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서울시향 진은숙 상임작곡가 "'문화의 힘' 중요"

조지현 기자 fortuna@sbs.co.kr

작성 2015.03.31 10:12 수정 2015.03.31 14:4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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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서울시향 진은숙 상임작곡가 "문화의 힘 중요"
서울시향 사태가 불거진 지 만 4개월입니다. 지난해 12월 2일 새벽,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 17명은 박현정 당시 시향 대표의 폭언과 인권 유린 내용이 담긴 긴급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박 전 대표는 '정명훈 예술감독의 사조직처럼 운영돼온 시향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반박했고, 정 예술감독의 연봉과 처우 등이 과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죠. 그 사이 박 대표는 사퇴했고, 지금은 서울시 이창학 문화체육관광본부장이 대표직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일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서울시향 사무실을 압수수색했습니다. 박현정 전 대표가 자신에 대한 내용을 외부에 알린, 사무국 직원 17명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은 내부고발자를 찾기 위한 압수수색에 나선 겁니다.  4월로 예정됐던 서울시향의 미국 7개 도시 투어는 티켓이 65% 정도 판매된 상태에서 취소됐습니다. 시향은 사람으로 치면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졌지만, 언제 퇴원해 건강을 회복할지 아득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서울시향이 오랜만에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주인공은 진은숙 상임작곡가. (여기서 잠깐! 진은숙 상임작곡가는 누구? : 음악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2004)했고, 2005년엔 생존 작곡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아놀드 쇤베르크상' 수상.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가 그녀의 작품을 활발히 연주하고 있는 작곡가. 사이먼 래틀이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명 중 한 명'으로 꼽기도. 세부적인 내용은 2012년 김수현 기자의 취재파일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취재파일] "작품 쓸 때마다 벌레가 된 내 모습을 봐요")
진은숙 상임작곡가
2006년부터 서울시향 상임작곡가를 맡고 있는 진 상임작곡가의 이번 간담회는 10년차를 맞은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프로젝트인 '아르스 노바'를 설명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더 궁금한 건, '아르스 노바'보다, 지난 4개월간의 시향 사태에 대한 진 상임작곡가의 생각이었습니다. (따옴표 안은 진은숙 상임작곡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 부분입니다. 자신의 발언이 또다른 갈등을 낳지는 않을까, 진 상임작곡가는 표현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현재 서울시향의 연주회와 프로그램, 투어(해외연주), 레코딩(음반 녹음) 등 모든 활동은 매우 국제적인 수준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많았고, 저희는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어려움을 헤쳐가면서 힘들게 해왔고, 그 사이 조직적인 면에서도 개선이 되고, 직원들도 많이 배우고, 국제적인 수준으로 나아갔어요.

저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내부 조직원으로서, 성과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자부심 있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시향은 대한민국에서 국제적인 수준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몇 안되는 단체 중 하나라고, 제 명예를 걸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진 상임작곡가는 내적 갈등, 외부의 문제제기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양상과 해법를 찾는 과정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불화가 있을 수도 있고, 문제점도 제기할 수 있어요. 외부에서는 저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고, 서울시향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엇갈린 평가를 할 수 있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의견이 나오면 사실에 근거한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풀어야죠. 양측이 서로 사실에 기반한 제안을 하고, 서로 납득이 되는 부분은 납득을 해야 하는데, 공격이 논리적 객관적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적, 감정적, 비논리적으로 이뤄지는 건 굉장히 유감입니다.

이런 갈등이 생겼을 때, 이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민주적인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논리적,감정적 주장들이 대세가 되면 안된다고 봅니다. 건강한 시민정신으로 그걸 막아야죠. "


또 시향이 얼마나 무방비로 외부의 공격을 받았는지 설명했습니다.

"지난 넉 달간의 양상을 보면, 한 단체가 공격을 받을 때 단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대표인데, 시향은 대표이사가 없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대표와 갈등이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그동안 시향이 겪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헤아려주셨으면 해요. 시향은 직원, 단원, 이사회, 후원회 등 복잡한 단체라서,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통솔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공석이다 보니, 공격을 받으면서 피해를 너무 많이 받았고, 단체를 변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진 상임작곡가는 서울시향이 앞으로 쇄신하고 더 성과를 낼 것이라며, 그러나 지금껏 시향이 이룬 것 역시 과소평가되거나 폄하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울시향이 지나친 타격을 받고, 이 과정에서 지난 10년간의 큰 성과, 한국사회에서의 의미가 폄하되고, 별볼일 없는 단체로 여겨지는 건 공정하지 못합니다. 직원들의 능력이 폄하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실무를 해 본 사람으로서 이들은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언론에 나오는 시향의 이미지가 너무 과장돼 부정적으로 비춰졌고, 너무 파괴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걸 수습하는 데에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향과 관련된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미지를 쇄신하고, 여태까지 해왔던 성과를 이어가면서 앞으로 더 큰 성과를 내야 합니다 조직이나 계약, 행정상의 불합리한 점은 서울시의 감사를 받고 고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이렇게 대답할 법한 내용입니다. 저는 그 다음 얘기가 더 와닿았습니다. 이 취재파일을 쓰는 이유도 바로 지금부터 할 얘기 때문입니다. 간담회장의 질문은 '세금으로 왜 예술을 지원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문화의 힘이라는 게 있잖아요. 시민들의 세금으로 여러 사업을 하는데 '나는 저런 음악을 안 듣는데, 내 돈으로 왜 저걸 지원하냐'고 말하는데, 여기는 맹점이 있어요. 세금으로 도로공사를 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평창동에 도로를 만드는데, '나는 그 동네에 안 가는데, 왜 만드냐'고 하지 않잖아요. 또 '내 돈으로 왜 그걸 하지' 라고 하는데, 내가 내는 세금이 직접 나와 상관이 없더라도, 뭔가 좋은 일을 해서 이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우주 개발이면, 내가 지금 당장 우주로 갈 건 아니지만, 좀 더 진리에 다가간다든가, 예술을 한다든가에 투자해서 거기에서 성과가 있고, 이런 행위가 이뤄지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거든요. 저희는 이 일을 해나가면서 이게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걸 계속 증명해 나가야죠.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개개인의 인생은 짧지만 여러 사람들이 이루는 한 사회의 지속적인 '큰 문화의 흐름'이 있잖아요. 개인의 삶도 이 흐름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저는, 역사는 정열(passion)의 역사라고 생각해요. 먹고 사는 걸 넘어 '진리'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 인간의 근원과 우주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대답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예술가들은 궁극적 아름다움을 캐기 위해 노력을 하고요.


한 예술가나 과학자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이,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성취'였겠지만 시간이 지나 역사가 되면 '그 시대가 성취한 것'이거든요. 저는 인류의 의미를 거기서 찾습니다. 저는 물론 일해서 돈벌어 먹고 살지만, 그 이상의 존재 의미를 가지려면 이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지요. 서울시향 일도 그런 맥락에서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이 사회에서 갖고 있는 의미는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울시향의 문화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지만, 경복궁 같은 유형의 문화재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향을 파괴하는 것은 불도저로 경복궁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은숙 상임작곡가는 시향이 국제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한국을 알리는 얼굴 역할을 하는 등 '돈'만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엇보다 시향의 대표로 예술경영 전문가가 임명돼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돈'이나 '승패'와 관계되는 부분은 철저히 전문가들이 맡지만, '돈'도 되지 않고, '승패'를 가릴 수도 없는 정신적 분야의 리더는 아무나 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이니까요.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오케스트라를 갖는 것, 지금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연주회 갈 여유가 없지만, 언젠가 한 번 직접 듣고 싶은 시립 교향악단이 가까이 있다는 것, 무료 야외 콘서트에서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 아무 도시에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 운 좋은 시민이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지금 우리는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