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취재진은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자녀의 재활과 치료를 위해 매달 어느 정도의 돈을 쓰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정성스럽게 답을 적어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설문지를 살펴보는데, 한 어머니가 설문지 뒷장 여백에 긴 글을 남겨주신 걸 발견했습니다. 이 글은 '초등 입학 전에 치료비에 1억 원 이상 쓰고 보내며...(주위에 흔합니다)'로 시작했습니다.
8살,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이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1억 원이 넘는 치료비를 썼지만, 입학 후 지원이 줄고 치료가 중단되면서 아이의 성장에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어졌습니다. 학교 입학 후 정신과 약도 복용하게 됐다며 "아이의 장애 정도, 기능, 수준과 별개로 누구나 꾸준히 계속해서 치료와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연락처나 이름을 남기진 않으셔서 정확한 상황과 말의 의미를 다시 묻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자폐인 자녀를 위해 이른 시기부터 큰돈을 써가며 노력했지만 부모와 가정이 홀로 버티며 그 지원을 이어가기엔 역부족이었고, 현행 공교육 체계와 학교 현장은 이를 보완해주지 못하고 있단 호소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A4 용지 한 바닥을 꽉 채운 긴 글은 "슬프고 암담합니다"로 끝났습니다.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자폐 자녀를 둔 가정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격한 감정을 보여주지 않아도, 부모님들이 담담하게 전하는 현실 속 '사실들'이 이미 자폐 가정들이 처한 현실의 무게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취재 과정 중엔 무언가 울컥 치솟을 때도 있었고, 인터뷰를 진행하다 질문을 잇기 어려울 만큼 눈물이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슬프고 암담하다"는 이 마지막 글귀를 읽었던 순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발달장애 부모 517명 설문조사에 나타난 '현실과 제도의 격차'
응답자들이 현재 진행 중인 평균 치료 개수는 3.9개였습니다. 치료비로 월 10-50만 원 정도를 지출한다고 답한 가정은 평균 2.29개, 300만 원 이상 쓴다고 답한 가정은 5.37개의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비용이 많이 지출되는 가정의 사례를 살펴보면 행동치료(ABA)가 포함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만 원 이상 지출 구간부터 ABA 포함 비율이 40%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ABA는 자폐스펙트럼장애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근거 기반 치료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비용이 높은 비급여 치료 중 하나입니다. 일대일, 또는 전문가 여러 명이 한 아이에게 투입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경우가 많아 비용이 높은데, 정부가 제공하는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 대상이 되지 않는 비율이 다른 치료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는 18세 미만 성장기 장애 아동에게 정신적, 감각적 기능 향상과 행동발달을 위한 발달재활서비스를 지원하고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을 근거로 제공되는 일종의 '치료비 지원금'인데, 대상 아동의 장애 정도가 아닌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지원금이 나뉩니다. 기준중위소득 180% 이하까지만 대상이 되며 지원액은 소득 구간별로 월 18~26만 원까지 차등을 두는데 기초생활수급자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자 부담금이 월 2~8만 원 포함됩니다. 신청자는 많고 재원은 부족해 대상자가 돼도 바로 받을 수도 없지만, 실제 치료센터의 현실 치료비와 바우처 지원 금액의 격차도 큽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는데도 치료를 놓지 못하는 이유
천근아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골든타임이라는 게 '센터 뺑뺑이'를 돌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부모가 직접 개입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 제 환자 중에는 18개월 때부터 센터를 다닌 아이가 있었는데 5살 때 저를 만났을 때 아이가 멍해져 있는 모습이 있었다"며 "언어 치료 주 3회, 행동 치료 12시간처럼 단순 횟수와 시간만이 아니라 어떤 타깃으로 치료사가 아이의 진짜 부족한 부분을 제대로 알고 치료를 그에 맞게 하고 있는지를 부모님이 들여다봐 주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10개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 가정은 '외벌이 가정'이었고, 아이의 치료비로 월 평균 약 300만 원 정도를 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고도 했는데요. 아이가 현재 받고 있는 치료는 언어, 인지, 작업, 감통, 놀이, 미술, 음악, 특수체육, ABA, TMS(자기자극치료)였는데, 최소 주 2회를 기본으로 진행되는 치료실의 스케줄을 감안하면 아이도 부모님도 매일 빡빡한 시간표 속 이 센터에서 저 센터를 옮겨 다니느라 쉴 틈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가정 경제에 위기를 느끼고 있음에도 치료를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이 분께 직접 물을 순 없었지만 설문조사에 응답해주신 다른 분들의 응답에서 조금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중증일수록 퇴행 문제 때문에 치료를 손 놓을 수 없는데 나라 지원은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저희 집은 아이 둘이 자폐스펙트럼이라 치료를 줄이고 줄였는데도 생계에 지장이 있어요. 그렇다고 치료를 안 하자니 퇴행하면 앞으로 아이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걸 알기에 놓지도 못합니다. 그럼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사실 장애 아이가 있으면 손이 너무나 많이 가서 맞벌이 하기가 힘들어요. 특수학교는 너무나도 적고 들어가는 문턱은 높으니까요. 저희 아이들 역시 무발화 중증이지만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기에 방과 후 돌봄 같은 건 꿈도 못 꿉니다. 사설 치료는 말도 못하게 비싸고... 바우처는 금액이 너무 적게 책정돼 있고요. 정말 장애 아이를 키우기 힘든 나라라고 생각해요." (중증 자폐 자녀 2명을 키우고 있는 어머니)
"가능성 있는 애들은 금방 좋아져요. 원석이거든요"라는 말에 흔들렸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강남에 유명한 행동치료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가봤습니다. 저 또한 자폐스펙트럼 자녀를 키우고 있는 보호자이기에 이 센터의 명성을 왕왕 들어왔었고, 저희 아이는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종류의 수업이라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됐습니다. 상담을 해주신 치료사 선생님은 저희 아이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능성 있는 애들은 금방 좋아져요. 그런 아이들이 '원석'이거든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 가능성이 높고, 금방 좋아진다는 말. 이런 말을 듣는 부모 중 흔들리지 않을 부모가 과연 있을까요. 취재를 목적으로 한 방문이었음에도 솔직히 저 또한 흔들렸습니다. 기분이 슬쩍 좋아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어진 말은 이랬습니다. "저희 '조기 반(조기수업)'이 4명씩 두 반이 있는데, 이 중 한 반 아이가 다음 달에 나가요. 그래서 자리가 하나 생기는데, 최근에 이 반에 들어온 애들이 다 괜찮거든요. 거기 들어가면 잘 맞을 것 같은데요." 조기수업은 보통 1회에 40-50분씩 진행되는 수업과 달리, 하루에 3-4시간을 붙여서 진행하는 수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센터의 조기수업은 매주 2차례 진행할 경우 약 150만 원 정도였습니다.
이런 수업을 꼭 사설 센터에 가야만 받을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지역에서 설치한 장애인복지관에도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치료 수업들이 있고, 서울시 어린이병원과 같은 공공병원, 발달장애거점병원 행동발달증진센터 등에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지관이나 공공병원 내 치료 수업이 금액도 훨씬 저렴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기회는 희소하고, 대기는 깁니다. "복지관 대기만 기다리면 조기개입이고 골든타임이고 다 지나간다"는 자조 섞인 부모님의 목소리도 취재 과정 중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 비수도권으로 갈수록 복지관은 물론 사설 치료센터도 부족해, 휴가나 방학을 이용해 서울에 원룸을 얻어 이른바 '치료 유학'을 오는 자폐 가정들도 있습니다.
사설 치료센터 얼마나 되고, 평균 치료비는 얼마일까?…복지부 "그런 통계 없다"
취재팀 자체적으로 표본 조사라도 해서 평균적인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시도해 봤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유 중 하나는 사설 치료센터는 우선 다루고 있는 분야도 다양하지만, 대부분 '그 외 기타 개인 서비스업', '기타 교육 지원 서비스업'으로 등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부의 인허가 대상 업종도 아니다 보니 대상이 방대해 데이터화 작업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정부에 관련 통계가 없는 이유도 일견 이해는 됐지만, 적지 않은 세금을 들여 운영하고 있는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 등 각종 지원 제도가 정작 실제 필요 대상들에겐 피부에 와닿는 정책이 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설 치료 센터의 규모나 비용 구조 등에 대한 조사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뉴스토리 방송 영상과 취재파일 1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뉴스토리] 대한민국 '자폐 사교육' 실태 - 치료가 사교육이 된 나라
▶ [취재파일] "자폐 아이들 치료해서 뭐 하냐"는 질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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