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는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해 간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이기도 하다.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내야 했던 절망과 아픔의 현장이 광성보다.
특히 광성보는 그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유속이 빠른 손돌목을 지키는 중요 요새였기 때문에 환란의 아픔을 그 어떤 전초기지보다 아프게 떠안아야 했던 것이다.
강화도는 고려 때의 몽골항쟁부터 구한말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략요충지였다. 그런 이유로 고려 때는 해안을 따라 10리에 하나씩 진(鎭)을 두었으며, 진과 진 사이에는 보(堡)를 두고, 진과 보 사이에는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이후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5개의 진과 7개의 보를 합친 12진보를 두어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그 아래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다.
전쟁의 원인은 미국이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침몰당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 규명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잇따른 교섭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강화해협으로의 진입과 해상로 파악을 위한 탐침을 계속하자,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 측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의 피해는 조선군 지휘관이었던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성 안에서 전사 100여명, 성 밖에서 전사자 240여명, 백병전에서 피살 또는 투신자살한 사람이 100여명이었다고 한다. 반면, 미군 측의 피해는 사망 3명에 부상자 10여명에 불과했다.
조선은 죽음으로써 항전했지만, 광성보의 함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의 조선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보다는 어떻게든 적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홍보하며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2년 뒤 실각함으로써 쇄국정책은 그 명을 다하고 만다.
운양호 사건의 주무대는 초지진(草芝鎭)이다. 초지진은 오늘 여정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운양호 사건은 초지진에서 좀 더 이야기하도록 하자.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의 목줄에 비유되는 손돌목을 지키는 요새이다. 용두돈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손돌목은 바다라기보다는 거센 물결의 강처럼 보인다. 저 검은 물속으로 전쟁에 패한 조선의 수많은 군사들이 몸을 던졌으리라. 그들의 울분과 비탄이 아직도 손돌목을 배회하는 듯 스산하기만 하다.
포격전에서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던 미군은 손돌목돈대에서의 백병전으로 중위 계급의 장교 한 명이 창에 찔려 사망하는 등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사실 산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짧은 산길이다. 10여분을 걸으면 길은 다시 갈대들이 무성한 바다로 이어진다.
그렇게 걸음이 느리니 그 걸음을 느낄 수 있고, 그 느린 걸음은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차라리 천천히 제대로 걸으라는 길을 만든 이의 마음 같기도 하고, 그런 마음은 걷는 이에게 차라리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문득 역사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신미양요 이후 60여년이 지난 해방공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우리나라 최고의 안보 동맹이니 말이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치른 일본 역시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살고 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른다.
외신들이 전하는 소식들은 조만간 미국의 북한 폭격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낭설일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 안보가 우리의 손이 아닌 남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동시에 한반도 안보상황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는 이치는 국익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국익에 부합한다면, 오늘의 우방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주국방을 위한 역량 결집과 의식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진입로인지라,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1866년), 미국의 아세아 함대(1871년), 그리고 일본 군함 운양호(1875년)가 만들어낸 참화를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 방위의 전초기지였다.
당시 흥성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막을 내리자, 일본은 조선의 문호를 열 적기로 판단하고 부산과 동해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후 강화도에 운양호가 나타난 것이다. 운양호는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측량을 구실로 연안을 정탐하면서 긴장을 높여갔다. 전투를 유발한 것이다. 이에 조선은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결국 조선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한다. 국권침탈의 시작이자,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바로 그 조약이다.
결국 신미양요는 무의미한 전쟁이 되어 버렸고, 광성보의 450여명에 이르는 고혼들의 희생은 덧없는 죽음이 되고 만 것이다.
초지진임을 알리는 입간판 아래에도 신미양요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찍은 사진들이다.
소나무는 초지돈대 성곽에 기대어 서서 그날의 처참했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다. 130여 년 전 초지진이 외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살육이 자행되던 그 순간의 아픔을 소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소나무를 바라본다. 수령 400년, 이름하야 ‘초지진 소나무’. 초지진의 수호나무로, 긴 세월을 살아낸 소나무는 물끄러미 초지돈대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그래도 잘 살아남았다고, 그 흉한 세월을 겪고도 잘 살아남았다고 위로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날을 잊지는 말라고 당부를 할 것이다.
오늘의 여정이 끝이 났다. 문득, 길의 끝에서 다음 길을 계획하게 된다. 다음은 어디를 걸을까?
** 강화도 가는 길
강화도 가는 버스 : 직행 3000번, 좌석 800번, 급행 8601번, 급행 8600번
강화도 내 시내버스(2코스와 연결되는 버스) : 51번, 52번, 56번, 해안순환(1번, 2번)
강화도 내 택시 : 강화콜(1577-6669), 개인콜(1566-1771), 초지진에서 갑곶돈대까지 택시요금 13,000원~15,000원(협상요금).
▶ [라이프] 바다와 역사가 숨 쉬는 길 - 강화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①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