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 서태지와아이들, 음악 넘은 문화혁명

SBS뉴스

작성 2012.03.16 03: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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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23일은 서태지와아이들이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고 세상에 등장한 날. 오는 23일로 서태지와아이들이 꼭 데뷔 20주년을 맞는다.

서태지와아이들은 1집 '난 알아요'를 시작으로 1996년 1월22일 해체 전까지 총 넉 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1990년대 가요계를 넘어 대중문화계 전반에 반향을 일으켰다.

음악이 갖는 파격성과 창의성, 주류 문화에 대한 공격성, 소외된 젊은 세대에 대한 위로를 통해 이들은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 자양분을 흡수한 '서태지 키드'들이 무대를 누빈다. 그래서 이들이 제시한 패러다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76점짜리의 반란, 그리고 파란 = 서태지와아이들의 첫 방송은 1992년 3월29일 KBS 2TV '젊음의 행진'. 그러나 반응을 얻은 건 같은 해 4월11일 MBC TV '특종 TV 연예' 첫 회였다.

'특종 TV 연예' 담당 PD였던 송창의 CJ E&M 방송사업부문 프로그램 개발센터장은 당시를 또렷이 기억한다.

"프로그램 타이틀 음악을 새롭게 해보고 싶었어요. 책상 위에 쌓인 가수들의 데모 테이프 중 우연히 한 개를 꺼냈는데 서태지와아이들이었죠. 데뷔 음반이 나오기 전이었는데 1집 수록곡 대부분이 실린 테이프였어요. 들어보니 정말 좋았죠. 매니저를 불러 타이틀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 등 1집 수록곡 세 곡을 짜깁기한 음악이 나왔어요."

송 센터장은 방송 첫회 '신곡 무대'라는 신인 소개 코너에 서태지와아이들을 출연시켰다. 당시 이들은 심사위원으로부터 76점이란 다소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매주 이들의 음악을 내보냈고 4주가량 지나니 뜨기 시작했다.

서태지와아이들에 대한 반향은 오프라인 시장에서 거셌다. 1집은 데뷔 한달 만에 40만장이 팔리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MBC TV '여러분의 인기가요' 등 각종 음악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 '난 알아요'의 열풍에 밀려 그해 연초부터 가요계를 휩쓴 신승훈 등의 발라드는 퇴조의 빛을 보이기도 했다.

또 1992년 8월 올림픽공원 내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태지와아이들의 라이브 공연에는 1만여 팬이 몰렸고 공연 도중 감격한 소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절하는 사태도 속출했다.

이후 이들의 흑인풍 머리, 상표를 떼지 않은 의상, 회오리춤과 버터플라이 춤 등의 댄스까지 속속들이 유행처럼 번졌다.

◇대중음악계 지형을 바꾸다 = 1990년대 '특종 TV 연예' 진행자였던 임백천은 서태지 15주년 기념 행사에서 "가요계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서태지와아이들의 출연은 한국 가요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됐다.

서태지가 주도적으로 창작한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은 1집을 시작으로 1996년 1월22일 은퇴를 발표하기 전까지 2집 '하여가'(93년), 3집 '발해를 꿈꾸며'(94년), 4집 '컴 백 홈'(95년)까지 랩댄스, 메탈과 힙합 국악의 접목, 록, 갱스터랩 등 다양한 음악적 전이를 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서태지는 대중음악 역사를 바꾼 인물"이라며 "기존에 존재한 주요 음악 문법들의 위기를 가져오고 새로운 방향으로 견인한 주체다. 이전의 대중음악이 트로트, 록, 포크 등에 머물렀다면 서태지는 록을 기초로 흑인음악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다. 1990년대 음악의 중심을 록과 흑인음악으로 바꾼 셈이다"고 평했다.

송 센터장 역시 "분명 기존 음악과 느낌이 달랐다"며 "'난 알아요'를 듣는데 전주에 헤비메탈이 있고 후렴구는 발라드였다. 4분짜리 노래에 네 가지 장르가 튀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작곡자가 뭐하는 놈이야'라고 물어보니 20살이라더라, 충격이었다"고 기억했다.

활동 방식도 신선했다. 이들은 새 음반 준비 기간에는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대중음악평론가 정덕현씨는 "당시는 신비주의가 통하던 시절이었다"며 "지금은 대중이 스타와 동일시하며 같은 점을 찾고 싶어하므로 서태지와아이들은 시대와 잘 들어맞은 셈"이라고 말했다.

◇청년 문화의 초석을 다지다 = 서태지와아이들 또 하나의 공적은 1990년대 청년을 대변하는 메시지를 음악에 담으며 청년 문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이다.

임진모 씨는 "서태지는 저항으로 일컬어지는 영 제너레이션 의식을 음악에서 놓치지 않았다"며 "스타이면서도 주류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음악으로 돌파해 아티스트의 미덕이 실험과 도전, 저항이란 걸 일깨워줬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은 안정을 원하는 기성세대에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중략)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3집 '교실 이데아')

'그는 모든 범죄와 살인을 만들었어, (중략) 전쟁, 마약, 살인, 테러 그 모든 것을 기획했어, 넌 많은 걸 잃어가게 됐네, 우리의 일생을 과연 누구에 바치는가'(4집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여느 가수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뚜렷한 메시지 탓에 서태지와아이들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교실이데아'의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사탄의 음성이 들린다는 괴소문이 PC 통신망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돼 악마를 숭배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록그룹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 등이 이런 억측에 휩싸였듯이 과학적인 근거 없는 루머였지만 TV 뉴스에서도 다뤄졌을 정도.

또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등이 부정적이라며 가사 수정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서태지와아이들은 이에 반발, 가사를 전면 삭제하고 연주곡으로 선보이는 반격을 시도했다.

나아가 공연윤리위원회는 4집 곡들의 가사를 문제 삼아 검찰에 고발했고, 급기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서태지와아이들 문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는 등 정치권까지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정덕현 씨는 "1970년대 청년 문화에서 나온 음악도 반항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이 흐름은 한때 실종됐다"며 "1990년대로 넘어오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신세대의 감성을 서태지가 직설적으로 대변했다. 시대 반항적인 부분이 상업적으로 잘 연계됐다"고 평했다.

송창의 센터장도 "서태지와아이들은 청년 문화가 대중문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초석이 됐다"며 "젊은이들의 자기 표현이 서태지와아이들이 나오기 전후로 크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기성세대가 대중문화를 주도했다면 서태지와 아이들부터는 젊은 세대가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팬덤의 진화를 이끌다 = 서태지와아이들은 팬 문화도 변화시켰다. 1970-80년대 조용필의 '오빠 부대'가 열성적이었지만 서태지와아이들의 팬덤은 한층 조직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서태지와아이들 해체 직후인 1996년 주요 팬클럽은 서울시에 문화관련 사회단체 설립신고를 하고 기념사업회를 출범했고, 솔로로 나선 서태지의 팬덤은 아티스트의 가치관과 맥을 같이하며 지금도 사회 공익 활동을 펼치고 있다.

팬들은 2003년 4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저작권 신탁관리 계약을 해지한 서태지가 이후 저작권료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자 2008년 '올바른 음악 저작권 문화 챙김이'를 만들고 저작권 문화 개선 캠페인을 벌였다.

또 서태지가 8집과 자신이 주최하는 록 페스티벌인 'ETPFEST'에서 환경보호 메시지를 전하고 북극곰 살리기 등에 나서자 팬들도 서태지의 공연장에서 폐휴대전화를 수거하고 쓰레기봉투를 배포하는 등 환경 운동에 동참했다.

이번 20주년 선물도 뜻깊다. 서태지 팬들은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환경오염으로 훼손된 브라질 인근 열대우림에 '서태지 숲(Seotaiji Forest)'을 조성했다.

서태지숲 프로젝트의 '총대(총괄책임자)'인 박기연 씨와 스태프인 지민정 씨는 "서태지 씨가 첫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라며 "그 발자취가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길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