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의 긴 간병 기간. 어머니 A 씨는 고통이 익숙해지는 인고의 시간으로 여겼지만, 익숙함이 절망까지 무디게 하진 못했다. A 씨는 딸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떨리는 손으로 베개를 잡았다. 세상을 떠난 딸과 딸을 죽인 어머니, 간병살인의 끝은 절망이었다.
희생과 헌신의 단어인 '간병'과 형법에서 가장 잔인한 단어인 '살인'. 상반된 두 단어가 합쳐진 '간병살인'은 법적 용어가 아니다. 가족을 간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살인, 폭행치사, 유기치사 등 죽음으로 귀결된 사건을 말한다. 간병살인도 현행법으론 '범죄'일 뿐이라는 것이다.
간병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한다. "간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간병을 알 수가 없어요. 저도 간병을 하기 전까진 몰랐으니까. (7년 차 간병인)" 아이를 키우는 양육과 같은 돌봄은 '간병'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남편을 9년째 간병하는 아내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이 없어지는 것이죠."
"나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해서 퇴원을 했는데"
그동안 아버지가 아들을 키웠으니, 이젠 아들인 자신이 아버지를 돌본다는 생각으로 퇴원을 했다. B 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해서 퇴원을 했었는데 너무 어렵더라고요."
거동할 수 없는 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우고, 음식을 씹지 못하는 아버지께 캔에 담긴 영양식을 줘야 했다. 코에 호스를 삽입해 음식을 위장으로 바로 공급하는 경관급식으로 아버지의 끼니를 챙겼다. 수시로 몸을 뒤집어 주며 돌보는 건 오로지 B 씨의 몫이었다. 밤 9시부터 오전 8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을 빼놓고선 간병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과 간병을 병행하는 벅찼다. "간병한 지 1, 2주 만에 잘렸어요. 일을 제대로 못했거든요."
아버지를 퇴원시키며 다짐했던 마음은 모래성마냥 잘게 무너졌다. B 씨는 "당장 아버지한테 나갈 돈은 많은데, 잘렸을 때 거의 다 포기했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신세 한탄도 했다. 아버지의 마음의 불도 꺼진 걸까. B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지 말라 하시고 나서 그때부터 안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제가 아버지한테 잘렸다고 했던 날이었거든요."

30캔 중 10캔만 쓴 영양식…"포기와 연민의 공존 상태"
방 안에서 가끔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 "아들아". 이 말에 B 씨는 흔들려 다시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물도 영양식도 처방약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들을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B 씨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아버지는 숨졌다. 열흘 치 영양식 30캔 중 사용된 건 10캔뿐. 사망 당시 아버지의 체중은 약 39kg, 키 166cm의 정상 체중(66kg)에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대학생 B 씨는 존속살해범이 됐고 징역 4년 형이 확정됐다. 판결문에선 B 씨를 두고 "포기와 연민이 공존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B 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제가 감당할 수 있었던 것보다 그 이상으로 돼버리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희망고문 같다고 해야 되나. (아버지가) 다시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런 것도 힘들었고."
"후회돼요 도망칠 걸…그러면 아버지도 더 오래 사셨을 텐데"
B 씨는 후회하고 있었다. 다만, 시간을 되돌려도 그의 선택지엔 간병은 없었다. "후회돼요. 그냥 도망갈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아버지를 병원에 두고 도망간다는 걸 생각도 못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게 (보호자가 연락을 끊으면) 병원에서 환자를 계속 치료는 한다 하더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도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지 않았을까."
절망의 범죄 '간병살인'…2013년 이후 매년 17건
곧 발간 예정인 '간병살인 보고서'는 판결 선고 기준 2007년부터 2023년까지 간병살인을 분석했다. 정부 기관에서 처음으로 '간병살인'을 주제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간병살인을 사회적 범죄로 접근해 제도 개선을 하려는 시도이다. 2007년부터 간병살인을 별도 집계 분석해 발표하는 일본과 달리, 정확한 집계조차 하지 않는 국내에서 정부 기관 연구자가 나서 사건을 하나씩 살펴봤다.
보고서엔 모두 228건의 간병살인 사례가 담겨 있다. 매년 13.4건 수준인데, 2013년 이후만 놓고 보면 평균 17건으로 매년 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어디까지나 판결 선고 기준일 뿐, 실제 사례는 더 많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가해자가 자살해 공소권 없음 처리된 사건이나, 수사 및 재판 과정에 '간병' 요인이 배제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간병살인을 5개 유형으로 나뉜다. 자식이 간병 중 부모를 살해한 ▶친자 살인 ▶부부(夫-婦) ▶친장(親障/장애 자녀를 살해) ▶연지(連枝/형제자매 살해) ▶ 다중(多重/두 명의 피간병인 중 한 명을 살해)로 이 가운데 B 씨 사례 같은 친자 간병살인이 43.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부부(32.5%), 친장(18.9%), 다중(5.0%), 연지(3.1%) 순이었다.

가해자는 아들, 남편, 어머니 순…가해자 피해자 60대 이상 다수
1인 가구 증가, 여성의 경제활동 확산, 가족 해체 등으로 간병의 책임이 중년 이후 남성 자녀에게 이전되는데, 남성 간병인이 상대적으로 돌봄 경험에 취약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김성희 박사는 "남성이 폭력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돌봄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부족한 남성에게 무거운 책임이 전가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간병살인에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령대에서 일반 살인과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고령층 비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피해자 가운데 60대 이상이 66%, 가해자 가운데 60대 이상이 73%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간병' 가운데 살해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은 구조적 문제가 반영된 결과다. 김성희 박사는 "초고령사회가 만든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고령자가 또 다른 고령자를 돌보다가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령의 간병인은 자신의 건강상태도 양호하지 않은 상황에서 간병을 맡게 된다. 은퇴 이후 경제적 상황도 여의치 않은데 간병까지 도맡아 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고립은 심화되고, 결국 자포자기 심정으로 범행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발적 66.7%, 무직 74.7%, 피해자와 동거 94.3%…간병살인의 공통점
이런 특성은 간병살인의 66.7%가 '우발적 범행'이라는 결과와도 무관치 않다. 범행 4 건 중 1건(26.8%)이 음주 상태에서 피해자를 살해한 것도 마찬가지다. 보고서 저자인 김성희 박사는 "우발적 살인은 정서적인 부분에서 분노와 연관이 되는데, 간병살인의 경우엔 절망에서 비롯된 살인"이라고 진단했다. "피간병인인 부모와 자식, 내 가족들에 대해 분노를 느껴서 살인하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라서, 어떻게도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간병인은 '부모나 자식이 내일, 한 달 뒤, 1년 뒤, 아니면 언젠가는 병상을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무의미하다'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희망과 기대는 점차 희석되는데 간병 기간은 늘어나고 경제적 고립까지 심화된다. 간병을 대신 해줄 다른 가족도 없다. 간병인 고용이나 입원도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본다면, 간병살인 배경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박사는 "그래서 간병살인을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라며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적인 결과가 간병살인"이라고 설명했다.
최고 가치 '생명' 훼손한 '반인륜 범죄'…"생명을 지키다 절망이 범죄로 폭발"

간병살인 228건 가운데 유기징역은 61.8%, 집행유예는 38.2%로 전체 사건의 약 40%가 집행유예형이다. 징역 5년 이상도 36.4%에 달한다. 다른 양태의 살인죄와 달리 집행유예 비중이 큰 건 간병의 특수성을 반영한 건데, 엄벌을 처해진 경우도 상당하다. 한 법원은 암투병 아내를 간병 중 살해한 남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며 양형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간병살인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실이지만, 자칫 이러한 형태의 살인 범행이 일반적으로 용인돼 경한 처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유사 범죄가 재발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
살인을 단죄한 법원을 비판할 수 없다. 법원은 죄의 유무에 집중할 뿐, 나머지는 그들의 몫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건 간병살인은 '단죄'만으론 줄일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후행적인 처벌만으론 간병살인을 예방할 수 없다. '단죄' 같은 처벌의 두려움은 절망의 끝에 매달린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결국 생명을 지키는 간병이 생명을 빼앗는 결말로 끝나버리는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선 고립된 간병 상황에서 처한 이들이 많다. 그들이 보내는 경고 신호에 정부가 응답할 시간이다. 생명을 최상위 가치로 삼아 법과 제도를 만든 사회에서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간병살인은 삶이 더 이상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 범죄로 폭발한 것입니다. 절망이 폭발한 구조적 경고입니다. 지금 제도만으론 가족 돌봄이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우리 사회에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보고서 저자 김성희 박사)"