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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과연 기자들은 김영란 법을 싫어할까

우리 사회가 김영란 법을 다루는 방식

[취재파일] 과연 기자들은 김영란 법을 싫어할까
“공직자는 직무 관련 여부 및 기부, 후원, 증여 등 그 명목에 관계없이 동일인으로부터 1회에 100만원 또는 매 회계연도에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 등을 받거나 요구 또는 약속해서는 아니 된다.”

김영란 법의 핵심 문구입니다. 형법은 대가성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이른바 ‘뇌물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령, 공직자한테 자동차를 선물했는데, 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면 뇌물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반면, 김영란 법은 대가성이 없어도 처벌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보는 눈도 많은 요즘, 당장의 대가를 바라고 금품을 주는 일이 예전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힘 있는 공직자에게 미리 금품을 뿌려놓고 아쉬울 때 한 마디 할 수 있게 밑밥 깔아놓는 일 막아보자는 거죠. 설득력 있습니다. 사실 전시에 하는 로비보다 평시에 하는 로비가 더 효율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공직자 범위가 논란입니다. 언론인, 특히 기자가 공직자냐 아니냐가 핵심 쟁점이 됐습니다. 애초 기자들은 법의 취지가 워낙 좋다보니 김영란 법 처리에 미적지근한 국회를 비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한심한 국회의원들 마음껏 금품을 못 받아 이러는 거라며 공격에 나섰죠. 국회의원에 반감이 큰 국민 정서를 활용한 결과였을 겁니다. 기사 쓰기 얼마나 좋은가요. 그런데, 김영란 법 처리 절차가 진행될수록 아차 싶었던 모양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젠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습니다. 언론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김영란 법이 너무 과도하다며 위헌소지가 있다는 거죠.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기사 쓰기 편할 땐 막 써버리다가 말이 바뀌어 버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국민들 날카롭습니다. 언론이 이제 와서 김영란 법 반대한다며 혀를 찹니다. 정황만 따져보면 욕먹을 만도 합니다.

때마침 공직자의 범위에 기자를 제외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A기자가 있습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왔습니다. 권력의 표적이 되면서, 검찰과 경찰은 은근슬쩍 먼지를 털기 시작합니다. 취재원과 항상 밥 먹고 술 먹으며 사람 만나는 게 일인 기자, 수사망을 빠져나가긴 쉽지 않습니다. A기자는 김영란 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됩니다. 증거 수집하고, 제출하고, 불려 다니고,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행여 무혐의로 결론 나도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간 들인 공은 엄청났습니다. A기자는 생각합니다. "기사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거겠지? 아, 힘들다. 이제 그만하자."

물론, 언론 자유 위축이란 논리에 대해 국민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합니다. 가만 보면 그 중심에는 기자에 대한 반감이 있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 반감의 수위는 상상 이상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과거 부패의 상징은 국회의원이나 검사였는데, 요즘엔 기자도 단골입니다. 국회의원이나 검사는 부패해도 카리스마라도 있지, 기자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야무지게 기생하는 야비한 캐릭터로 나옵니다. 기자에 대한 반감이 이렇게 큰데, 기자를 김영란 법의 예외로 둔다니 특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거죠. 기사나 제대로 쓰고 언론 자유를 말하라, 이런 논리입니다. 기자 몰골이 이렇게 흉측해졌다니 저부터 반성해야겠습니다.

김영란 법에 기자를 적용하면 언론 자유를 위축한다는, 그 명제의 전제는 '털면 나온다.'입니다. 그런데, 저는 '털면 나온다.'라는 그 전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털면 나오는 시대, 어떻게 보시는지요. 기자들은 털면 나오는 시대를 또 어떻게 다루게 될까요.

사실 기자 입장에서도 김영란 법은 나름 신나는 일입니다. 무한 기사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언론사에는 연초에 비리 제보가 많이 들어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인사철이거든요. 진급 경쟁자들의 비리를 은근슬쩍 언론에 흘리는 거죠. 무한 경쟁 시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각박하다는 방증이겠죠. 김영란 법 이후 이런 일은 갑절로 많아질 겁니다. 문제는 선거철입니다. 경쟁 후보가 지갑만 열면 김영란 법 위반이라며 제보가 쏟아지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대 후보의 낙선을 목적으로 몰래 선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선물을 받은 후보 측이 국민권익위원회에 즉시 신고를 하지 않으면, 좀 지체하면 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될 겁니다. 최근 함께 만난 국회의원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선거철이 되면 김영란 법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게 될 거라고요. 권력도 신이 나겠죠. 지금도 여론 동향 살펴보겠다고 피의사실 은근슬쩍 언론에 흘리는 일이 많은데, 마음에 안 드는 인사 망가뜨리는 건 시간문제가 될 테니까요.

의사는 질병 덕에 먹고 살고, 판사는 범죄 덕에 먹고 살고, 기자는 비리 덕에 먹고 산다고 합니다. 수사 기관이 내사만 해도 기사가 나오는 세상, 누군가가 김영란 법 위반 ‘혐의’로 국민권익위원회가 조사를 착수했다면 기자 입장에서 기사는 쓸 수밖에 없습니다. 꽤 구미가 당기는 기삿거리입니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피조사자는 A 기자처럼 국민권익위원회나 수사 기관에 줄기차게 불려 다니며 증거를 제출해야 할 겁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이 원칙이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보다 기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혐의가 되도 피해자들의 내상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언론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겠죠. 권력과 제휴해 누구든 털면 나온다는 전제를 적극적으로 구현해 낼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언론 자유 침해'보다 '언론의 방종'이 더 염려스러운 이유입니다. 물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느냐는 지적도 나올 수 있습니다만, 무한 경쟁 사회 속 언론은 권력의 롤 플레이어가 돼 버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와서인지, 기자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지엽적인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기자를 범위에 넣느냐, 마느냐의 논란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논란을 야기한 전제가 '털면 나온다.'라면, 그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 부터 출발하는 게 맞습니다. 우리 사회 그 누구도 김영란 법의 취지를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법이 적용됐을 때의 기회비용이 어떤지, 법리적으로, 실증적으로 꼼꼼히 따질 부분은 더 정밀하게 따져야 합니다. 몇 년 째 계류된 법안이라며 지지부진했다는 비난 뒤, 지금껏 우리 사회가 김영란 법을 다뤄왔던 방식은 '부패는 나쁜 거'라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임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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