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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최초의 3.1절 기념식은 언제 어디서 열렸을까?

3.1절을 기리는 참 의미는…

[취재파일] 최초의 3.1절 기념식은 언제 어디서 열렸을까?
3.1절 94주년입니다.

3.1절은 다 아다시피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을 선언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그런데 실제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난 건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부터인데 그전에도 3.1절이 국경일이었을까요? 기념식도 했을까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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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사진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절 기념식을 나름대로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올림픽 대극장을 빌리고 교민들에게도 알려 7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대형 태극기를 걸고 '독립만세'라고 적힌 휘장도 붙였습니다. 태극기를 세계 여러 나라 국기, 만국기와 함께 장식했습니다. 그렇게 진행했던 3.1절 1주년 기념식, 사진 1장이 그날을 기록했습니다.

또 하나의 기록,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3월 1일자 독립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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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년, 1920년, 3월 1일자는 독립신문 특별호,  3.1절 특집으로 발간됐습니다. 특집호에서는 독립선언서 전문을 다시 싣고 1919년 3.1절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이날 기념식 예고 기사가 특히 흥미로웠습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는 한글로 바꿨습니다.)

[상해민단 주최 대축하회]

금일 상해민단에서는 정안사로 올림픽 대극장에서 독립선언 기념 대축하회를 연다는데 선언서 낭독식, 상기식 등이 잇슬지오. 국무원 이하 우리 정부 직원, 개회 중인 의정원 의원, 기타 각료...상해 거류민은 전부 출석할지오. 몇몇 외빈에게도 청장을 발하엿는데 선언 제일회 기념일뿐더러 임시정부 소재지의 축하식인 고로 장엄을 극하리라.


이어 발간된 3월 4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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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상하이에서의 행사내용을 기사로 실었습니다. 예고 기사에 비해 당연히 훨씬 깁니다. 인쇄 문제인지 사진은 실리지 않았습니다.

[상해의 삼일절]

조조에 시내 동포는 가가에 태극을 달고
국무원급 의정원의 축하식과
대극장 내의 성대장엄한 민단 주최의 대축하식과
그 후의 자동차시위운동,
열성과 열루로 지킨 첫번 국경일에
동포의 결심은 더욱 굿어지다

삼월 일일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한 삼월 일일,
이천만 대한인은 간 곳마다 잇는 곳마다,
천년 후 만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직혀 축하할 삼월 일일
대한의 자녀들은 엇더케 이날을 직혓는가.

조조의 상해시내

삼월일일 오전 육시경부터 상해시내의 한인의 주가에는 부활한 태극국기가 날기 시작하엿다. 바로 밤새기를 기다리기가 어려?던 것 갓다 명덕리 보강리 급로비로 일대에는 여긔져긔 태극기가 날닌다. 혹 개인으로 한인의 이층을 빌어잇는 이들도 다 국기를 달아 이날을 경축하엿다. 아마 법계 일대만 하여도 사오십은 된 것이니 상해시내에 이러케 대한의 국기가 날닌 것은 금차가 처음이다 이날에 비로소 세계 각국인이 모혀 사는 상해 한복판에서 우리는 대한인이다 하는 표를 보엿다 매일요와 경절에 영법미의 국기가 호호에 날닐 때에 우리는 얼마나 그를 부러워하엿던고. 동포들은 아해들까지도 수일전부터 이 신성한 국경일의 준비를 하야 작일에 지하야 아조 명절기분이 되엿섯다. 날은 흐럿스나 중춘일기에 그러치아나도 심신이 자못 상쾌하거늘 문전로두에 빗나는 태극기가 경풍에 편편함을 볼 때에 대한인의 감격이야 얼마나 하엿스랴. 아직 촌척도 회복치못한 고강, 차금 옥중에 게신 형제와 자매 모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듯 하지마는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로를 무한히 깃부게 축하하자, 놀자.


(마지막 문장이 특히 마음에 꽂힙니다.)

3.1절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국경일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1주년 때부터 임시정부 차원의 행사가 치러지고 3.1절이라고 지칭해 기념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시 1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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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일에도 상하이에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장소는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참석인원은 더 많아보이고 모두 정장 차림, 손에는 태극기를 들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이후에도 상하이에서 기념식은 있었겠지만 사진 자료를 통해 확인된 건 아직 없는 듯합니다.

일전 취재파일에도 적었습니다만,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가 잇따르면서 임시정부는 침체기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거센 탄압에 직면하게 됩니다. 백범 김 구 선생 등 임정의 요인들에게도 현상금이 내걸리고 수배령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중국 내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중국 공산군의 대장정 못지 않습니다.

상하이에서 떠나 그리 멀지 않은 항저우(항주)로, 다시 자싱(가흥)으로, 전장(진강), 난징(남경), 창사(장사), 광저우(광주), 류저우(유주), 치장(기강), 마지막엔 충칭(중경)까지. 충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정기에 접어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충칭 임시정부 시대가 이어집니다.(지역으로 따지면 9곳인데.. 자싱은 오로지 피난을 간 곳으로 임정 청사는 없었기 때문에 빼고 세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상하이 이후 8곳을 옮겨다닌 겁니다.)

피난다니던 이런 때에 기념식을 하기란 쉽지 않았겠죠. 20년대 중후반, 30년대 초중반에는 남아있는 기념식 사진은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이 시기에 해외에서 교민들이 개최했던 3.1절 기념 사진은 이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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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쿠바 교민들의 기념식 사진입니다.

'대한독립선언 제18주년 기념대회'라는 현수막 아래 쿠바 깃발과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습니다. 교민들에게도 3.1절이 엄연한 국경일로 인식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다시 중국 임시정부 기념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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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창사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제 십구주 삼일절 기념대회라는 현수막 아래 태극기와 중화민국 깃발이 걸려있습니다.  이날 축하공연도 했다는데 공연에 참가한 교민들이 따로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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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북과 트럼펫 등 제법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가운데 머리를 빡빡 밀은 꼬마 아이가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올해 86세인 김자동 회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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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아마 치장에서 촬영한 사진 같지만 더 조촐합니다. 계속된 피난과 이동 속에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나 상황이 많이 어려웠다는 게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충칭 임시정부 시대, 다른 사진은 많은 듯한데 3.1절 기념식 사진은 찾지 못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별다른 역할을 못합니다. 한창 훈련 중이던 한국 광복군도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했죠.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김 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했습니다. 1945년 11월과 12월, 임시정부는 1진, 2진으로 나눠 환국합니다.

그리고 1946년 3월 1일, 처음으로 한국 땅에서 공식 3.1절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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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27주년 기념식, 1920년 상하이에서의 1주년 기념식 이후 26년 만에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열린 것입니다. 서울 보신각 앞에서의 이 행사에서 김 구 주석은 축사를 했고, 김규식 부주석은 만세 선창을 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사진 자료는 백범김구기념관 부설기관인 백범학술원을 통해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백범 학술원장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이 의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한 원장님의 말씀을 일부 요약해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취재파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1919년 3월 1일날 독립선언을 발표해서 그렇죠. 3월 1일날의 독립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제한테 나라를 빼앗겨서 식민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리 한국민족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국이다 라고 하는 것을 1919년 3월 1일날 독립선언으로 발표를 한 것이죠. 독립국이라고 하는 걸 선언을 해놓고 그 다음 달 19년 4월 11일날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 이름을 가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독립국을 세운 것이죠. 그래서 그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를 유지 운영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고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던 것은 3.1 독립선언서에 의해서 수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매년 3월 1일날 3.1절 기념식을 아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큰 기념일로 정해서 매년 행사를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는 것은 정식으로 완전히 독립된 국가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기구죠. 그래서 우리 민족으로서 기념할 수 있는 것이 그런 독립을 선언한 독립기념일이고 우리 민족으로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국치 기념일이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수립 기념일이고.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그 세 날은 특별히 기념일로 정해서 아주 기념일 행사를 크게 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반성해야 할 것이 있어요. 우리 민족의 기념일이라든지 그런 것이 언제 정해지고 왜 정해졌는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이유없이 의례적으로 행사를 해오는 경우가 많죠. 3.1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3.1운동 그러잖아요? 그래서 3.1운동 그래서 그냥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는 것을 위주로 행사를 하죠.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근데 1919년 3.1절은 만세 부르자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한다. 우리는 독립이다 라고 하는 것을 선언한 것이 근본적인 취지입니다.

또 그것을, 그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태극기를 들고 가서 만세를 부른 것이죠. 근데 우리는 지금 독립을 선언했다고 하는 진짜 목적은 별로 안 하고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른, 만세 운동 위주로 행사를 하잖아요. 그런 것이 국가기념일을 우리가 잘못 기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3.1절을 기념하면서 좀 정부고 국민들이고 좀 새롭게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3.1절은 우리가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른 만세 운동을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우리는 일제 식민지 지배를 부정한다. 우리는 독립국이다. 라고 선언한 것이 3.1절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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