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심더. 한번 해 보겠심더."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 7차전. 이미 6차전까지 3승을 거두고 지칠 대로 지친 투수가 다시 선발로 나섰습니다. 그는 9회까지 무실점 완봉승을 기록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를 승리로 마무리했습니다.
요즘 프로야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최동원은 7차전까지 5차례나 등판했습니다. 당시 롯데 강병철 감독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감독) 우짜노. 예까지 왔는데" "(최) 알겠심더. 한번 해 보겠심더."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끝과 한국 프로 야구의 시작에서 한국 야구의 역사가 된 투수. 홈런이 아닌 삼진의 재미를 알게 해준 투수. 3구3진 무쇠팔 최동원입니다.
‘투수 최동원’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75년, 고교 2학년 때였습니다. 최동원은 당대 최강 경북고와 군산상고를‘노히트 노런’으로 꺾었습니다. 최동원의 경기를 지켜 본 일본의 전설적인 400승 투수 가네다 감독이 양자로 데려가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아닌 연세대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은 대학에서도 압도적이었습니다. 전국대학야구 5개 대회에서 4개의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우승컵이 늘어날수록 그의 팔은 심하게 혹사 됐습니다.
1981년 국제야구대회 국가대표로 출전해 캐나다에 강속구를 뿌려낸 그는 최우수 선수상을 따내며 메이저리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한국 최초로 계약을 합니다.
그러나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라설 수 없었습니다. 병역문제와 한국 야구계의 반발로 한국 최초 메이저리그 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1982년 국내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 최동원은 롯데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총 연봉 1억 원. 서울 강남의 아파트 4~5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하지만 첫 해 성적은 9승에 그쳤고 몸값이 아깝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최동원은 의연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혹사당한 어깨의 재활치료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7차전에서 최동원은 삼성을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며 우승컵을 따냅니다. 최동원의 ‘나 홀로 4승’ 기록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다시 나올 수 없는 전설이 됐습니다.
1987년에는 전설과 전설이 붙었습니다.‘무쇠팔’ 최동원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의 만남은 한국 야구사상 최고 투수의 맞대결이었습니다.
9회에 끝나야 할 경기는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15회까지 갔습니다. 두 선수 모두 이미 체력의 한계는 넘어섰지만 끝까지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았고 경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슈퍼스타 최동원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1988년 무명 선수들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 선수협을 결성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마자 야구 인생을 통째로 바친 롯데에서 삼성으로 강제 트레이드 됐습니다.
1990년 결국 몸에 맞지 않던 삼성 유니폼을 벗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한국 최고의 투수 최동원은 그렇게 쓸쓸히 마운드에서 사라졌습니다.
은퇴 이후 고향 부산에서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야당후보로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구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를 받아주는 구단은 없었습니다.
은퇴한 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한화의 투수코치로 복귀했습니다. 2군에 있던 류현진을 코치하며 1군 선발투수로 올리는 데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구 인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몸 속에서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2011년 7월 최동원은 모교 후배들의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짧은 머리에 금테 안경은 그대로였지만 너무도 야윈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이 모습이 마운드 위 최동원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두 달 뒤 한국프로야구의 서른 번째 생일 날 최동원은 지상의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53세. 숨을 거둔 최동원의 오른손엔 야구공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에 인생 전부를 바친 그라운드에서 물러나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 선수는 야구를 사랑한 것이라고.” (2006년 7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SBS 스브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