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그날 밤, 갑자기 소리를 치며 잠에서 깬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 또 약 많이 드셨죠"라며 안정시켰다. 평소 신경계통 약을 과다 복용했던 날의 이상증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이 끝난 뒤 효자도 아들도 없었다.
낙타는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흘린 소변, 어머니가 방바닥에 뿌려버린 물까지 참아가며 정리했다. 어머니를 어렵게 침상에 누였지만 "맨날 아프기만 하고 죽고 싶다"는 어머니의 반복되는 그 말, 그 날 밤의 일들은 B씨를 유독 무겁게 짓눌렀다. B씨는 어머니 간병을 한 지 6개월 만에 살인범이 됐다.

"막막했어요. 계단을 쳐다보면서..."
둘이 돈을 벌다가 한 명이 와병하면 수입은 양쪽 모두 끊기게 된다. 경제적 고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5년 전 남편이 치매에 걸린 아내 신정순 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고 한다. 초등학생 자녀를 챙겨줄 시간도 여력도 부족한데, 남편 재활비용은 감당불가였다. "여기 저기 빌렸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말했다. 재활센터에 남편을 두고 3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신 씨는 이런 생각도 했다.
"과거에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여기서 같이 구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정말 들더라고요"
"기초생활수급자 부모님이 저한테 돈을 주셨어요"
"부모님이 기초생활수급자예요. 한 달에 몇 십만 원 나오는 걸로 부모님 두 분이 생활하는데 그 돈을 저한테 주셨어요. 그러면서도 우리 아빠가 막 울더라고요.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나중에 효도할 때까지, 내가 잘 사는 모습 보여줄 테까지 꼭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손 붙잡고 부탁드렸죠."
신 씨는 5년 전보다 안정을 찾아 오로지 남편이 나아지기만을 소망하고 있다. 그런 그녀는 간병 초기에 주문처럼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이 고비만 넘어가자. 후회할 일 하지 말자. 후회할 일 하면 남은 삶은 내게 더 큰 억압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고.

간병 1년 이내 살인 78%..."처음부터 버틸 수 없는 구조에 던져진 결과"
국내 정부기관에서 처음 발간 예정인 간병살인 보고서(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간병살인의 실태와 특성 분석')에서도 간병 초기의 막막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007년부터 2023년까지 발생한 228건의 간병살인을 분석한 해당 보고서에선 간병부터 살인까지 걸린 시간을 분석했다. 간병살인의 평균 간병기간은 27.73개월, 2년 4개월이었다.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1년 이상~2년 이내 4.9%, 2년 이상~3년 이내 3.9%, 3년 이상~5년 이내 5.9%, 5년 이상 7.3%이다. 나머지 78%는 '간병 1년 이내'로 간병 초기 범행이 압도적이었다. 간병인들의 "간병초기에 막막하다"는 공통적인 호소가 실증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보고서 저자인 김성희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실장은 "간병 초기에 마주하는 절망, 무력감이 범행을 촉발했다고 해석 가능하다"며 간병살인의 특성을 한 줄로 정리했다.
"간병 살인이 초기에 집중됐다는 건 처음부터 버틸 수 없는 구조에 던져 진 결과입니다"
범행동기 '처지 비관 53%, 환자 고통 절감 10%'..."심리적 붕괴가 범죄로"
이런 경향성은 범행 동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간병 생활에 지쳐 더는 못하겠다는 처지 비관, 즉 '돌봄 효능감 저하'가 53%로 가장 높았다. ▶환자의 이상 행동 등 간병 스트레스 24.4% ▶피해자 고통 절감 10.1% ▶자녀 간병부담 해소 7.8% ▶간병으로 인한 가정불화 4.6% 순으로 분석됐다.
이런 분석 결과는 간병살인에 대해 개인이 아닌 '구조적 차원'의 접근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성희 실장은 "간병살인의 범행 동기는 단순히 분노나 보복이 아니다. 심리적 붕괴가 범죄로 전이된 구조적 특이성을 지닌다"고 진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이 사라진다는 인식, 아무도 이 상황을 해결해주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범행으로 비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간병인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이런 구조를 끊어내도록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간병초기는 돌봄의 시작점이자, 범죄 시작의 취약 시기"
간병살인에서 나타는 이런 특성들은 일반적 살인과 구조를 달리한다. 분노, 원한, 복수 등 고전적 범죄 동기가 아니라 정서적 붕괴, 심리적 탈진 등 복합적이고 비극적인 정당화 동기가 많다는 것이다. 김성희 실장은 "간병인들의 처지 비관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 내렸다.
특히 간병 초기에 이런 위험성이 가장 크다. "간병 초기는 돌봄의 시작점이자, 범죄가 시작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시기"라는 분석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실장은 "간병 초기가 위기 개입의 골든타임"이라며 "사회적 조기 개입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간병인들이 공통적으로 밝힌 초기의 막막함을 사회가 제도적으로 해소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집으로 옮기는 순간부터 고비"..."초기 안내 및 지원 제도 시급"
5년째 간병 중인 신 씨는 "처음에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라도 알려줬으면 좋겠다"며 간병인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달라고 요구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나아가 병이 악화될 경우 어떤 준비를 해야 되는지 종합적인 안내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이런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처음 발병했을 때 가족이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대처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종의 네비게이터(안내자)가 병의 전개 방식을 알려주고, 단계별로 어디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병이 진전될 경우엔 더 이상 케어는 어렵다는 식의 안내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간병 제도 개선 논의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재정 부담'도 크지 않아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최우선 가치 '생명'…"사회 안전망 마련보다 시급한 것 없어"
간병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간병 부담 완화'도 시급하다. 간병비 지원, 장기요양급여 확대 등 경제적 지원은 지금까지 '정부 재정 부담'이라는 장벽 앞에 제 자리 걸음이다. 건보 재정 고갈 위험성은 중요한 고려 요인이지만, 단기 돌봄 제공, 간병인 휴식제도 등 재정 부담이 크지 않은 것부터라도 조금씩 확대해야 한다.
간병 부담 경감은 범죄 예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최우선 가치로 내건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적 사안이다. 현재의 간병 구조 속에선 간병인도 시간 차만 있을 뿐 결국 환자로 변하게 된다. 간병을 가족에게만 전담시키는 구조에선 돌봄은 지속 가능할 수 없고, 또 다른 돌봄 대상자만 양산하게 된다. 더 늦기 전에 간병을 '가족의 의무'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구조적 전환을 해야 하는 이유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안전망' 마련보다 시급한 과제도, 중요한 예산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