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갈등 사례는 이번에 벌어진 대법관 재제청 요구 사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타협 방식을 조희대 대법원장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달랐다. 이용훈은 성공했지만 조희대는 실패했다.
이용훈은 대법관 제청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나
'이용훈식 해결책'에 대해서는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라는 책에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권석천 작가(전 중앙일보 논설위원)가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인터뷰 등을 토대로 쓴 책이다.
2009년 8월 김용담 전 대법관의 후임을 정할 때의 일이었다. 청와대가 강력하게 희망했던 후보가 있었다. 길기봉 당시 대전지방법원장이었다. 그러나 길기봉 법원장은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현행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의 전신)에서 추천받지 못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뜻이었다.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대법관 카드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대법원장의 제청권, 나아가 사법권 독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요구한 인물이 추천 후보군에 포함되면 제청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 아예 대법관제청자문위의 추천 단계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상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에서 인용.)
청와대는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제청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 "대법관 제청 문제로 대법원장을 만날 이유가 없다. 대법원은 앞으로 대법관 후보를 서면으로 제청하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김용담 전 대법관 퇴임일까지도 후임 대법관이 임명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결국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추천한 후보자는 권오곤, 정갑주, 이진성, 민일영. 총 4명이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이 가운데 현직 법원장급에 해당하는 3명 중 한 사람을 대통령이 고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대통령이 3명 중 누구를 고르든 그대로 제청하겠다는 것이었다. 권석천 작가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청와대에 와일드카드를 준 셈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 중 민일영 당시 청주지방법원장을 골랐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민일영 법원장을 대법관으로 제청했다. 파국을 막은 것이다. 당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에 자리를 걸지 않으면 대법원장 역할을 해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용훈식 해결책' 시도한 조희대…결과는 달랐다
지난 2월,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는 노태악 전 대법관 퇴임을 앞두고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후임 대법관 후보 4명을 추천했다. 윤성식, 박순영, 손봉기, 김민기였다. 청와대는 김민기 수원고법 부장판사의 제청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하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은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 이유는 김민기 부장판사의 남편이 이재명 대통령이 임명한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라는 점이었다. 부부가 대법원과 헌재의 '최고법관' 자리를 나눠가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 안팎에서는 17년 전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그랬듯이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대법관 카드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대법원장의 제청권, 나아가 사법권 독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것이 진짜 이유라는 분석이 나왔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용훈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제청 논란 초기 국면이었던 2026년 3월 3일에 나온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측은 1순위 김민기, 2순위 박순영을 제시했고, 대법원장 측은 1순위 윤성식, 2순위 손봉기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후 대법원장이 청와대 뜻이 그렇다면 박순영 부장판사를 제청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청와대가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해 달라는 요구를 이어가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청와대가 콕 집어 요구한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중 대통령이 누구를 고르든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던 셈이다. 17년 전 이용훈 전 대법원장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이용훈식 해결책'이 실패한 후 일이 더 꼬였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 중 2명에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윤성식 부장판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사건 등을 담당하는 내란전담재판부 재판장으로 지정되었다. 내란 사건 담당 재판장을 대법관으로 지명하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박순영 부장판사는 현직 중앙선거관리위원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법관이 선관위원직을 맡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 6월 지방선거 직후 선관위를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특검도 도입됐다. 조희대 대법원장 측은 이 때문에 박순영 부장판사를 제청하기도 곤란해졌다는 입장을 청와대 측에 전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대통령 요구대로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느냐, 아니면 대통령과 합의 없이 손봉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느냐였다. (제3의 방법으로 후보군을 새로 정하기 위해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를 다시 여는 방법도 법원행정처장이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법원행정처장은 추천된 후보 4명에게 연락해 자진 포기 의사를 물었지만, 일부 후보의 반발로 없었던 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대통령과 합의 없이 손봉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타협 거부하고 각자 권한 행사…'재제청' 절차는 대법원장이 선택할 문제
'민주적 정당성'과 '사법 독립' 조화 필요…'내로남불'은 걸러야
다만, 지금 당장 걸러내야 할 사람들은 있다. '상대 편'이 대통령이고 '우리 편'이 대법원장이면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고, '우리 편'이 대통령이고 '상대 편'이 대법원장이면 '민주적 정당성'을 앞세우는 자들이다. 불과 몇 년 전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법관 제청을 놓고 갈등했을 때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며 대통령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요즘 민주적 정당성을 외치며 대법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배제한 후에야 합리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토론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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