.

지연된 정의를 뼈저리게 경험한 탓일까, 강기훈 씨는 대법원 선고 당일 출석하지 않았다. 변호인과 시민단체만이 참석해 선고 뒤 “사법부와 검찰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화답은 4장짜리 판결문이었고, 검찰은 침묵이었다.

● 과거사 사건을 마주하는 사법부와 검찰의 몰염치

과거사 사건을 두고 사법부와 검찰이 어떻게 반성해야 되는지를 질문 받는 경우가 있다. 법조인 대부분은 이미 대답을 정해놓고 물어본다.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하고, 검찰은 공소장으로 말한다는 관례에 따라, 사법부는 무죄 판결로 반성하고, 검찰은 무죄 구형을 하면 족하지 않느냐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사법기관이 반성문까지 써가며 입장을 발표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반성을 해야 하는 쪽에서 할 말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반성과 사죄의 방법을 가해자가 선택하려는 것 자체가 오만한 것이고, 또 다른 횡포일 뿐이다. 더구나 가해자가 국가 권력일 때는 사죄의 정도와 수단은 사인보다 깊고 넓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법원과 검찰이 보여준 태도는 접촉사고 가해자의 반성과 피해 변제만 못했다. 유서대필 사건은 수 백 개 과거사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까지 법원은 과거사 사건 단순 처리에 급급했다. 법관의 진지한 반성을 본 적은 내 기억으론 단 한번 뿐이 없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 방식을 물어본 법조인에게 답이 될 것 같은 장면이 하나 있다.  

지난 2010년 7월16일 서울고법 312호 법정. 진도 간첩단 재심사건 선고공판이 열렸다. 지금은 수도권 법원의 법원장인 담당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한 뒤 ‘판결을 맺는 말’을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30년 전 기록을 다시 살펴본 우리의 판단은 과거 판결이 잘못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장기간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조작된 것으로, 법원이 사법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진실 발견을 소홀히 해 무고한 생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한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지낸 피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모두의 마음을 담아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본 재판부의 법관들은 과거 잘못된 역사가 남긴 가슴 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며, 피고인들의 진정 어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실체적 진실 발견에 만전을 기해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사법부의 그늘진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피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고 남은 가족들도 이 땅에서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85년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김정인 씨 유족은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국에 있는 남편도 뛸 듯이 기뻐할 겁니다”라고 김 씨 아내 한 모 씨가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한 씨는 법관의 판결과 태도에서 진정성과 울림을 느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당시 재판부는 반복된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였는지, 과거를 잊지 말자는 다짐이었는지, 피해자의 고통을 모두가 알아야 된다는 의지였는지, 이 사건 고문 내용까지 상세히 판결문에 적시했다.

“1980년 8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전남 진도에 사는 김 씨와 친척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해 불법구금과 고문을 했다.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라이터로 몸을 지지고, 발가벗긴 채 공중에 매달아 몽둥이로 구타하고, 성기에 볼펜심까지 밀어 넣었다.(중략)중정에서 고문과 협박당한 사실을 김 씨가 검사에게 알리자, 검사는 중정 수사관에게 ‘다시 데려가서 조사하라’는 얘기까지 했다”

● 과거로 회귀하는 법원. 퇴행하는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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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형량을 줄일 목적으로 법관에게 반쪽짜리 반성문을 제출하듯, 법원도 형식적 반성을 위해 ‘사죄문’을 국민에게 제출하는 게 능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사죄문 발표가 재발 방지를 위해 작은 각오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과거사 사건 때마다 하는 게 옳다. 대법원이 공식적으로 과거사에 대해 입을 연 적은 한 번이다. 지난 2009년 9월, 진심어린 반성인지, 적극적인 사죄인지는 해석이 분분했지만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부 60주년 기념식에서 사법부 과오에 대한 반성 발언을 했다.  

“과거 우리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대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의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재심절차가 적법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하겠다."

아직 검찰은 공식적으로 과거사 반성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사법부와 검찰 사이 간극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발언 역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 됐다. 반성의 진정성은 사법부가 과거사 피해자들에게 마땅해 해줘야 하는, 실질적인 배상을 해주는 역할에 충실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 결과는 아니었다. 도리어 과거사를 마주하는 사법부의 태도는 후퇴하고 있다. 이런 퇴행적 모습은 대법원 판례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통상 3년까지 인정하던 손배 소송 제기 시효를 ‘형사보상결정일로부터 6개월’로 제한하는 새로운 판례를 확정했다. 쉽게 말해서, 과거사 피해자들은 형사보상을 받은 뒤 6개월 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야 배상을 받을 수 있고, 6개월이 넘으면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민법 766조와 국가재정법 96조에 따라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순수히 해석을 통해, '형사보상 6개월' 이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권리자가 사정이 있어 소멸시효를 중단할 수 없을 때 그 사정이 종료된 이후부터 6개월 이내에 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는 민법 시효중단 조항을 찾아낸 것이다. 법 개정도 아닌, 대법원의 해석 만으로 시효는 3년에서 6개월고 갑자기 단축된 것이다.

뜬금없는 시효 단축으로 1981년 간첩으로 몰려 16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2차 진도간첩단 사건’ 피해자 박동운 씨와 가족 26명은 1, 2심에서 56억 원 상당의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의 새로운 판례가 적용돼 파기 환송돼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다. 박 씨는 2009년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을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 같은 해 11월 무죄가 확정됐다. 이듬해 9월 형사보상결정이 확정됐는데, 형사보상 확정 뒤 8개월이 지나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대법원이 제시한 6개월 기준보다 두 달 늦었기 때문에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15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또 다른 피해자는 대법원의 기준인 6개월보다 열흘이 지나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기각당하기도 했다.

사법부의 퇴행은 순차적으로 진행됐고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과거사 사건에서 지연이자 기산점을 바꿨다. 쉽게 말해, 가해자인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불법행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데, 이자 계산의 출발시점을 대폭 늦춘 것이다. 과거엔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을 기산점으로 삼아 계산했다. 불법행위를 한 직후부터 배상 책임이 발생하고, 그 때 배상금을 바로 안 줬으니까 이자 계산도 그 때부터 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즉,  돈을 빌려간 시점부터 이자계산이 시작된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순전히 자체 해석으로 새로운 판례를 만들었다. 이자 계산 시점을 손해배상 항소심 변론 종결 시점으로 줄인 것이다. 한 마디로 30년 전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부터 계산되던 이자를, 재심 손배소 재판 변론이 종결된 시점인 1년 전으로 단축시킨 것이다. 이런 탓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77명에겐 배상금 436억 원 중 250억 원을 국가에 반납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의 이런 판결이 있은 후, 정부는 “과다 지급된 배상금을 토해내라”며 과거사 피해자들을 상대로 연이어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 28년을 기다린 피해자...두 달을 못 기다린 법원

대법원의 이런 태도는 “과거사 배상금이 너무 많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통상 손배소송에선 원피고의 책임을 나눠 따진다. 원고의 책임도 20% 있으니, 피고는 요구 배상금의 80%만 지급하라는 식이다. 하지만, 과거사 사건 손배소송에선 과실 비율을 나눌 수 없다. 100% 국가의 책임으로 희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대법원은 과거 판례를 부정하고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 국가의 배상액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사법부는 피해자 보단 가해자인 국가의 재정상태를 먼저 걱정한 것이다. 30년 전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은 또 다시 국가 권력 앞에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반복된 셈이다.

사법부는 “그게 법이니까, 법에 따라 한다”는 오만한 권위로 과거사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소멸시효가 생긴 건, 우리 법체계가 “권리 위에 잠자는 자”까지 챙겨주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의 6개월 기준으로, 과거사 피해자들은 졸지에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됐는데, 정작 ‘권리를 강제 박탈한’ 국가나 사법부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아니다. 

앞서 언급된 2차 진도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박씨는 1981년 간첩 누명을 썼고, 16년을 복역했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진 건 2009년이다. “국가권력의 횡포로 사건이 조작됐다”는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무려 28년이 걸렸다. 2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가의 폭력은 지속상태였고, 그 기간 동안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정부, 인권의 마지막 보루라는 법원과 검찰은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런 사법부는 “6개월 동안 소송 제기 안하고 뭐했느냐. 두 달 늦었으니 배상해줄 수 없다”며 박씨를 권리 포기자, 권리 위에 잠자는자 규정했다. 박 씨는 고통 속에 28년을 참고 기다렸지만, 법원은 두 달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가 자행한 인권유린 사건에서 시효를 적용하지 않아야 된다는 게 국제적 추세라는 걸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거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법부의 인식이 잘못 됐다는 걸 헌법은 말해 주고 있다. 우리 헌법은 국민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대해 부여했다. 국가의 민주적 정당성은 국민에 대한 보호, 즉 기본권 보장에서 출발한다. 

- 헌법 7조: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얼마 전, 한 전관 변호사는 “국민은 속성상 의무보다 권리를 앞세울 수 있지만, 국가는 의무가 곧 권리이기에 국가에겐 의무만 있다”라고 말했다. 사법부와 검찰 등 국가기관에게 권한을 부여한 건 국민이고, ‘권한이 곧 권리’인 정부기관의 특성상 ‘국민에 대한 책임 의무’를 통해 기관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법원과 검찰의 권리 실행은 국민에 대한 의무를 위해 이뤄지고, 그 의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권리가 실현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있어 사법기관은 출발부터 종결 때까지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권리를 포기했다. 과거사 사건의 가해자는 국가다. 국민 보호 의무가 있는 국가가 기본권을 유린했고, 당시 사법부는 존재가치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렇게 20~30년 긴 세월이 흐르면서 피해자의 고통은 증폭됐고, 그 사이 사법부는 ‘지연된 정의’의 주체로 다시 가해자가 됐다. 또 진실이 규명된 뒤 국가를 상대로 용기 내 소송을 낸 피해자에게 이젠 책임을 묻고 있다.

● 상고법원은 시기상조…“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피해자에게 귀책사유를 찾으려는 사회만큼이나 후진적인 사회는 없다고 한다. 지금 사법부가 보이는 모습이다. 이런 사법부의 최대 관심사는 상고법원 설치다.

사건이 넘쳐 대법원이 심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어, 상고법원을 설치해 대법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논리다. 사법부가 생각하는 대법원 역할은 정책심이다. 소수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심리해 정책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대법원의 착각이다.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본적인 역할은 국민들의 권리구제이다. 정책심의 역할은 헌법재판소로 충분하고, 대법원이 그 역할을 해야 된다고 선택하는 건 국민의 몫이다.

권리구제 기능조차 제대로 수행 못하는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설치하겠다고 나선 건 오만이자, 독선이다. 또 다시 국민들에게 권위를 강요하려는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사법부의 권위는 판결을 통해, 개인 권리구제를 통해, 인권의 마지막 보루라는 역할을 통해 쌓은 게 아니었다. 신뢰가 없는 권위는 모래성인데, 사법부는 자신들의 권위가 견고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니면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 여전히 통하고, 과거처럼 권위를 강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는 정책심 강화와 더불어 사법적극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사법부라는 '3권의 한 축'을 공고히 하겠다는 거다. 행정부와 국회가 잘못하면, 법원이 한 축이 돼 견제해야 한다는 헌법상 3권 분립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상고법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적극주의의 방향은 정부의 오류, 공권력 남용에 피해를 입고 있는 국민을 향해야 한다. 그동안 사법부는 과거사 사건이나 기타 소송에서 기본적인 역할조차 다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사법부의 태도로 볼 때, 그들의 견제 대상은 정부나 국회가 아닌 국민이었다.  '법을 모르는 무지의 대상'으로 국민을 대했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되고자 애썼다. 상식 수준으로 해석하던 법을 소극적으로 해석해 배상액을 줄이려 애썼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정부 입장에선 이런 법원의 태도는 사법적극주의 였을테다. 그 덕분에 정부는 면죄부 아닌 면죄부를 받았다.  결국 상고법원 설치는 방향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소형차도 제대로 운전 못하는 기사가 대형 버스를 운전하겠나고 나선 거와 다를 바 없다.

진정한 권위자는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의 사법부와는 거리가 너무 먼 얘기다. 헌법상 최고법원은 대법원으로 규정돼 있어 개헌 전 상고법원 설치는 명백한 위헌이라 분석은 차치하더라도, 과거사를 마주하는 대법원의 태도를 볼 때 상고법원 설치의 필요성조차 공감가지 않는다.  법원 관계자는 “수 십 년 전 오판 책임을 현 사법부에게 묻는 건 지나친 책임 전가이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으면 사법부도 역할을 한 것이고, 이젠 국민의 실질적 재판권 보호를 위해서라도 상고법원 설치를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진일보한 대법원이 되기 위해 상고법원 설치는 필수라는 취지다. 그런데, 이 역시 사법부의 착각이다. 

1991년 27세 나이에 강기훈 씨는 국가권력의 피해자가 됐다. 사법부의 오판으로 강 씨는 27세 이전의 인생까지 부정당했고, 27세 이후부터 2015년 51세까지 불명예를 안고 살았다. 그리고 법원 검찰의 오판으로 젊은 시절 무한한 가능성에 장애가 초래되면서 앞으로의 인생까지 달라졌다. 한 마디로 사법기관의 오판은 한 사람의 인생과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다는 말이다. 당시 수사와 재판에 참여한 검사와 법관이 이 사건에 대한 오판으로 그들 인생 전체를 부정당했을까. 한번의 오판으로 그들 일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지도 않다. 실제당시 관련 법조인들 중엔 여전히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인사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판의 피해자들은 일생을 부정당했고,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냈다. 사법기관의 역할이 그만큼 무겁고, 무서운 건데, 지금의 사법부는 그 무게감을 알 지 못하고 있다. 기본이 약한 대법원이 지금 상황에서 상고법원을 설치한다면 무게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게 뻔하다. 심리부실의 원인을 ‘넘쳐나는 사건’에서 찾고, 해결책으로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걸 그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성찰 없이 ‘남의 탓’, ‘환경 탓’만 하는 사법부에게 올 초 내가 들었던 말을 전해주고 싶다.

같은 팀 선배 기자한테 불만족스러운 환경과 통제권 밖의 요인을 거론하며 “취재환경이 나빠서 기자질 못 하겠다”는 푸념을 했다. 선배는 그날 새벽 ‘선배로서 반성’과 ‘격려’를 혼합해가며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짧은 메시지 하나였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말만 하지말고 바로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라는 이솝우화에서의 비유)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 이 말을 보고, 사법부는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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