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배에 아이 품은 채…치마 속에 폭탄 숨긴 그녀

슬라이드 이미지 1
슬라이드 이미지 2
슬라이드 이미지 3
슬라이드 이미지 4
슬라이드 이미지 5
슬라이드 이미지 6
슬라이드 이미지 7
슬라이드 이미지 8
슬라이드 이미지 9
슬라이드 이미지 10
슬라이드 이미지 11
슬라이드 이미지 12
슬라이드 이미지 13
슬라이드 이미지 14
슬라이드 이미지 15


1920년 8월 1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평양에 다섯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 중 한 명은 배가 부른 임신 5개월 된 여성이었습니다. 이틀 뒤 깜깜한 밤. 이 다섯 명은 평양 시내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이다. – 안경신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 그리고 평남부청까지 울려퍼진 폭발음.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 독립운동가들이 던진 폭탄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이 거사는 평남도청을 제외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폭탄에 한번 더 불 붙일 시도도 하지 못한 채 일본 경관대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섯 명 중 한 명은 혼자 가까운 참외밭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배 안에 5개월 된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신을 하고서도 무력 투쟁의 길을 선택한 그녀의 이름은 안경신.

‘평양에서는 폭탄 사건이 일어나서 매우 소동되며 평양 천지는 가위 물 끓듯 하였다’ – 1920년 8월 19일 매일 신보

이튿날 폭탄 한 개를 건네 받은 그녀는 또 다시 거사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한층 강화된 일제의 경비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함경남도로 피신했습니다.

1921년 3월. 평양 거사에 실패한 지 8개월에 접어들던 때 그녀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체포 당시 그녀 품에는 태어난 지 고작 12일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 – 재판정을 향해 꾸짖던 말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았던 그녀지만 민족을 위한 투지는 법정에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사형선고를 전해들은 임시정부는 재판부에 의견서를 보냈고, 그 결과 10년 형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아이는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딸의 체포와 사형 구형을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는 그녀가 구금된 지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련만 오히려 동료의 죽음을 더 슬퍼하고 나라를 더 걱정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개인의 비극적 운명을 묵묵히 감내했던 독립운동가 안경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그녀지만, 우리는 그녀가 언제 어떻게 떠났는지 설명할 자료조차 찾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SBS 스브스뉴스)    

"강제징용의 역사를 기억해 주세요" '나도펀딩' 바로가기

▶ 구두 굽에 필름 넣어…日 만행 알린 '원조 석호필'
▶ 철거하면 끝?…무관심에 사라지는 아픈 역사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